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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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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제, 무엇에 쓰는 물건이던고


잘 활용하면 ‘지방자치의 꽃’이지만 현실화 사례는 드물어…
주민 스스로 힘을 길러야 공백을 메울 수 있어
등록 2010-01-15 10:58 수정 2020-05-03 04:25

일본 가와사키시엔 ‘꿈의 공원’이라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18살 이하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곳은 ‘꿈의 공원’이란 이름답게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책임 아래 할 수 있다. 놀이 방법을 개발해 친구들과 놀 수도 있고, 운동을 하거나 목청껏 노래를 해도 된다. ‘어린이 회의’를 꾸려 자신들이 바라는 아동·청소년 정책을 시에 요구할 수도 있다.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어린이들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공부도 한다. 권리를 침해당한 어린이들은 전문가에게 상담도 받을 수 있다.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활동 거점’으로서 어린이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곳은 시민단체가 가와사키시에 요구해 2003년 7월 문을 열었다. 앞서 가와사키시는 아동권리조례를 제정했고, 이 조례가 제대로 이행되는 곳이 필요하다는 시민의 요구에 ‘꿈의 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서관이 부족했던 서울 도봉구에선 2004년부터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도서관이 4곳이나 생겼고, 구청도 어린이 도서관을 짓기 시작했다. 1월5일 도봉구의 첫 마을 도서관인 ‘초록마을 도서관’에서 도봉 1동 주민과 어린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

도서관이 부족했던 서울 도봉구에선 2004년부터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도서관이 4곳이나 생겼고, 구청도 어린이 도서관을 짓기 시작했다. 1월5일 도봉구의 첫 마을 도서관인 ‘초록마을 도서관’에서 도봉 1동 주민과 어린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

가와사키 ‘꿈의 공원’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와사키시 아동권리조례는 일본 최초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권리를 지방자치단체가 명문화한 사례다. 1998년 9월, ‘인간도시 가와사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인권 향상에 관심을 쏟았던 다카하시 기요시 당시 시장은 아동권리조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집단 따돌림과 등교 거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다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교육을 이야기하는 모임’ ‘어린이회의’ ‘시민살롱’ 등 가와사키시의 인권·시민단체, 학자, 교육 전문가, 시 공무원 등이 조례 내용을 논의할 ‘아동권리조례 검토연락회의’와 ‘아동권리조례 조사연구위원회’에 함께 참여했다. 조례의 직접적 대상인 어린이들도 ‘어린이위원회’를 만들어 의견을 냈다. 이들은 2년 가까이 200차례 넘게 공개회의를 열었고, 수시로 홍보자료를 배포하거나 행사를 열어 시민에게 조례 내용을 알리고 의견을 구했다. 논의 기간에 가와사키시에 접수된 시민 의견은 1200여 건이나 됐다.

그 결과 조례엔 아동과 청소년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권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권리 △자신을 지키고 보호받을 권리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도움받을 권리 △스스로 결정할 권리 △참여할 권리 △놀 권리 등이 담겼다. 이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권리’는 논의에 참여한 어린이가 낸 의견이다.

또한 시는 시민 10여 명이 참여하는 아동권리위원회를 설치해 시 정부가 아동 정책을 세울 때 위원회의 의견을 듣도록 했다. 시 행정과 학교 운영에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가와사키시 어린이 회의’와 ‘학교교육 추진회의’도 설치했다. 권리를 침해당한 어린이의 상담을 받고 개선책을 내놓을 방안으로 별도의 ‘인권 옴부즈퍼슨 조례’도 제정키로 했다. 이런 내용의 아동인권조례는 마침내 2000년 12월21일 가와사키 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고, 2001년 4월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조례 제정에 참여했던 가와사키 시민단체들은 “조례만 만들어놓으면 안 된다. 조례가 제대로 구현되는 구체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시와 시민단체의 조율 끝에 2003년 7월 “가와사키시 아동권리조례를 실현하는 장소”이자 “어린이의 자유로운 발상으로 놀고, 배우고, 만들기를 지속할 수 있는 시설”로 구현된 곳이 ‘꿈의 공원’이다. 시는 지역 교육·인권 단체인 ‘가와사키 생애학습재단’과 ‘프리스페이스 집합소’에 관리·운영을 맡겼다. 시민단체들이 아동권리조례라는 제도를 갖추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지방정부를 압박해 실질적으로 그 제도가 이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개장 초기 3만 명이던 이용객은 점점 늘어나 지난해엔 6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

“만들어달라느니 차라리 만들겠다”

가와사키시 아동권리조례와 꿈의 공원은 시민과 지방정부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시민 참여를 통해 제도를 현실화한 모범적인 사례다.

