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1일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벌써 30분이 다 돼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봄 같잖게 춥더니만, 오늘은 거짓말처럼 따뜻하다. 공원의 절반은 비둘기, 나머지 절반은 놀러나온 사람들이 차지했는데, 저 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명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2시30분께 유호근 사무국장과 함께 처음 공원 분수대 옆 광장에 섰을 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게 뭔가’ 호기심을 보였다. 한 커플은 “자기가 가서 해~”라며 서로 등을 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지나갔다. 하긴. ‘투표 참여를 약속하신다면~ Free Hug(프리허그)’라고 쓴 손팻말을 든 사람, 즉 내가 그 손팻말로 얼굴을 가린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나라도 그냥 지나쳤겠다.
손가락으로만 참여를 말한다면, 나는 위선자…나는 서울 동작구의 풀뿌리 시민단체인 ‘희망동작네트워크’(희망동네) 회원이다. 유 사무국장은 희망동네를 6년째 운영하고 있다. 희망동네와 ‘아름다운 가게 신대방점’, ‘아이들의 울타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결혼이민여성평등찾기’ 등 동작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 7곳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동작구 풀뿌리 유권자연대’(유권자연대)를 만들어 투표 독려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오늘은 희망동네가 주민들의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프리허그를 하기로 한 첫날이다. 테이프는 유 사무국장과 내가 끊기로 했지만, 그는 지방선거 투표를 꼭 해야 하는 이유를 적은 다른 손팻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프리허그를 하는 사람은 나 혼자다. 난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누군가 나를 주목하는 상황을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본 ‘인사동 투표녀’(3월20일 서울 인사동에서 투표 독려 프리허그를 한 김지숙씨에게 누리꾼이 붙인 별명) 같은 용기는 눈꼽만큼도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정치팀 소속의 ‘바꿔! 지방자치’ 시리즈 담당 기자가 아니었다면, 투표 참여를 권유하는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나서는 일 따위는 절대로,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쩌나. ‘바꿔! 지방자치’ 시리즈의 일관된 주제는 유권자의 참여였고, 그 기사를 쓴 사람은 바로 나. 손가락으로만 참여를 말한다면, 그런 나는 위선자….
모래 속에 머리만 처박으면 안심하는 타조처럼 눈이라도 가리면 창피함이 좀 가실 것 같다는 생각으로 쓴 선글라스 바깥으로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이러다 한 명도 못 만나면 어쩌지….’ 초조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얼굴을 가리도록 높이 들었던 손팻말이 가슴께로 내려왔다. 그래도 입술은 떨어지지가 않는다. 옆에 서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6월2일은 지방선거일입니다. 꼭 투표합시다!”라고 외치는 유 사무국장한테 미안해서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프리허그 하는 거예요?” 드디어!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네!”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러 나온,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다. “6월2일이 지방선거 하는 날이잖아요. 꼭 투표하시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복잡한 뉴런을 거쳐 나온 말은 이것뿐이었다. 유 사무국장이 거든다. “동작구 한 해 예산이 3천억원이나 되는데, 주민이 관심을 안 가지면 안 되잖아요? 제대로 쓸 사람을 뽑아야죠. 꼭 투표하러 가시고요, 프리허그도 하고 가세요~.” 아주머니도 쑥스러워하긴 마찬가지다. 추행이 취미거나 습관이 아니라면, 낯 모르는 이를 뜬금없이 끌어안는 일이 쉬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가 다시 말을 받았다. “투표하실 거죠?” “해야죠~.” “그럼 약속하시는 뜻으로 한번 안아주고 가세요.” 아주머니도 용기를 냈다. 어색하게 맞댄 어깨를 통해 묘한 든든함이 전해졌다. ‘이분은 투표하시겠지? 오늘 댁에 돌아가서, 내일 이웃을 만나 프리허그 한 얘길 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투표하러 가자고 하시겠지?’
