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빠, 총을 들지 마세요

등록 2003-03-05 00:00 수정 2020-05-02 04:23

`가정폭력 문제는 미주 한인사회도 심각… 아시아계 중 단연 높은 빈도, 살인사건도 빈번


2월9일 새벽 1시5분. 로스앤젤레스(LA) 코리아타운을 순찰하던 LA경찰국 패트롤카는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 경찰은 머리에 부상을 당한 한인여성을 발견하고 구급차를 호출했다. 집안을 수색한 경찰은 50대 남자의 시체를 보고 즉시 인근에 비상을 걸었다. 이어 사건 발생지역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한인 윤성열씨를 ‘가정폭력 제1급 살인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폭력을 피해 가출하기도

이 사건 발생 한달 전인 1월3일 밤 9시50분, 역시 코리아타운을 순찰하던 패트롤카가 911(비상구조전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목격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37살의 한인남성이 36세의 동거녀를 총격 살해한 뒤 자살한 가정폭력 사건이라고 밝혔다.

LA다운타운에 위치한 ‘트윈 타워스’ 빌딩은 LA 일원에서 각종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을 수감하는 구치소다. 이곳에 수용되는 한인 범법자 가운데 약 30%가 가정폭력 혐의에 연루되어 있다고 사법 관계자들은 밝혔다. LA경찰국이 최근 인터넷에 올린 수배자 명단에도 한인가정 폭력 혐의자가 있다. 신원이 고모(38)씨로 기록된 수배자는 동거녀를 신체적으로 학대한 혐의다. 수배자의 사진과 혐의내용이 실린 공고문에는 “이 수배자를 발견하더라도 위험인물이므로 단독 체포하지 말고 경찰서에 즉시 신고할 것”을 경고했다.

LA검사장 출신의 제임스 한 LA시장은 1994년 LA검찰을 지휘할 당시 한인사회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한인가정 폭력실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지난 한해 동안 LA검찰이 수사한 1만6천여건의 가정폭력 사건 가운데 아시안계의 80%가 한인 관련사건”이라고 말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같은 상황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1년 LA를 포함한 LA카운티의 가정폭력사건은 4만건이 넘었는데, 동양계가 약 8천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인과 관련된 건수는 무려 6천건으로 전체 동양계의 80%를 차지했다. 미 연방 법무부가 2000년에 발표한 ‘캘리포니아주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1996~99년에 배우자 학대 등 가정폭력사건으로 한인이 구속 기소된 경우는 232명에 이르렀다. 이 같은 수치는 1993년 이후 해마다 증가추세를 보여왔다.

LA한인가정상담소가 지난달에 발표한 ‘2001년도 상담통계조사서’에는 한해 동안 총 1762건을 상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상담 건수는 전체의 66.2%인 1167건으로 가정문제였다. 그 가운데서 가정폭력은 322건으로 가장 많았다. 1998년 통계에서는 85명의 한인남성이 배우자 폭행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됐으며, 15명은 중범으로 처벌받았고, 3명은 한국으로 추방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인여성들을 위해 쉼터를 운영하는 베타니센터의 김정숙 수녀는 지난해 상담한 총 245명 가운데 이혼문제가 33건, 가정폭력이 23건, 부부갈등이 19건 등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상담 연령층은 40대가 55명으로 가장 많았다. 아시안-태평양가정센터쪽은 LA 일원의 보호소 10여곳에서 임시보호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약 50%가 한인여성이라고 밝혔다. 이들 대부분은 배우자의 폭력을 피해 가출한 여성이라는 것. LA 한인사회의 가정폭력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LA지역 한인가정 폭력 관련 주요 살인사건



발생일시
내용


1999년 8월27일
LA 코리아타운에서 백무본(58)씨 가정불화 끝에 부인과 친척 4명을 총격살해 뒤 자살.


2001년 6월24일
주덕자(44)씨 미국인 남편과 불화 끝에 총격피살, 남편도 자살.


2001년 10월22일
박도식(50)씨 가정불화로 직장 사무실에서 목매 자살.


2001년 11월5일
배우자 폭행으로 3년 실형 뒤 한국으로 추방된 김대철(45)씨 권총 자살.


2002년 2월12일
강두용(56)씨 이혼한 부인을 총을 쏘며 쫓아가다 경찰 포위망에 들자 자살.


2002년 2월26일
김영준(47)씨 부부싸움 중 아들을 폭행, 경찰 출동하자 집안에서 권총 자살.


2002년 4월6일
문태영(42)씨 독일계 남편과 별거 뒤 갈등으로 남편과 두딸 등 일가족 3명을 쏴 죽이고 자살.


2002년 6월1일
50대 한인 아버지가 20대 초반의 아들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1급 살인혐의로 체포됨.