일본에서는 행정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주민들이 먼저 해결책을 찾은 뒤 행정부가 따라오도록 길을 열어주는 경우도 있다. 워커스 컬렉티브가 운영하는 복지형 대안주거가 바로 그것이다. 워커스 컬렉티브(Workers’ Collective)란 공동 출자·공동 운영·공동 책임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생협 운동에서 출발했다. 도시락 배달, 장애인 이동 서비스, 가사 도우미 등 워커스 컬렉티브의 사업 형태는 무궁무진한데, 이 가운데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노숙인 등에게 제공하는 복지형 대안주거 모델은 행정과 협력이 꼭 필요한 동시에 행정이 참조할 만한 사례로 꼽힌다. 일본엔 이들을 위한 요양원 같은 공공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요코하마시만 해도 입소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수만 명이다. 이에 워커스 컬렉티브는 주민의 자치 역량 강화 방안을 모색하는 싱크탱크 ‘참가형 시스템 연구소’, 지역 정당인 ‘요코하마 네트워크’ 등과 함께 빈집을 사들여 복지형 대안주거를 마련했다. 일본은 심각한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가 줄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전국 760만 채에 이른다. 대부분 요코하마 같은 도쿄 주변 지역에 몰려 있다. 워커스 컬렉티브는 행정부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빈집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치료를 받거나 요양을 받을 수 있는 복지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일본 가와사키시 어린이 놀이터인 ‘꿈의 공원’ 홍보 전단지. 놀이, 독서, 회의, 상담 등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꿈의 공원’은 2000년 제정된 가와사키시 아동권리조례를 실현하기 위한 곳으로, 시민사회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일본 가와사키시 어린이 놀이터인 ‘꿈의 공원’ 홍보 전단지. 놀이, 독서, 회의, 상담 등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꿈의 공원’은 2000년 제정된 가와사키시 아동권리조례를 실현하기 위한 곳으로, 시민사회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시민단체가 대안적인 복지 주거공간을 운영하고, 자치단체가 운영비를 지원하는 모델은 이미 1990년대 중반 일본 동부 도야마현에서 시작됐다. 시민단체나 중앙정부 모두에게 익숙한 모델이긴 하지만, 일단 주택 매입 비용이 만만치 않고 시설 개조나 운영을 둘러싼 규제의 벽도 높다. 이 때문에 워커스 컬렉티브는 3년 가까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자신들이 운영해온 대안주거 모델을 소개하고, 비용 지원과 규제 완화를 요구해왔다. 이런 끈질긴 노력에 최근엔 행정부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13일 워커스 컬렉티브 등이 요코하마시에서 연 복지형 대안주거 관련 포럼엔 후생노동성·요코하마시·도시개발공사 관계자가 참석했다. 후생노동성과 요코하마시는 PC방을 전전하던 노숙자들이 개조된 빈집에서 공동 생활을 하면서 안정감을 찾았다는 사례 발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도시개발공사는 빈집을 사들여 리모델링을 한 뒤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이나 영세민주택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놨다. 일본 희망제작소의 강내영 연구원은 “일본 시민사회는 ‘정부에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내용과 모델을 만들겠다, 보고 좋으면 행정부가 따라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시민단체들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안 주거모델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도 신뢰를 가졌을 것”이라며 “제도적으로 우리와 큰 차이 없는 일본의 지방자치가 잘되는 이유는 스스로 대안을 찾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컨테이너 박스가 ‘마을 도서관’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는 사례가 없지는 않다. 서울 도봉구엔 도서관이 시립 도봉도서관과 구립 도봉문화정보센터밖에 없었다. 인구 38만 명인 도봉구 주민의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004년 늦여름, 지역운동단체인 도봉시민회에서 독서모임과 아이들을 위한 품앗이 수업을 하던 주부 15명이 뜻을 모았다. 방범초소 명목으로 도봉 1동 한가운데를 차지한 컨테이너 박스를 모임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그곳은 한 달에 한 번 동네 주민들이 방범 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할 때 말고는 버려진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일은 술술 풀렸다. 어렵잖게 주민들의 동의를 얻었고, 때마침 도봉초등학교가 도서관 리모델링 공사를 하려고 버린 책 1500권도 기증받았다. 컨테이너 박스가 ‘마을 도서관’이 된 것이다. 그렇게 ‘초록마을 도서관’이 탄생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15명이던 회원이 점점 늘었다. 드나드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도서관을 운영하는 이들도 “더 잘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2006년 3월, 이들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으로 나온 무용학원 자리를 얻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 보증금을 해결했다. 초록마을 도서관은 96㎡(29평)으로 덩치를 키웠고, 장서도 8천여권으로 늘어났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책만 읽는 게 아니다.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저소득층·한부모 가정 어린이들에게 책을 배달해주기도 한다. 주부들끼리는 요리, 비폭력 대화, 애니어그램 등 각자 가진 재능과 특기를 살려 지식 나눔을 한다. 도봉 1동의 사랑방이 된 것이다.

