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14일 오후 1시30분. 일본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가량 떨어진 지바현 지바시의회 방청석엔 회의를 보러 온 지바 시민 4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이날 시의회 안건은 △지바시 신기본계획 △상가 진흥 대책과 주차장 확보 방안 △와카바구 보건센터 이용 대책 등이었다. 20대부터 백발 노인까지, 방청객들은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준비해온 메모지에 회의 내용을 꼼꼼히 적거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뜨거운 쟁점을 다루지 않는 한 국회 본회의장에서조차 방청객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눈높이로 보자면 낯선 풍경이었다.
시장 당선 뒤 대형 건설 계획 백지화지바시 와카바구 주민 이노우에 노부코(72)는 이날 동네 주민 10여 명과 함께 회의를 방청했다. 이노우에는 이날이 두 번째 방청이었지만, 이미 10여 차례 회의를 참관했다는 이도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보건센터 이용 문제가 시의회 안건으로 올라왔으니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주차장 같은 편의시설이 어디에 얼마나 생기는지도 쇼핑을 해야 하는 주민들에겐 중요한 정보고요.” 이노우에의 설명에 연방 고개를 끄덕이던 이모토 미쓰코(63)도 거들고 나섰다. “모노레일 와카바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불편했는데,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시의원에게 계속 요구도 했어요. 결국 엘리베이터가 생겼죠. 이렇게 지방자치는 자기 생활에 밀접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들의 말처럼 지바시는 주민의 참여로 최근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2009년 6월 치러진 지바시장 보궐선거에서 정치 경력이라곤 시의원 2년이 고작인 31살의 구마가이 도시히토를 선택한 것이다.
인구 95만 명의 지바시는 지난 50여 년 동안 자민당·공명당의 지지를 받은 시장을 뽑았고, 전임 시장이 그만두면 부시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게 ‘상식’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47개 광역단체와 1771개 기초단체로 이뤄진 일본에서 단체장은 대부분 무소속이되 특정 정당 1~3곳의 지지를 받는 이들이다. 지바시는 그중에서도 보수 정당의 지지를 등에 업은 단체장이 ‘장기 집권’을 해온 대표적인 도시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인 민주당·사민당의 공동 지지를 받은 구마가이 시장이 53%에 이르는 득표율을 기록해 하야시 고지로 전 부시장(득표율 36%)을 가볍게 누르고 ‘일본 최연소 시장’이자 ‘지바시 최초의 민간 출신 시장’이 된 것이다.
구마가이 시장의 이력을 보면 이 ‘사건’은 더욱 이채를 띤다. 우연히 시의회에 들어 시의원들이 회의 도중 조는 모습을 보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2007년 직장을 그만두고 시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됐다. 1조엔(약 13조원)이 넘는 부채로 최악의 재정상태에 맞닥뜨리고도 불필요한 대규모 개발사업에 매달리는 지바시와 시의회를 상대로 개혁운동을 펼치던 2009년 4월 쓰루오카 게이치 시장이 뇌물 수수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의 당선에는 풀뿌리 현안에 대한 집요한 천착과 광범위한 시민 참여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 50년 넘게 선거로 정권교체를 이뤄본 경험이 없는 일본에서 집권 자민당은 늙고 부패한 이미지로 염증을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근 1년 동안 벌어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자민당 지지를 받지 않은 30대 시장은 구마가이 시장을 포함해 10명이 넘는다. 특히 구마가이 시장은 처음으로 지바시 부채 규모를 시민에게 공개해 전임 시장과 자민당의 실정을 폭로했다. 경쟁자인 하야시 전 부시장은 63살에 어마어마한 시 부채를 방치한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또 구마가이는 불요불급한 대형 개발사업비 200억엔 삭감 등 재정 건전화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구마가이 시장에겐 100명이 넘는 선거 자원봉사자가 몰려들었고, 이들은 점심값 한 푼도 받지 않고 모금운동으로 선거를 치렀다. 이런 사정이 알려지면서 구마가이는 유권자들에게 더욱 신뢰를 심어줬다.