처음이 무섭지, 그담부턴 별거 아니다. “지방선거 투표일이 한 달 남았습니다. 6월2일 꼭 투표하러 갑시다!” “주민이 투표해야 동네가 바뀝니다. 6월2일 투표합시다!”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등산은 투표하고 갑시다. 데이트도 투표하고 합시다!” 지나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맞춤형 구호’를 외치는 여유도 생겼다. 선글라스도 벗었다. 유 사무국장이 ‘거봐요, 해보니 재밌죠?’란 표정으로 뿌듯하게 키득거린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다가오신다. “나 한나라당 찍을 건데, 그래도 투표해도 돼?” 젊은이 둘이서 “투표합시다” 외치니, 특정 정당 지지를 호소하는 줄 아셨던 모양이다. “그럼요. 후보들이 얘기하는 공약 잘 보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 찍으시면 되죠.” 파르라니 가시를 세우지 않아 마음이 편해지셨는지, 아저씨가 시민단체와 정치에 관해 말 보따리를 푸신다. 15분이나 하고 싶은 얘길 쏟아낸 뒤 “투표하러 갈 거야” 하시며 프리허그를 했다.
그리고 3명과 더 체온을 나눴다. “지방선거가 뭐예요?”라고 묻는 초등학생 2명, 전속력으로 달려와 폭 안기더니 보물처럼 간직하던 솔방울을 건네주던 노란 점퍼의 3살짜리 꼬마…. 특히 호기심 가득한 초등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지방선거를 설명하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친구들이 학교에서 먹는 급식을 좋은 우리 농산물로 만들어 무료로 먹게 할지, 친구들이 동네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탈 수 있게 자전거 도로를 만들지 결정할 사람을 뽑는 것”이란 얘기에 아이들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가서 부모님께 투표하시라고 할 거예요?”라고 묻자 키 큰 친구가 “네!” 한다. 작은 친구도 질세라 “전 커서도 꼭 투표할 거예요!”라고 약속했다.
유권자 ‘무지’보다 큰 선관위의 ‘무심’선뜻 프리허그에 나서진 않아도, 우리가 들고 선 손팻말을 꼼꼼히 읽거나, 함께 온 사람들과 지방선거를 화제에 올리는 주민도 많았다. 특히 중학생 딸 2명과 함께 산책을 하던 한 부부는 “프리허그를 하네? 서울시장,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이런 사람들을 뽑는 게 지방선거거든. 투표하자고 사람들 안아주는 거야”라며 아이들에게 지방선거가 왜 중요한지, 동작구 상황이 어떤지를 한참 설명했다. 좀 거창하지만, 이런 게 살아 있는 민주주의 교육이 아닐까 싶었다.
좋은 관심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지방의원이고 구청장이고 다 도둑놈들이야”라는 중년의 주민도 있었다. 어쩌면 오늘 보라매공원에서 우리를 지나친 주민들 다수는 이렇게 정치를 혐오하는지 모른다. “6월2일이 지방선거였어요?”라거나 “주소지는 인천이고, 6월2일 중국에 출장을 가는데 투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주민도 있었다. 선거 일정이나 부재자 투표 방법을 모르는 유권자의 ‘무지함’보다, 4대강 반대 목소리를 막는 데는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정작 필요한 홍보는 부족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무심함’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 스쳤다.
2시간이 다 돼간다. 4시15분 분수에서 카라의 노래 가 갑자기 울려퍼지더니, 리듬에 맞춰 물줄기가 춤을 춘다. 이젠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만 접기로 했다. 입으론 “나만의 허니, 허니, 허니~ 돌아서야 하니, 하니, 하니~”를 따라 불렀지만, 아무리 크고 세련됐더라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한참 찾아가야 하는 공원보다 베트남 여행에서 본 호찌민시처럼 걷다가 잠시 쉴 수 있는 작고 아담한 공원이 동네마다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난 아니다!” 전동휠체어를 탄 김동수(43)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6월2일 영화초등학교와 영등포중학교 투표소에서 투표해야 하는 지체장애인은 족히 30도는 넘어 보이는 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지체장애인인 김 소장은 “난 그래도 모터가 힘이 좋고 기어 조정도 되는 휠체어라 나은 편이지만, 웬만한 전동휠체어로는 올라가다 넘어져 다칠 거예요”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소장과 함께 온 센터의 다른 활동가는 “전 안 갈게요. 보험 안 들었어요”라며 손을 내저었다.
