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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지방자치’

오바마보다 주민을 어렵게 생각하는 그들


주민투표 거쳐 미 최대 공원 ‘그레이트파크’ 일구는 어바인시…
주민의회 통한 자발적 정책 제안·토론·조정 진행

제798호
등록 : 2010-02-11 10:43 수정 : 2010-02-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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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방자치 현실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을까?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시는 10년간의 논쟁 끝에 주민투표를 벌여 해군기지를 미국 최대의 공원으로 바꿨다. 긴 시일이 걸렸지만, 주민이 자신의 생활 공간을 어떻게 가꿀 것이냐를 두고 끈질기게 합의를 이끌어낸 결과였다. 어바인시는 어떻게 이런 ‘비효율’을 감수하고 지방자치를 실천하고 있는지 둘러봤다. 이어 컬럼비아대에서 미국의 주민운동과 지방자치를 연구한 정보연 도봉시민회 대표가 뉴욕주 북부 로체스터시의 ‘시민 이니셔티브’ 사례를 소개한다. 편집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바인은 ‘명품 도시’다. 21만 명 남짓이 산다. 서울 용산구 규모다. 반년에 한 차례씩 안전 도시를 꼽는 미 연방수사국(FBI)은 어바인을 5년6개월째 맨 앞에 뒀다. 교육환경이 우수하다. ‘미국의 8학군’이라고들 한다. 경제잡지 <포천>이 선정한 100대 기업 가운데 30% 이상이 둥지를 틀고 있다. 브로드컴, TEVA 헬스시스템스, 기아자동차 미주 본사, 현대자동차 디자인센터….

한국계 시장·시의원 활동 중인 ‘명품 도시’

그레이트파크(왼쪽)는 어바인 시민들이 제안 단계에서부터 깊이 관여했다. 오른쪽은 그레이트 파크의 터가 된 옛 엘토로 해병공항기지의 전경.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군기지 축소정책의 일환으로 폐쇄됐다. 어바인시 홈페이지

시의회 의원 5명이 입법과 행정을 도맡는다. 그중 둘이 한인이다. 직선제 당선 시장이자 시의회 의장인 강석희 시장(민주당)과 최석호 시의원(공화당)이다. 시의회 정치에 입문한 지 다들 6년째다. 권력이 막강하면서도 그렇지 않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버락 오바마로부턴 자유로울지언정, 낱낱의 지역 주민에게 고삐가 잡혀 있다. 저마다 대학과 병역까지 마친 1960~70년대에 고국을 떠나 새 삶을 개척한 두 정치인은 “그것이 미국을 슈퍼파워로 만든 힘”이라고 말한다. “풀뿌리 시민들이 제 고장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갖고, 직접 지역사회를 바꿔가는 것”을 이른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정치들의 거대한 조합이 미국이다. 지난 1월18일 이들을 만났다. 지방자치에 대한 훈수를 듣기 위함이다. 비결을 듣자면 좀 허무해진다. “처음 지방자치로 시작되어 (미합중국이란) 유니온이 생겼다. 전통인 것이다.”(강석희 시장) 그리고 둘은 ‘그레이트파크’가 그 전통을 적통으로 잇고 있다는 듯 조성 과정을 세세히 들려줬다.


그레이트파크는 어바인시에서 조성 중인 미국 최대의 녹지 공원이다. 공항이 될 뻔했다. 주민들이 틀어막은 것이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0년을 훌쩍 넘는다. 클린턴 정부 시절 군 공항기지 축소 정책이 추진된다. 4700에이커(약 500만 평)에 이르는 어바인의 ‘엘토로’ 해병공항기지도 문을 닫기로 한다. 1993년이다. 활용 방안을 두고 조용하던 시가 분열하기 시작한다.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민간 공항을 건설하자는 쪽과 녹지 공원을 만들자는 쪽이 첨예하게 맞섰다. 1999년 기지는 폐쇄되고, 송사도 오간다.

결국 2002년 주민투표에 부쳐진다. 무엇보다 투표를 앞둔 캠페인 등에 시민이 앞장섰다. 시정부는 투표 과정에 개입할 수 없었다. 시 관계자는 “주민발의 과정이 그레이트파크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대목”이라고 말한다. 당초 주민투표에 부치자는 주민발의안에 17만5천 명이 서명했다. 등록 유권자의 15%를 채워야 주민발의가 가능하다. 이조차 전례가 많지 않다. ‘공항파’든 ‘공원파’든 주민의 80% 이상이 지역 일이므로 지역 주민의 직접 투표만이 해법이라고 동의한 셈이다.