2003년 1월3일
37살 한인남성이 36살 애인을 총격살해 뒤 자살.


2003년 2월10일
윤성렬씨 가정폭력 살인사건으로 체포, 100만달러 보석금.



심슨사건 이후 강력한 처벌 뒤따라

UCLA 공중보건대학의 수산 소렌슨 교수는 한인들의 가정폭력이 백인가정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최근 ‘가정폭력 조사연구보고서’에서 밝혔다. 이 보고서는 한인, 베트남, 기타 동양계, 흑인, 백인, 라티노 등 성인 3713명을 대상으로 2000년 4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45.5%가 직간접적으로 가정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경찰은 한인가정에서 아내를 때리고 잡혀온 남편에 대해 부인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 그대로 훈방해주었다. 또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고교생 딸을 때린 아버지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 6월12일에 발생한 O. J. 심슨의 살인사건 이후로 미국은 가정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고, 강력한 처벌이 뒤따랐다. 과거 미식축구의 영웅이면서 배우로도 인기를 모은 심슨은 살인사건에 연루되기 이전에 수차례 아내를 구타한 혐의로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심슨은 부부싸움이라며 법망을 피해갔다. 심슨은 배심원들의 무죄평결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 이후로 미 전국의 법정은 더 이상 부부싸움을 ‘칼로 물 베기’로 보지 않는다.

이제 미국 경찰은 가정폭력 혐의자에 대해 영장 없이도 체포, 구금할 수 있다. 만약 가정 내 싸움에서 한쪽이 홧김에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면, 가해자는 살인미수혐의로 중범처리가 된다. 또 최근에는 이 같은 중범 가정폭력자에게 추방조치까지 가해지고 있다.
미국사회도 가정폭력의 수위가 높다. 는 1998년 통계를 인용해 “미국에서 15초마다 한명의 여성이 매를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방법무부 통계청에 따르면 가정폭력사건이 약 300만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연 4천명 정도가 사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여성 피해자들의 95%가 남편, 전 남편, 남자친구 또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당했다. 피해여성의 30%는 폭력으로 인해 긴급후송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15~44살 여성이 주된 피해자들이다. 해마다 의료비만도 30억~5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4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인근의 산타클라라에서 한인 주부 문태영(당시 42살, 미국이름 태영 시퍼)씨가 독일계 남편과 두딸을 권총으로 죽인 뒤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별거 중인 남편과의 갈등 때문으로 분석했다. 백인 부유층이 주로 거주하며 강력사건도 없던 산타클라라에서 이 같은 한인계 가정폭력사건은 주류언론의 취재경쟁에 불을 붙였다.
이보다 한달 전인 3월19일 LA 인근의 샌버나디노카운티 소재 랜초 쿠카몽가 법정(판사 제라드 브라운)에서 앳된 표정의 한인 청소년 염승철(당시 17살, 미국이름 폴 염)군이 판사의 얼굴을 주시했다. "피고에게 40년의 종신형을 선고한다”는 판결이 내려지자 염군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이 54살이 되는 2040년에나 가서야 가석방심사를 받는다.
염군은 14살 때인 1999년 6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총으로 죽인 뒤 라스베이거스로 도주하다 체포됐다. 이 사건은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받아온 염군이 극단적 피해의식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민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간 갈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가정폭력 케이스였다.

피해여성들의 신고 기피가 문제


또 같은 해 2월26일에는 UCLA 인근에 살고 있는 김영준(47)씨가 부부싸움을 말리는 아들을 아령으로 때리는 바람에 부인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김씨는 집안에 숨어 있다 경찰의 투항권고를 무시하고 반항하다 사살됐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2주 전인 12일에는 강두용(57)씨가 이혼한 부인을 만나 총을 쏘고 도주하다 경찰 포위망에 들자 자살했다.
이 같은 한인들의 가정폭력에 대해 관계자들은 이민사회에서 가장이 받는 스트레스, 가족 구성원들 간의 세대차, 유교관습에 젖은 남존여비사상, 도박, 알코올, 마약 등을 요인으로 지적했다. 한인가정상담소의 자료에는 “유교문화권에서 가장의 권위를 세우려는 풍조가 부부싸움 도중 화를 참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든다”고 해석했다. 또한 한인여성들이 자녀문제나 경제적 여건 때문에 폭력을 참고 지내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학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LA검찰의 가정폭력 전담반에 소속된 T.C. 김 담당관은 “한인가정에서 남편들의 폭력행위가 사라지지 않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이 신고를 기피하거나 증인으로 나서려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가정폭력은 더 이상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범죄로 보는 것이 요즘 미국사회의 인식이다.

LA= 글·사진 김지현 전문위원 lia21c@hotmail.com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