동작구의 투표소는 모두 85개다. 동작구 풀뿌리 유권자연대는 장애인이 실제로 여기서 투표를 할 수 있는지 조사해 그 결과를 동작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전달하기로 했다. 아예 투표소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곳으로 바꾸든지, 문턱이나 계단이 문제라면 경사로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동작구에서 전동휠체어가 필요한 중증 지체장애인은 620명으로, 전체 유권자(32만5630명)의 0.2%다. 하지만 아무리 적은 수라도 이들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안 되지 않나.
오늘 희망동네에선 유 사무국장과 나, 그리고 최경희(45·대방동)씨가 참여했다. 최씨는 유치원과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을 기르는 전업주부인데, 지난해 희망동네 회원으로 가입했다. 희망동네는 구의회에서 예산을 작성하는 연말마다 의정감시 활동을 벌이는데, ‘동네정치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한 최씨의 눈에 이런 희망동네의 활동이 들어온 것이다. 투표소 조사에도 최씨는 기꺼이 나섰는데, 그가 맡은 역할은 사진 촬영과 조사표 기록이다. 오늘 오전엔 투표소가 설치될 흑석동 청호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조사했는데, “아파트까지 올라가는 길이 엄청나게 급경사인데다가 관리사무소 입구엔 계단까지 있어 휠체어로는 도저히 못가는 곳이에요. 장애인을 생각하지 않은 투표소가 너무 많아요”라며 안타까워했다.
투표소 5m 앞에서 멈춘 휠체어언덕길 초입에 있는 영화초등학교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정문에서 10m 떨어진 학교 건물 오른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팬 곳이 많아 울퉁불퉁한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네요”라는 김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8cm 높이 구두를 신은 내가 걷기에도 여간 위태로운 게 아니다. 건물 출입문 쪽 계단 옆에 난 또 다른 경사로는 그래도 잘 놓여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건물 안이다. 투표소인 소강당은 1층에 있지만 도중에 2단짜리 작은 계단이 버티고 있다. 김 소장의 휠체어는 투표소를 5m가량 남겨두고 멈춰야 했다. 소강당까지 마저 걸어가봤다. 출입구 미닫이문에 2cm쯤 되는 턱이 있다. 휠체어가 힘을 낸다면 넘을 수는 있겠지만, 휠체어 주인의 허리에 엄청난 충격을 줄 거다. 김 소장이 이곳에서 투표를 하려면, 최소한 이동식 경사로 2개를 설치해야 한다. 아무 경사로나 설치해선 곤란하다. 이동 경사로 길이가 최소한 계단이나 턱 높이의 5배는 넘어야 휠체어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80m쯤 되는 언덕길 끝의 영등포중학교 급식실도 마찬가지였다. 언덕길은 자동차를 타고 올라간다 하더라도, 대책 없이 버티고 있는 계단과 문턱을 넘으려면 ‘적절한 조처’가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김 소장은 나보다 더 많은 걸 보신 것 같다. “지체장애인도 투표하기 어렵지만,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은 더 힘들 수 있어요. 사실 장애엔 종류가 많잖아요. 거기에 따라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잘 교육받은 자원봉사자가 배치돼야 해요. 점자 공보물 같은 것도 필요하고요.”
유권자연대는 내가 참여한 4월29일을 포함해 4월19~30일 동작구 투표소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 두 학교처럼 경사로 등의 보완책이 필요한 투표소 19곳, 아예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투표소 13곳 등 전체 투표소의 40%가 장애인이 ‘투표하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유권자연대는 이 결과를 5월17일 동작구 선관위에 전달했다. 선관위는 “경사로가 필요한 곳은 설치하고, 그것이 어려운 곳은 임시로 투표장에 수동휠체어를 비치하고 도우미 등이 출입문에서 투표장까지 장애인을 업고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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