국방부로부터 땅을 매입한 개발업체 르나는 전체 부지의 3분의 1(1347에이커)을 공원 조성용으로 시에 기증한다. 인프라 건설 비용으로 4억달러를 찬조한다. 대신 르나는 남은 부지를 쇼핑센터, 주택 등 상업 용도로 개발한다. 2006년 1월 마침내 첫 삽을 떴다. 지난해 말 1단계 공사가 완료돼 본새를 갖춰간다. 10~20년에 걸쳐 추가 공사를 이어갈 참이다. 완공 시기는 공항이 문을 닫은 때부터만 따져도 물경 30년이다. 논의·발의·결정·집행을 거쳐 하나의 ‘주민자치’가 결실을 맺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주민의 정치 참여 방식은 다양하고 무엇보다 간편하다. 어바인 주민의회는 매월 둘째·냇째 화요일에 열린다. ‘작은 정치’의 경연장이다. 누구든 참석해 3분 동안 민원은 물론 행정 제안도 제약 없이 쏟아낸다. 의회 안건에 대한 논쟁은 물론이다.

2007년께 어바인은 중국 상하이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는다. 이때 중국이 대만 도시와의 자매결연 중단을 요구한 사실이 알려졌다. 대만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300여 명이 시의회로 몰려와 100명가량이 3분 발언을 이어갔다. 결국 중국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 토론 끝에 주민투표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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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활기반이 하나의 정당 구실을 한다. ‘지방자치=주민자치=생활정치’란 등식을 이룬다. 한 명이 지역 내 노스파크를 ‘전몰 희생자 추모공원’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2003년부터 줄기찼다. 지척에 기왕의 추모 공원이 있었다. 그래도 해를 거듭하자 동조자는 늘었다. 의회는 지난해 ‘위령비 설치 지원’을 뼈대로 한 중재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쟁점이 첨예할수록 만장일치를 추구한다.

35년 된 낡은 도서관을 리모델링해달라는 요청이 1년간 계속됐다. 결국 지난 1월4일 새로 개장했다. 강 시장은 “시정을 하다 보면 주민들의 참여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다. 제 귀한 시간을 스스로 쪼개낸다. 그야말로 전통이며, 학습의 덕이다. 강 시장과 최 의원의 전자우편함에는 주민이 보낸 편지가 적지 않다. 초등학생들의 것도 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무더기로 날아오기도 한다. 쇼핑센터를 금연 구역으로 지정해달라는 전자우편도 그 가운데 하나다. 시는 일단 쇼핑센터가 자체적으로 규제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6개월을 지켜본 뒤 조례 제정 등의 고민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특이한 건, 이런 전자우편과 회신 내용을 시장은 물론 시의원 모두가 관례적으로 공유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도가 선이라 해서 모든 결과가 선일 수는 없다. 단점이 적지 않다. 보다시피 더디다. 재정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 그래서 주민자치는 때로 우아한 백조 같다. 더럽혀지기 쉽고 수면 아래 내야 할 ‘비용’도 만만찮다. 최 의원은 “우린 속이 터질 정도로 늦고 예산 낭비도 있다는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AT&T 등 통신사들이 셀타워(휴대전화용 안테나)를 세우겠다고 시에 인허가를 요청한다. 시내 터틀록 지역 일부 주민들이 반대해왔다. 미관상 좋지 않고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다. 주민의회에 수백 명이 몰려와 마이크를 잡았다. 가로등 상단부에 붙이는 손바닥만 한 안테나는 터틀록에만 설치되지 않고 있다. 8년째다.

최 의원은 “여러 사안에서 정치에 관심 갖는 소수가 이끌고, 다수는 침묵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사일런트 메이저리티(Silent majoriy·조용한 다수), 노이지 마이너리티(Noisy minority·목소리 높이는 소수)”라고 일렀다. 점점 정치 무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터틀록의 안테나는 전체 주민투표를 했다면 이미 통과됐을 것이다. 딜레마다. 강 시장은 “한국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맞다. 한국에선 여럿 복장이 터지고 말 일이다. 그런데도 이 도시에선 자치에 대한 기본 합의가 견고했다.

한국에서는 복장 터질 일도 “여기선 감수해야”

한국식과 미국식의 융화는 어떻냐고 물었다. 최 의원은 “(더딘 미국식이) 요즘 같은 시대에 더 점점 경쟁력이 줄어든다”면서도 “미국식 민주주의의 뿌리가 그렇고, 주민들은 (정치적 요구를) 제 권리로 알고 있고, 우리는 당연히 청취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고 말한다.

