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산다. 그전에 살던 곳은 흑석동이었으니 고향을 떠나온 뒤 14년 동안 동작구에서만 살았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사당동, 흑석동, 동작구 어느 곳에도 특별한 소속감이나 애착을 느끼진 않았다. 동네에 관심을 가지거나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고리도, 기회도 없다. 심지어 옆집에 러시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이사 온 지 2년이 다 돼서야 알았을 지경이다. 집은 ‘자러 가는 곳’일 뿐이다. 나만 그럴까? 전업주부나 중소 자영업자, 퇴직한 노인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직장인은 나처럼 동네에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야 퇴근하니, 동네에 머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방자치에, 동네정치에 참여할 순 없을까?
삼겹살 구우며 “프리허그는 어떨까요?”그런 고민을 시작한 지난겨울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혹시 풀뿌리 정치를 감시하는 풀뿌리 시민단체가 있다면 거기 가입해 활동하는 게 가장 쉬운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당동 풀뿌리 단체’ ‘동작구 시민단체’ ‘동작구 주민참여’ ‘사당동 지방자치’ 등 연상되는 단어는 모두 집어넣어 검색해봤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희망나눔동작네트워크’(이하 희망동네)다. 홈페이지를 보니 동작구에서 의정감시, 친환경무상급식조례 추진, 동작구 주민 페스티벌, 어린이 도서관 만들기, 홀몸노인 도배봉사 등의 활동을 한다고 돼 있었다. ‘도봉시민회’나 ‘관악주민연대’, ‘성미산마을’처럼 언론에 자주 오르내려 유명해진 단체가 아니기에 내 나름대로 ‘검증’을 해야 했다. 또한 쉽게 회원을 만날 수 있는 우리 ‘동네’의 단체가 있으면 그곳을 추천받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1월26일 상도동 희망동네 사무실(지난 4월 이사해 지금은 신대방동)을 찾아가 유호근 사무국장을 만났다. ‘동네’ 단위의 단체는 자신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가입하는 거라면 동네보다는 기초자치단체 단위의 시민단체에 가입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란 조언도 해줬다. 지방자치의 기초 단위가 시·군·구라서 풀뿌리 단체의 참여나 감시 활동도 시·군·구 단위로 이뤄진다는 얘기였다.
서울에 25개 구가 있는 건 알았지만, 동작구에 15개 동이 있다는 건 이날 처음 알았다. 구민이 40만 명이라는 것도, 한 해 구 예산이 3천억원이나 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희망동네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었고, 매년 의정감시 평가서를 각 정당에 전달해 지방선거 공천에 참조하도록 하겠다는 계획도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유호근’이란 이름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한 그 ‘유호근’이란 사실도 알게 됐고, 세상을 바꾸려면 지역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법처리 뒤 희망동네를 만들어 지역 단체를 네트워킹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에 감동도 받았다. 그 자리에서 가입신청서를 썼다.
적잖은 기대를 품었지만, 지역운동 단체에 가입만 하면 저절로 내 생활이 달라질 거라는 건 착각이었다. 회원이 모이는 자리에 불참하거나, 홈페이지에 잘 들어가지 않거나, 유일한 상근자인 유 사무국장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활동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희망동네는 내가 가입한 다른 ‘중앙 단위’의 몇몇 시민단체와 마찬가지로 매달 통장에서 1만원씩 빼가는 곳에 불과했다.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두어 달을 고민하다 매월 첫 번째 금요일 저녁 회원들이 모여 삼겹살을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동네파티’에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희망동네 회원들이 지방선거에 참여해볼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그 자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프리허그’와 ‘투표소 장애인 접근권 조사’였다(812호 바꿔! 지방자치 ‘조혜정 기자가 뛰어든 풀뿌리 시민운동’ 참조). 유권자 투표 독려운동을 회원이 직접 벌이기로 한 것이다. 난 ‘수영장 생리할인 조례 제정운동’을 제안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조례까지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구립시설에선 적용되고 있는 제도여서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시민단체 의정 평가가 공천에 영향 미쳐