당선되자마자 구마가이 시장은 모노레일 연장 사업과 지하도로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고, 스포츠 공원 신설 사업 규모를 축소하는 등 전임 시장이 추진했던 대규모 개발사업을 철회해 402억엔(약 5226억원)의 재정을 아꼈다. 시민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잊지 않은 결과다. 그는 “‘정치 프로’에게 시를 맡긴 결과가 최악의 재정 상태라는 걸 시민이 알게 됐습니다. 제가 최고여서가 아니라 시민이 자신과 같은 경험,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 시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선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54명 의원 중 시민네트워크 소속 6명일본에서 ‘정치 프로’나 ‘토호’가 아닌 시민이 지방자치에 참여하는 건 구마가이 시장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지바시의회엔 1991년부터 ‘시민 네트워크 지바’(이하 시민네트워크) 소속의 주부 출신 시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주부들을 중심으로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생협 운동이 그 뿌리다. 생협이 1980년대 말을 지나면서 각 지역의 환경·교육·복지 등 생활 전반의 문제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서 태동한 ‘지역 정당’(공식 정당으로 등록됐지만 활동은 특정 지방에서만 하는 일본의 정당 형태)이 바로 시민네트워크다. ‘자치하는 시민이 생활과 정치를 바꾼다’는 문제의식이 평범한 주부를 지방자치의 공간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현재 지바시의회 54석 가운데 시민네트워크 소속 의원은 모두 6명이다. 전체 정당 분포는 △자민당 21석 △민주당 9석 △공명당 8석 △공산당 6석 △새정치 지바(지역 정당) 3명 △무소속 2명으로, 의석수로는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꾸준히 의회에 진출해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 배출량 감소를 염두에 둔 ‘청소처리기본계획’의 수정이다. 2006년까지만 해도 지바시는 가정에서 배출하는 소각용 쓰레기를 일주일에 세 번씩 수집해 시내 소각장 3곳에서 처리해왔다. 그런데 소각장 1곳이 너무 낡아 보수가 필요했고, 이에 드는 비용만 200억엔에 이르렀다. 시민네트워크가 나섰다. “쓰레기를 줄이면 다이옥신 발생량도 줄고, 예산도 절감할 수 있다”고 쓰루오카 당시 시장을 압박하고, 다른 당 소속 의원들을 설득했다. 5년 만에 ‘청소처리기본계획’을 수정해 소각장 1곳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쓰레기 수집 횟수를 주 2회로 줄여 가정에서도 쓰레기를 줄이도록 유도했다.
2004년엔 지바시에 살고 있던 한 자민당 소속 지바현 의원이 오랫동안 주민세를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쓰루오카 당시 시장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탓에 시에서도 세금을 징수하려 들지 않았다. 시민네트워크는 사무감사를 요구하는 주민청원 운동을 벌여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당시 지바시 인구의 50분의 1인 1만2천 명 이상만 서명하면 주민청원이 가능했는데, 필요한 인원보다 8천여 명이 더 청원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시민의 엄청난 분노에 여당 의원들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주민청원은 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결국 사무감사가 실시됐다.
이들은 부적절한 의회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비공개로 진행되던 시의회 상임위 회의를 공개로 바꿨다. 쌈짓돈이나 마찬가지였던 정무조사비(월급 77만엔과는 별도로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돈) 월 30만엔을 어디에 썼는지 모두 영수증을 제출하도록 했다. 의회가 열리는 날마다 지급하던 교통비 8천엔은 아예 없애버렸다. 모두 ‘시민의 눈’으로 접근했기에 고칠 수 있던 관행이었다.
시민네트워크의 하세가와 히로미 의원은 “소수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고 단체장 견제는 잘 되지도 않지만, 이런 활동이 쌓이다 보니 시민에게 인정도 받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결국 지바시의 변화를 이끌어낸 힘은 자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한 지바 시민이었다는 얘기다.