터틀록은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 전문직업인이 몰려 있는 부자 동네다. 지역 이기주의 혐의가 짙다. 그래도 해법은 이렇게 모색된다. 기존의 안테나보다 더 좋은 기술이 없는지 살피는 중이다. 그보다 근본적으로 새 마을을 조성하는 단계부터 통신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계획을 치밀하게 요구하도록 입법화할 예정이다.

강 시장은 “주민들이 시와 직접 상대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게 지방자치의 진정한 기본 골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요구도 추가된다. 어떤 안건이든 시의원은 기권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찬성 또는 반대를 해야 한다. 갈등이 심할수록 만장일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조정의 정치’를, 그러면서도 원칙에 따른 ‘책임 정치’를 함께 주문받는 셈이다.

6년째 어바인에서 거주하는 한인 김아무개씨는 “한국은 이렇게 더디면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고 하지만, 여긴 근본 틀에 대한 회의는 없다. 다만 결점을 조금씩 보완하려고 하는 스타일이다”라고 말한다.

어바인시 강석희(왼쪽) 시장은 지난해 한인 최초의 직선제 시장으로 당선돼 화제가 됐다. 2년 임기를 채우고 올 11월 재선에 도전할 예정인데 자신감이 넘쳤다. 최석호(오른쪽) 시의원은 1998년 어바인 교육위원으로 당선돼 미국 정계에 입문한 뒤, 2004년 강석희 시장과 함께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최근에는 주 하원의원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한겨레21> 임인택 기자

재정 없이 정책 집행은 불가능하다. 주민 요구를 수용할 수도 없다. 미국의 여러 도시가 경제위기 이후 더욱 재정 위기로 휘청인다. 기업도시로도 유명한 어바인도 예외는 아니다. 세수의 으뜸을 차지하던 판매세가 지난해 5억7천만달러에서 4억6천만달러로 줄었다. 18% 감소다.

강 시장은 ‘CEO 어라운드 테이블’을 이번 2월부터 3개월에 한 차례씩 열기로 했다. 어바인 역사상 처음으로 마련한 관·경 정례모임이다.

최 의원은 “그렇다고 기업들에 땅값을 깎아주거나 하진 않는다”며 “규모와 상관없이 사업 허가세는 일괄적으로 50달러만 받는 게 (다른 도시에 비해) 인센티브라면 인센티브”라고 말한다. 어바인의 생존력은 그보다 보수적인 예산 정책에 있다. 5년 단위로 시정을 예측하고 재정 전략을 짠다. “최악의 상황으로 전망해 착오를 줄이고, 경기가 좋을 때 적립금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고 강 시장은 말한다.

그레이트파크는 뉴욕 센트럴파크의 갑절 규모다. 캘리포니아의 새 이정표를 이미 낙점한 분위기다. 어바인시는 “이미 수만 명의 방문객이 문화예술 행사에 참여해 지역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홍보한다. 주민자치는 시작과 합의는 어려울지언정, 실현된 이상 어느 정책보다 강력하고 안정되게 추진되며, 지역 주민의 진정한 자산으로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이 유권자를 대단히 두려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또한 이들에겐 자산이 될 것이다. 강 시장은 올 11월 시장 재선에, 최 의원은 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실제 이날 시청사 의사당에서 행사를 준비 중이던 여성 자원봉사자 돈은 “강 시장은 대단히 친화적이고 좋은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호화 청사·예산 낭비와 대조적

의사당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최 시의원의 말이 거듭 귓가를 맴돌았다. “한국은 요즘 얼마나 주민 의견을 수용하는지 모르겠지만, 행정부가 계획을 세우고 불도저처럼 나가버리니까 빨리 되는 거 아닌가요.” 한국의 요즘 소식 하나만 들려주자면 이렇다. 지난해 11월 경기 성남시가 3200억원짜리 새 청사를 열었다. 시장 전용 엘리베이터 등으로 초호화판 논란이 그야말로 들끓었다. 다음달엔 2010년 예산을 전해보다 6천억원 넘게 줄였다. 시립보육시설·공영주차장 건립 계획 등이 중단됐다. 2010년 벽두, 시의회는 광주·하남과의 ‘행정구역 통합안’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시가 통합 선언한 지 반년도 채 안 돼서다.

일련의 과정에서 성남 시민이 ‘관여’한 흔적이 없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청사 건립과 행정구역 통합안을 지지했는지 알 수 없다. 반대 목소리가 요동을 쳤다. 통합안은 주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소리쳤다. 그래서? 달라진 게 없다. 대꾸도 없다. 1995년 지방선거 전면 실시는, 지자체가 중앙정부로부터 얻은 자유를 지역 주민의 구속으로 환치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국의 지방정부는 그 모두를 불필요한 ‘고삐’로 여기는 모양이다.

어바인(미국)=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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