희망동네는 ‘지방선거 이후’에도 중요하다. 새로 뽑힌 구청장과 구의원이 얼마나 제대로 일하는지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주민에게 필요한 걸 해달라고 효과적으로 요구해야 건강한 동작구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2007년부터 매년 구 예산이 결정되는 12월 한 달 동안 벌이는 ‘의정감시단’ 활동은 희망동네 활동의 백미다. 주부, 상인, 학생, 지역 활동가 등 희망동네 회원 20여 명이 돌아가며 구의회를 방청하면서 구의원들의 △출석·이석·결석 상황 △회의 참여 적극성 △지역 이해도 및 주민 의견 반영도 △질의 건수와 수준 △구정 감사 사안에 대한 지식 등 평가지표가 적힌 평가지에 점수를 적는다. 구의회가 열리기 전 동작구의 주요 장소에 의정감시단을 모집한다는 펼침막도 내걸기 때문에, 희망동네 회원이 아니더라도 의정감시에 관심이 있는 주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풀뿌리 단체는 대부분 상근 활동가도 적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의정감시 활동을 벌이는 곳은 흔치 않은데, 희망동네의 ‘집념’은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 ‘성과’를 내고 말았다. 계획대로 의정감시 평가서를 각 정당에 전달했는데, 이 평가에서 꼴찌를 한 현역 구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 구의원은 공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협위원장 사무실에 찾아가 거칠게 항의했지만, “희망동네 의정감시 평가서에서 꼴찌를 했는데 어떻게 공천을 주겠느냐”는 당협위원회 관계자의 반박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알고도 새로 뽑힌 구의원이 멋대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유호근 사무국장은 “희망동네처럼 풀뿌리 단체가 구정 내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면 지역 정치인도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민이 지역 정치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풀뿌리 단체로서도 예산 이해도가 높아지고, 관과 소통도 원활해져 활동 자체가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덤이다.
이렇게 주민이 모이면 지역을 바꾸는 큰 힘이 된다. 동네파티 때마다 모여앉아 하는 얘기가 동네 문제인데, 동네 정치에 관심이 안 생기고 배길까. 이젠 출근길에 지방선거 출마자가 나눠주는 명함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동작구가 ‘우리 동네’라는 생각도 조금씩 생긴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얼굴의 여드름을 보고 직접 아로마 비누를 만들어 보내주신 분까지 계실 만큼, 서로 안부를 묻고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이웃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지역엔 풀뿌리 단체가 없거나, 있더라도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망망대해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의미가 없진 않지만, 바다 색을 바꿀 순 없다”는 유 사무국장의 말마따나 일단은 모이는 게 힘이니, 마음 맞는 이웃과 스스로 모임을 조직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서로 아이의 책을 돌려보면서 부모도 친분을 쌓을 수 있고, 학교 운영위원회나 생협,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복지관 등 지역의 다양한 기구·기관을 활용해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나면 자연히 동네 문제가 화제가 되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논의하게 된다.
모임이 애초 의도와 다르게 ‘친목계’로 흘러간다면, 지방선거 참여를 독려하려고 시민단체 연대체인 ‘2010 유권자희망연대’가 진행하는 ‘커피파티’(용어설명 참조)처럼 대화 주제를 정해 만날 수도 있다. 기초의회 누리집엔 회의록과 내년도 예산서가 모두 공개되니, 이런 구체적인 자료와 차 한 잔을 놓고 구의원이 얼마나 잘하는지, 구청장은 얼마나 공약을 잘 지키고 있는지 토론하면 된다.
(하승우·유해정 지음, 북하우스 펴냄), (무브온 지음, 리북 펴냄) 같은 ‘정치 참여 가이드북’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의원·단체장에게 전자우편, 홈페이지 게시판, 전화 등으로 요구 사항 전달하기 △의회 방청하기 △언론 보도, 정치인 홈페이지, 풀뿌리 단체, 예산감시단체 등에서 정보 수집하기 △수집한 정보를 대화, 전자우편, 블로그 등으로 이웃과 공유하기 △언론사에 제보하기 등은 두 책이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참여 방법이다.