예산안 심사에서 35억원 건져내한국에서도 주민의 힘으로 지역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없지 않다. 경기 과천시의원 7명 가운데 5명은 한나라당이고 1명은 진보신당, 그리고 1명은 무소속이다. 여인국 과천시장도 한나라당 소속으로, 시의회 다수당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소속 서형원 의원은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주민과 함께하는 예산심의다. 서 의원과 황순식 진보신당 의원은 당선되던 2006년 말부터 시청이 넘긴 예산안을 ‘주민참여 예산 워크숍’에서 공개하고, 이 가운데 삭감하거나 증액할 항목을 주민과 함께 논의하고 있다. 2010년도 예산안을 검토하는 워크숍은 2009년 12월2일 저녁 8시 과천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50여 명이 모였다. 시청이 수십만원짜리 상품을 내걸고 주민을 동원하는 행사에도 100명이 채 모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적은 수가 아니다. 주민들은 △경주마 구입·관리 예산 3억6천만원 △‘한국방송 일본’과 ‘아리랑TV’에 내보낼 과천시 광고비 1억원 △시정자문 원고료 5천만원 등 시민 복지 향상과 무관한 예산 항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전액 삭감’을 요구했다. 이렇게 주민 의견을 모아 삭감한 예산은 무려 35억원. 과천시의 2010년 예산 2077억원에 비하면 2%가 채 안 되는 액수지만, 과천시 전체 초등학교에 유기농 쌀을 6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돈이다. 과천시는 서 의원의 요구에 따라 최종 결정된 예산서는 물론, 2009년부턴 심의 전 예산안까지 시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서 의원이 낸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8년엔 ‘친환경 상품 구매 촉진 조례’를 만들어 시청이나 공기업이 물품을 사들일 때 친환경 상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했다. 과천시 내 초등학교는 모두 시 예산을 받아 무상 급식을 해왔는데, 서 의원은 식자재 중 친환경 농산물 구입 비율, 위생상태 등을 학교가 시에 보고하도록 했다. 같은 예산을 받고도 학교마다 급식의 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이 확인하게 되자, ‘나쁜 급식’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런 힘 역시 시민한테서 나온다. 서 의원은 정확히는 무소속이 아니라 ‘시민 후보’였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 의원이 활동하던 ‘과천 지방자치개혁연대’ 회원 400여 명은 “함께 살아온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후보로 내자”고 뜻을 모았고 서 의원이 ‘당첨’됐다. 과천 지방자치개혁연대는 학교 운영위원회, 생협, 공부방, 주민신문 등 지역 활동을 통해 말 그대로 ‘풀뿌리 자치’를 실천하던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시민단체라면 으레 떠올리는 ‘상근 활동가’도 없다. 과천엔 이런 풀뿌리 네트워크가 발달해 있다. 지난해 촛불 정국 최고의 ‘히트 상품’인 ‘우리 집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합니다’ 펼침막도 과천 주민들이 운영하는 공부방 ‘맑은네 방과후 학교’ 운영위원 6명이 맥주를 한잔씩 하며 “매일 광화문에 나갈 수도 없고, 뭐 방법 없을까?”를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다.
서 의원은 “지방의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우리는 권한이 없다’는 건데, 권한이 없는 이유는 주민을 참여시키지 않아서다. 시정 질문을 하더라도 무조건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주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거나 주민 모임에서 수렴된 요구를 내놓으면 다수당도, 지방정부도 무조건 거부하지는 못한다”며 “지방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치에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 자치 역량을 함께 길러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인·건설업자가 장악한 의회물론 과천시는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전국을 다 뒤져도 서 의원처럼 ‘시민 추천’을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까지 된 이는 찾기 어렵다. 광역자치단체 16곳, 기초자치단체 230곳의 단체장 가운데 ‘시민 추천’은커녕 진보정당 소속조차 단 한 명도 없다. 2006년 지방선거일을 기준으로, 광역의원 733명 가운데 진보정당 소속은 15명, 기초의원 2888명 가운데 진보정당 소속은 66명이다. 비율로는 2%에 불과하다. 거대 정당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구조인 셈이다.
직업이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주민’이 아닌 ‘토호’나 ‘특정 정당과 관련성이 깊은 인사’들이 장악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거대 정당이 지방정치까지 독식함으로써 주민의 요구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히 정치인·공무원 출신이 광역단체장의 75%, 기초단체장의 73.5%에 이른다. 거대 정당이 자기 당 소속 정치인이나 당과 가까운 관료 등에게 단체장 자리를 나눠줬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의회를 살펴봐도 정치인·공무원은 광역의원의 28.2%, 기초의원의 14.4%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 많은 직업이 농·축산업(광역 6.4%, 기초 10.5%)과 상업(광역 6.1%, 기초 10.5%), 건설업(광역 3.7%, 기초 5.2%) 종사자다. 흔히 ‘토호’나 ‘지역 유지’로 불리는 이들이다. 반면 회사원 출신은 광역의원 2.7%, 기초의원 3.6%에 그쳤다.
서울 관악구의회는 구의원 22명 가운데 한나라당이 13명, 민주당이 8명, 민주노동당이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지역은 1991년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을 구의원으로 당선시킨 이후 계속해서 지역운동가 출신의 구의원을 배출했다. 관악주민연대를 비롯한 풀뿌리 지역운동의 역사도 깊다. 하지만 시의회에서 이동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22분의 1만큼도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관악구청은 2007년 10월 새 청사 개청식에 1억원의 예산을 들였다. 그러잖아도 혈세를 880억원이나 투입해 호화 청사를 짓는다는 비판이 거센 터였다. 행사 진행과 축하 공연 등을 맡을 연예인 초청비용, 무대 설치비, 이벤트 업체에 지급할 행사 대행비 등이 주요한 지출 항목이었다. 이 의원은 시의회에서 “호화 청사 지었다고 주민들 시선도 따가운데, 왜 쓸데없는 데 1억원씩이나 들이냐”고 반대했지만, 다른 의원들은 “구를 상징하는 청사가 새로 문을 여는 날인데 왜 발목을 잡느냐”고 되레 이 의원을 몰아세웠다. 결국 예산은 구청이 요구한대로 집행됐고, 이 의원은 행사 당일 개청식이 열리는 구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 자신의 주장을 알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구청이 일괄 구독해 동·통·반장에게 돌리는 일간지를 뜻하는 ‘계도지’ 예산도 매년 5~6억원씩 편성되지만 한푼도 깎지 못했다. 계도지로 들어오는 신문은 가끔씩 구청장·구의원의 ‘홍보성 기사’를 실어주기 때문에, 다른 구의원들이 예산 유지를 강력히 원했던 탓이다.
