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 못 떠나는 ‘늙다리 고시생’들의 애환… 사시정원 1천명 시대, 손익분기점은 35살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없나요?”
“아, 한명 있었는데 법원행정고시 하고 법무사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고 공부하러 갔습니다.”
8월10일 오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난 이용구(34)씨는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초저가 전자제품 인터넷쇼핑몰 치피아’(www.cheapia.co.kr)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해부터 속도조절카세트를 주력상품으로 내걸었다. 강의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거나 속도조절을 해가면서 들을 수 있는 게 이 제품의 강점이다. 이씨가 이 사업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사법고시(이하 ‘사시’)를 준비했던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사시준비생들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명문 법대를 졸업한 이씨는 그때 이후 줄곧 ‘고시생’이었다. 95년 결혼한 뒤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한 이씨는 98년 1차시험에 합격했지만 다음해 2차시험에서 낙방했다. 2차시험에 한번 불합격하는 것은 이곳 고시촌에서는 ‘상식’처럼 돼 있는 터라 이듬해 다시 1차시험을 봤다. 그러나 그 시험이 문제였다.
“2월이라 좀 추웠는데 옷을 얇게 입고 간 게 실수였죠. 1교시 내내 바들바들 떨었죠. 몇개는 답안을 밀려쓰고 10문제 정도는 풀지도 못했어요. 옷을 빌려입고 2교시부터 정신을 차렸는데 시험 끝나고 맞춰보니 커트라인 근처였어요. 결국 0.5점 차이로 떨어졌죠.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사를 해도 고시촌 안에서
지난해 4월 1차시험 발표 이후 그는 사시 준비를 접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남대문시장에 조그마한 옷가게를 냈지만, 사회와 격리돼 고시 준비만 한 탓에 순진하기만 했던 그는 장사꾼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띈 것이 속도조절카세트였다. 실제 가격을 알아보니 신림동에서는 너무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그래 이거다. 신림동은 가격탄력성이 높은 곳이라 이건 무조건 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시장으로 돌아가자.”
이씨의 판단은 주효했다. 지난해 신림동에서는 이씨의 카세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당분간 시험을 보지 않을 작정이다. ‘사시정원 1천명 시대’에 접어든 이상 이제 연수원에 들어가서 2년을 보내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고 해도 좋은 시절을 보기는 너무 늦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는 그러나 “미련은 남는다”며 여운을 남겼다.
“같이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했던 동기와 후배 4명은 모두 합격했거든요. 나중에 걔들을 어떻게 만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죽도록 공을 차고 골문 앞까지 갔는데 결국 골을 넣지 못한 축구선수가 이런 심정 아닐까요. 부와 권력을 주는 시험이 아니고 명예를 주는 시험이라고 생각한 뒤 한번 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면 또다시 고생시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신림동 고시촌에는 이씨처럼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시준비생’들이 참 많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도 이곳으로 ‘U턴’하기 일쑤다. 발을 한번 담그면 헤어나기 힘든 진짜 이유는 뭘까.
“김 기자는 술 마시죠?” “예, 그런데요.” “술 끊을 수 있어요?” “글쎄요.” “마약은 해 봤어요?” “예?” “사시를 그만두는 건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과는 비교도 안 돼요. 마약이나 마찬가지에요.”
신림9동 고시촌 한가운데에서 고시수험서만을 펴내는 출판사와 복사가게를 운영하는 정선동(45·도서출판 소망 대표)씨는 대뜸 사시를 마약에 빗댔다. “그냥 모르고 살면 괜찮은데 1년에 한번씩 사시 수석합격자나 어렵게 공부한 합격자들의 성공담이 언론에 소개되면 속이 뒤집어진다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정씨는 이곳에서는 터주대감 같은 인물이다. 정씨 자신도 지난 80년대 초 군복무를 마치고 이곳에서 사시를 준비했다. 90년대 들어 공부를 접고 고시 출판업으로 전환한 이래 이곳 생활이 20년째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이곳 사정에 누구보다 밝다. 함께 공부했다면서 줄줄이 꼽은 인물들 대부분이 현직 판사·검사·변호사들이다.
응시율에 비해 합격률 훨씬 떨어져
그는 그동안 수험서만 50여종을 펴냈다. 몇권은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가 2년 전부터 시작한 복사일은 다른 가게와는 달리 주문자생산방식이다. 사시를 준비했던 경험을 토대로 주로 2차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알짜배기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다.
정씨가 들려주는 ‘합격하지 못하고 오래 공부한 인물들’에 대한 얘기는 고시촌 바깥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50대 후반에 가족들과 헤어져서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시준비생도 있어요. 환갑이 넘은 분도 한분 있고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뒤에 국내에서 받아주는 데가 없다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요. 그만둬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데….”
고시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험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지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는 고시생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고시공부를 계속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고시정보를 제공하고 수험서를 파는 고시생들도 있다. 이들은 공부를 그만두고 부모에게 목돈을 얻어 PC방이나 비디오방 사업을 해도 꼭 고시촌 안에 차리고만다. 이곳을 벗어나는 데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
고시정보를 주로 제공하는 <법률저널>의 이상연 편집국장은 “우리 신문에도 7명의 기자들이 있는데 모두가 법대를 졸업하고 몇년씩 사시를 준비했던 이들”이라며 “운전면허가 있는 기자가 2명밖에 안 될 정도여서 고시촌 밖의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시공부를 오래 하다보면 기업체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어학실력이나 정보기술 관련 기능을 키우기가 어렵다”며 “거기에다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 이들은 그 나이에 월급쟁이를 해봐야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2001년 사시에 응시한 2만7431명 가운데 36살 이상은 3481명으로 전체의 12.7%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5년 동안 사시 최종합격자 가운데 36살 이상 합격자는 전체의 4.7%에 불과하다. 응시율 대비 합격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1/3 안팎으로, 현저히 떨어지는 셈이다. 고시촌을 떠나지 못하는 30대 중후반 세대가 상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0년 전 법조계에는 “사시 공부 10년 하고 40살에 변호사 개업하면 본전은 뽑는다”는 말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말이 됐다. 사시정원 1천명 시대를 눈앞에 둔 변호사업계는 우울증에 걸려 있다. 서울지역 변호사의 절반은 한해에 20건도 수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엔 이 손익분기점 시점에 대해 ‘35살 미만’이라는 분석이 많다.
고시촌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이제라도 냉정하게 손익분기점을 계산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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