특히 는 지역 정치인의 활동과 관련해 “기본적인 정보를 구해 계속 의견을 내면 언젠가 한 번쯤 반응이 온다. 품을 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 상품평 올리듯이 한 번씩 글을 남기자. ‘I’ll be back’(다시 오겠습니다)이라는 마무리 멘트를 꼭 달아주고… 정치인들은 시민의 눈을 의식해야 막 나가지 않으니 정기적으로 한 번씩 쿡쿡 옆구리를 찔러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온 동네 주민이 ‘콘크리트·삽질 경제’에 시달려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면 (강수돌 지음, 산지니 펴냄)을 참조해볼 만하다.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인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와 주민들이 2005년부터 5년 동안 이 마을에 흉물스러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걸 막고,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과정이 상세히 담겨 있다. △개발사업의 실상과 정확한 정보 입수 △땅을 팔겠다는 ‘지주동의서’ 작성 전 지주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 △행정 공문으로 단체장 답변 받기 △주민들끼리 모든 정보 공유하고 연대하기 △서명운동, 토론회, 기자회견, 제보 등 언론을 활용해 여론 형성하기 등이 강 교수가 알려주는 ‘잘못된 개발사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풀뿌리 운동 매뉴얼’이다.
“정치인은 정기적으로 옆구리 찔러줘야”
동네 정치? 풀뿌리 자치?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마음을 먹는 거고, 더 중요한 건 그 마음을 행동에 옮기는 거다. 선거 때 하는 투표는 ‘끝’이 아니라 동네 일꾼이 제대로 일하게 만드는 ‘처음’이라는 인식, 그리고 나와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지방자치의 출발이다.
*용어설명
커피파티: 미국의 한인 2세 애너벨 박이 지난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이 궁지에 몰리는 걸 보면서 이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해보자고 자신의 네트워크 사이트 ‘페이스북’에 제안해 만들어진 온라인 풀뿌리 단체. 민주주의와 정치 의제를 자유롭게 토론하는 단체로, 지역별로 오프라인 모임을 열어 현재 미국 45개 주에 지역별 커피파티가 조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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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수 변호사는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이다. 10년 전만 해도 그는 참여연대 같은 중앙 단위의 큰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아이를 기르고 동네 풀뿌리 활동에 참여하면서 “내 삶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면, 기초자치단체가 중앙정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풀뿌리 전도사’가 됐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의원 등을 뽑아만 놓는다고 다가 아니다. 지역을 바꾸려면 지속적으로 이들을 감시해야 하고, 유권자도 조직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투표뿐만 아니라 선거로 뽑힌 대표를 평소 감시·견제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시민들 사이에 생기는 것 같다.
=이유가 있다. 우선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교육감, 교육의원 등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예산 낭비나 난개발 같은 주민 피해로 돌아온다. 주민이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대표자를 잘 감시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거 한 번 한다고 정치가 바뀌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권자도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려면 평소 유권자들이 조직돼 있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여러 곳에서 유권자 운동이 벌어지지만, 진짜 유권자 운동은 6월3일부터다. 그래야 다음 지방선거 때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구상 중인 ‘6월2일 이후’는 무엇인가.
=시민사회 쪽에선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정치인·정당에 맡겨둬선 안 되겠다. 상층 명망가 중심의 시민단체로도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커졌다. 야권 연대만 해도 정당은 안 바뀌고, (연대를 압박할) 시민단체는 힘이 없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나. 새로운 주체, 즉 유권자 조직이 확대·지속돼야만 지역을 바꿀 수 있다. 한편에선 이번처럼 풀뿌리 후보가 직접 출마하는 지역 정치운동을 확대해야 한다는 고민도 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지역 운동가들이 선거 뒤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논의할 계획이다.
-유권자 조직의 확대·지속이란 말이 좀 추상적인데.
=이번 선거에선 큰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투표 참여 권유나 ‘커피파티’ 같은 유권자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히 조직하다 보니 한계도 있었다. 지역·인터넷·세대 등 다양한 기반을 통해 사람들이 모여 지방정치를 감시하고, 사회와 정치를 바꾸기 위해 학습하는 조직이 활성화돼야 한다. 풀뿌리 후보를 뽑고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 주민이 직접 관여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건 기존 시민단체로는 안 된다. 유권자 참여를 중심에 둔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조직이 있어야 그에 동감하는 주민이 가입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감시·참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감시·견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무엇인가.
=단체장이나 의원 등이 주민 처지에서 일하는 건지, 자기 좋자고 하는 건지, 누구 쪽에서 일하는지를 봐야 한다. 예산이든 정치자금이든 돈을 어떻게 쓰는지, (정치자금이라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권이나 이해관계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현안이 있을 때 주민 의견을 얼마나 들으려 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이런 활동은 정보공개 청구라는 좋은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다. 감시하다 정 마음에 안 들 땐 대표자를 바꿀 수 있는 대안을 준비하고, 새로운 후보나 정책을 유권자 스스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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