이 의원은 “다른 당 의원들은 나를 으레 ‘반대하는 사람’으로만 여긴다. 의회 내 다수의 힘을 누를 만한 주민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탓”이라고 했다. 1997년 진보정당이 등장한 뒤 지역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던 주민들 대신 정당이 지방선거를 주도하게 되면서 주민 요구를 수렴하는 일에 소홀해졌고 점점 주민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풀뿌리 자치 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인 하승수 변호사는 “1991년 부활한 지방자치제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중앙의 지역주의 정당과 지역의 기득권·토호 세력이 공천과 표를 주고받으며 공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민이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자는 애초 취지가 훼손됐다”며 “현재의 지방자치 현실은 낙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하 변호사는 또 “2010년 지방선거에선 영호남에서 한나라당·민주당 1당 지배 체제가 깨지고, 수도권도 중앙정치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 정치를 강조하고 주민 참여를 활성화할 세력이 누구인지 (유권자들이) 잘 판단해야 한다”며 “그래야 지역정치가 발전하고 주민 생활도 나아질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 100여 명 출마 계획이런 문제의식으로 그동안 서울 관악·마포·도봉·노원, 경기 군포, 강원 속초, 제주 등 전국에서 주민운동을 펼쳐온 이들은 2010년 지방선거에 직접 출마할 계획을 세웠다. 주민을 ‘지방정치의 주인’ 자리로 되돌려놓고, 지방자치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기초의원 선거를 중심으로 후보 100여 명을 내겠다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이들은 싱크탱크 역할을 할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를 2010년 1월 출범시켜 환경·복지·재개발 등 생활정치 의제로 공통 공약을 만들고, 주민 자치 역량을 강화할 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다.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를 기획한 하승창 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줘야 한다”며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했거나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이 지방의회에 진출해 토호와 정당이 왜곡한 지역정치를 진짜 풀뿌리 자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지방정치의 주체가 변하지 않으면, 지방정치의 내용도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진보개혁 성향 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2010년 6월2일 지방선거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연합정치’를 실현하겠다며 결성한 ‘희망과 대안’도 지방정치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희망과 대안’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개혁 세력의 정치 연합이 필요하다고 보고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 등이 중앙당 차원에서 ‘연합의 결단’을 내리길 제안한 바 있다.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 쪽에도 연합 논의를 제안할 계획이다.
지방자치의 주체를 지역 주민으로 바꾸겠다는 실험은 성공할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주민이 움직이지 않으면 동네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이제 6개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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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굴지의 통신회사인 NTT커뮤니케이션스에서 일하던 직장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정치에 관심은 많았지만, 그때만 해도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의회 방청을 하러 갔다가 의원들이 회의 내내 조는 모습을 목격했다. 시정 질문이라면서 시의원들이 준비해온 원고를 줄줄이 읽기만 하고, 시장·부시장은 대답도 하지 않는 풍경이 이상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 현실이 이것밖에 안 되나,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주당이 운영하는 정치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죠. 시의회는 어떤 곳이고, 시의원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선거는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내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무렵 시의원 선거가 있었고, 민주당 후보 공모에 지원해 후보가 되고, 당선도 됐습니다. 처음엔 고민이 많았어요. 직장일이 재미없었던 것도 아니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는 것도 그렇고, 떨어지면 실업자가 되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시의회 모습을 떠올리면 이렇게 불만스러우니 직접 바로잡아야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들어질 테니 젊을 때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범한 소시민’이던 구마가이가 정치를 시작한 계기는 이렇게 소박했다.
