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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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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한 게 ‘악수’를 둔 것인가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장성급 회담에도 남북 군부간 불신은 더욱 가중… NLL 문제 깔금하게 매듭짓지 않은 게 화근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북방한계선(NLL) 사수냐. 남북 합의 정신 고수냐.”

혼돈 속에 있던 군은 NLL을 택했다. 물론 ‘일부’ 고위 장성의 결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과 한국군의 보고 누락과 관련한 이번 사건의 본질은 우선 현장 군 고위 장성들의 경직된 사고와, 군과 청와대 사이의 분열된 인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국방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변화와 개혁에 대한 체질적인 거부감과 불신감’이 지배하는 현실과 급변하는 남북 관계, 국내외 정세 사이에서 군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상은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한-미동맹의 이완과도 무관치 않다”면서 “과도기에 나타날 수 있는 불가피한 부작용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군 내부의 남남갈등 심각?

다른 해군 관계자의 사고 원인 분석도 비슷하다. “내부적으로 한국군은 전환기적 혼돈에 직면해 있다. 주적의 개념이 공공연하게 사회적인 도전을 받고 있으며, 전통적 질서와 권위는 조롱받고 있다. 더욱이 세계 최강의 전쟁 기계를 보유한 우방국과의 동맹 관계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

노무현 정권과 정치권을 겨냥한 날선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머리는 따라가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한국군은 히프가 무겁다.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이런 군을 움직이려면 스스로 부단히 개혁하고 혁신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군이 변화하고 혁신하려면 확고한 철학과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지도자와 정치권에는 이런 걸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에 대한 군의 보고누락 사건의 원인을 진단하는 일부 군 관계자들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하다. 뭔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긴장감까지 느껴진다. 한 장성의 발언은 이번 NLL 사건을 계기로 노출된 ‘군 내부의 남남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엿보게 한다. “남북 군부간의 긴장 완화를 누가 마다하겠느냐. 우리는 이미 우리의 진정한 적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내부적 공감대를 이룬 지 오래다. 무적강군을 지향하는 것은 북한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국내외의 정세 변화를 감안한 군 혁신도 부단히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군 통수권자와 결탁한 몇몇 군 지휘부는 자기들만 잘났고 대부분의 군인들을 어린애 취급한다. 대부분의 군 장성들을 그저 기득권으로 똘똘 뭉친 문제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이 팽배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처음 인터뷰에는 머뭇거리다가 한번 말문이 트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속사포와 같은 불만들을 쏟아 낸다.

군과 청와대 사이 대북관의 차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군 장성 모임에서 “북한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과 이에 대한 일부 군 장성들의 반발 등은 좁히기 힘든 양쪽간의 시각 차이를 방증한다. 사실 군은 국가안보의 보루답게 보수적이며 새로운 변화에 적응이 느린 편이다. 특히 지난 수년간 남북 관계와 이를 둘러싼 군사안보 관계가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군의 변신은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특히 북한 위협의 성격과 변화 그리고 대응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북한의 근원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이를 위해 군 당국간 신뢰 구축 조치를 추진하면서도 지속적인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합의에는 쉽게 도달할 수 있었으나, 과도기의 북한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이에 대한 군의 대처 방안을 놓고는 늘 어정쩡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게 군 핵심 인사의 설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문가와 군 관계자들은 남북 군부간의 뿌리 깊은 불신에도 주목한다. 특히 동해와는 달리 서해상에서 남북 해군 사이의 빈번한 충돌과 이로 인한 지속적인 긴장은 서로 악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패게 만들었다. 군의 이런 태도는 이번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 사건 대응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합동조사단은 7월23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이번 서해상 남북 함정간 교신 누락 사건은 “2002년 6월 발생한 서해교전으로 인해 북 해군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데다, 남북 장성급 회담 합의사항에 대해 상부로부터 수차에 걸쳐 강조 지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휘관들의 인식이 미흡한 상황에서 해군 작전사령관이 상부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군 “북 경비정의 월선은 의도적”

해군은 이번 북한 경비정의 NLL 월선은 의도적이며, NLL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셈을 내보인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군의 고위 관계자들은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7월14일 NLL을 넘기 전에 1차 경고 메시지를 시작으로 4차례 메시지를 송신했음에도 불구하고 NLL의 남쪽 약 1.3km를 내려온 뒤 첫 교신을 했다고 주장했다. 남북이 지난 6월4일 남북 장성급 대표가 서명한 서해상의 우방적 충돌 방지 합의서에 따르면 북한이 적어도 NLL을 넘기 전에 해군과 교신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다. 해군 관계자들은 북쪽의 송신 내용이 남쪽 해군을 기만하려는 전술로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합동조사단은 “북측이 한라산-백두산 등 남북간에 합의된 호출부호를 사용했고 중국 어선이 부근에 위치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북한이) 기만 교신을 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조영길 국방장관이 7월24일 북한 경비정 교신 관련 보고 누락과 관련해 국회 국방위에서 밝힌 내용은 군의 대북 불신을 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북한 함정의 통신을 보고할 경우 합참 등 상급부대에서 ‘사격을 중지하라’라고 할까봐 보고를 안 했다고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다른 이유로 “상황 종료 후 언론 등에 의한 ‘사격 부당성’ 제기로 북측의 내부 분열 유도 등에 역이용당할 우려도 있어 보고하지 않았다”고도 말해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국방부와 정부 합동조사단은 7월23일 브리핑에서 “해군작전사령관이 북측의 송신 사실을 기만 통신으로 판단,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을 뿐이다. 조 장관의 발언은 해군이 의도적으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남쪽 해군의 북한 군에 대한 불신 정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이 국방위에서 지적했듯이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합의까지 했는데 군이 오히려 충돌하기 위해 상부에 보고를 안 했다는 식인 것은 큰 문제”임에 분명하다. 남북간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당국의 노력과 성과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태도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장성급 회담, 군 내부 반발 적잖아

남북이 6월4일 2차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 방지와 전선지역 선전물 철거 등을 어렵게 합의했지만 군 일부의 반발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장성급 회담 때 NLL 문제를 깔금하게 매듭짓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남쪽 해군은 남북 장성급 회담에 서로 대치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부당한 물리적 행위를 금지한 것 등을 합의한 내용을 문제 삼았다. 이 합의는 오히려 북한 함정의 NLL 침범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즉, 합의 이전에는 북한 함정이 NLL를 넘어오면 남쪽 해군 함정이 즉각 경고 사격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월선에 부담을 느꼈지만, 이제 NLL을 넘어도 ‘부당한 물리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 때문에 남쪽 해군이 즉각 응사를 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더 자주 내려올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해군은 북한이 NLL을 넘기 전 남쪽 초계함이 보낸 경고 송신을 무신할 걸 중시하고 있다. 즉, 애초부터 NLL을 침범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6월15일 남쪽에 보낸 전통문에서 무전송신 시각을 남쪽 감청부대에서 확인한 시각보다 10여분 전이라고 속여 더 의혹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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