시의원이 되어 시정을 들여다보니 상황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1조엔(약 13조원)이 넘는 부채를 지고 있으면서도 쓰루오카 게이치 당시 시장은 도로 확장 등 불필요한 대형 개발사업을 추진했고, 공동 여당인 자민당·공명당 의원들은 다수의 힘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지바시 내 탁아소와 초·중학교 건물의 내진 강도가 낮아 위험하다는 조사 결과는 10년 넘게 은폐된 채 아무런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예산 개혁과 의회 개혁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2009년 4월 쓰루오카 시장이 뇌물 수수 혐의로 사임했다. 그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그는 시장선거에서 △불요불급한 대형 개발사업비 200억엔 삭감 △철저한 행·재정 개혁으로 임기 4년 동안 재정 240억엔 확보 △삭감한 예산으로 시 부채 탕감과 초등학생 입원비 무료화와 보육소 증설 추진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경쟁자인 하야시 고지로 전 부시장은 “오랜 행정 경험이 없으면 정책을 실현할 수 없다”고 그를 공격했다. 하지만 지바 시민은 구마가이의 손을 들어줬다.
구마가이 시장은 당선 직후부터 공약 실행에 들어갔다. 우선 200억엔(약 2600억원) 규모의 모노레일 연장 사업 계획을 철회했다. 전철 쓰다누마역 구간을 통과하는 지하도로 건설 계획 백지화로 50억엔(약 650억원), 스포츠 공원 신설 규모 축소로 20억엔(약 260억원)도 아꼈다. 이렇게 시급하지 않은 대규모 개발사업 철회로 모두 402억엔(약 5226억원)의 재정 낭비를 막았다. 시장 스스로는 119만엔(약 1547만원)이던 월급을 20% 삭감했다. “스스로 희생해 시 재정을 재건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납세자가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시민과 소통하는 방식도 전임 시장들과는 다르다. 시의원 때 느꼈던 문제의식을 거울 삼아 구마가이 시장은 시정 질문에 직접 답변한다. 매달 한두 차례씩 구별·연령별·주제별 주민간담회를 열어 시민이 꿈꾸는 지바시의 미래를 듣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틈이 나면 개인 블로그에 직접 글을 올려 시정과 관련한 소식이나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도 한다. 정보 공유와 시민 참여가 지방자치의 핵심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시정 정보를 제대로 알려야 시민이 정책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선거 때 올바른 정치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고도성장을 하던 때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해요.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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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토호 중심으로 이뤄지던 일본 지방자치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도입된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1955년 이후 중앙은 물론 지방 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한 자민당은 고도 경제 성장을 추진했고, 지방자치단체장들은 경쟁적으로 기업과 공장을 유치했다. 결과는 미나마타병·이타이이타이병 같은 공해병과 심각한 환경오염이었다. 그러자 사회당과 공산당은 자민당이 친기업 정책으로 심각한 공해 문제를 낳았다며 환경과 생활, 복지를 지방정치의 핵심 의제로 내걸며 변화를 시도했다. 결과는 60년대 중반 도쿄·오사카·요코하마 등 대도시 자치단체장 선거에서의 잇딴 승리였다. 이런 자치단체를 일본에선 ‘혁신 자치체’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선거에 후보를 내거나, 당선된 자치단체장과 호흡을 맞춰 주민 복지 향상과 지방자치 확대 방안을 고민한 게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이하 자치노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무원 노조에 해당된다. 자치노조는 1974년 지방 정책과 재정 문제 등을 연구하기 위해 ‘지방자치총합연구소’를 출범시켰다. 1994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연구소는 현재 56곳에 지역 연구소를 두고 있다. 지방행정·재정 정책, 마을 만들기 사업 등 자치 분야에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싱크탱크다.
스가와라 도시오 연구원은 “혁신 자치체들은 자민당이 주도하는 중앙정부를 지방정부가 포위하는 구상을 했다”며 “이를 ‘인민전쟁’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스가와라 연구원은 “그렇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배경은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정치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주민의 마음을 잘 읽었기 때문”이라며 “이 과정에서 공산·사회당과 함께 자치노조가 중심이 돼 적극적으로 주민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신 자치체들은 1970년대 중반 갑작스레 몰락한다. 예기치 못한 석유 위기로 세입이 크게 줄어, 복지·환경 분야에서 늘어난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조도 후원금을 모아 주거나, 조합원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것 말고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생활 의제’와 ‘주민 참여’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활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환경·복지 분야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주부들이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 ‘가나가와 네트워크’ 등 ‘지역 정당’을 만들거나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해 지방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999년엔 도쿄도 구니다치시에서 도쿄도 최초의 여성시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스가와라 연구원은 “민주당이 반세기 만에 중앙에서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었던 건 지역정당을 거울 삼아 그동안 지방에서 환경·복지·교육 등 생활 의제를 꾸준히 고민해 주민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며 “주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지방자치는 중앙 권력의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바(일본)=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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