초록마을 도서관의 성공에 힘입어 도봉구엔 작은 마을도서관이 3곳이나 더 생겨났다. 이런 주민들의 열성을 구청이 외면하긴 어려웠다. 도봉구청은 2008년 4월 창4동에 어린이도서관(도봉 어린이 문화센터)을 개관했고, 쌍문동 ‘둘리 테마존’에도 도서관을 짓고 있다. 또한 최선길 구청장은 “작은 도서관과 어린이 도서관 건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보연 도봉시민회 공동대표는 “초록마을 도서관은 너무도 부족한 도봉구 문화시설을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상징적인 사례”라며 “이런 흐름이 갈수록 커지니 지역문화 활성화에 큰 관심이 없던 구청도 주민의 요구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지방자치단체의 현실은 앞서 든 사례들처럼 훌륭하지가 않다. 특히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꼽히는 제도가 마련돼 있어도, 조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핵심적 내용이 빠져버려 허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애초 취지과 달리 조례가 부실해지는 이유는, 단체장은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생색내기’에만 몰두하고, 시민단체도 일단 제도부터 만드는 데 급급한 탓이다.

‘주민 참여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참여예산제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제도는 2003년 광주 북구가 도입한 뒤 현재 40여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하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제란 말 그대로 지방정부가 예산안을 짤 때 예산참여시민위원회 같은 주민 참여 기구를 꾸려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자체들은 모두 조례로 이 제도를 명문화했지만 현재까지 성과는 미미하다. 대부분의 지역이 행정자치부가 2006년 지침으로 제시한 ‘표준조례안’을 따라 주민 참여 기구를 ‘두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아니라 ‘둘 수 있다’는 선택 사항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주민참여예산제를 시행할지 말지를 어디까지나 자치단체장의 재량에 맡겨뒀기 때문에 조례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자치단체가 어떤 정책이나 개발계획 등을 세우고 집행할 때 주민위원회 등을 구성해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는 ‘주민참여기본조례’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2004년 충북 청주시에서 제정된 뒤 경기 안산, 대전, 제주 등 일부 지자체가 도입했지만 제대로 시행되는 곳은 드물다. 가령 주민이 요구하면 지자체가 추진하는 정책을 토론에 부칠 수 있게 한 정책토론청구제는 대부분 조례에서 “시민 200명 이상이 청원하면 주요한 정책을 토론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규정돼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이 토론 대상에 해당하며, 청원이 이뤄졌을 때 어떤 절차를 밟아 어떻게 토론회를 열지 등 실제로 정책 토론을 열 수 있는 장치가 조례엔 없는 것이다.

지난해 8월26일 제주 제주시 노형동 한라중학교에서 시민들이 김태환 도지사 소환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2007년 도입된 주민소환제가 정착하려면 주민소환제가 서민의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해 8월26일 제주 제주시 노형동 한라중학교에서 시민들이 김태환 도지사 소환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2007년 도입된 주민소환제가 정착하려면 주민소환제가 서민의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물론 조례라는 제도적 장치가 없어도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예산 편성이나 정책 결정에 주민 참여를 보장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 부천시는 2003년까지만 해도 예산안을 편성하기 전에 그해 예산 운용 방향과 관련한 정보를 미리 공개하고, 공청회를 열어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대규모 개발사업 같은 주요 정책을 실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초 부천시는 원미산에 놀이공원, 눈썰매장, 야외 수영장 등 3만㎡(약 9천 평) 부지에 위락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지역 시민단체들은 자연림이 시 전체 면적의 2%에 불과하고, 1인당 녹지 면적이 경기도에서 가장 낮은 부천에서 그나마 허파 구실을 하는 원미산을 훼손해선 안 된다고 반대했다. 3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부천시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용해 개발계획을 백지화했다.

주민 참여, 단체장이 누구냐에 따라

이런 지방정부와 지역 주민의 소통은 원혜영 당시 시장(민주당)이 2004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직하고, 후임으로 홍건표 시장(한나라당)이 당선되면서 단절되고 말았다. 김기현 부천 YMCA 사무총장은 “민관 거버넌스(협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장과 그렇지 않은 시장의 차이는 컸다”고 말했다. 물론 단체장이 누가 되든 그의 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칠 만큼 시민사회가 촘촘하게 조직되지 않았던 탓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부천시는 주민 참여 기구에 들어갈 시민대표를 단체장이 원하는 대로 위촉하도록 한 내용의 주민참여예산조례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시민단체들은 “‘시민 지향’이라는 형식만 가져왔을 뿐, 이대로는 단체장과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만 예산안 편성에 관여하게 돼 주민참여 기구가 아니라 관변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며 일제히 반대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의회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조례안은 부결됐다.

제주도와 일본 조시시의 주민소환 명암

부천YMCA와 부천시민연합, 부천여성회 등 지역의 8개 시민단체는 이번 지방선거가 제대로 된 주민참여예산 조례를 만들 기회라고 본다. 이들은 ‘부천시민연대회의’를 꾸려 부천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제대로 된 주민참여예산 조례 제정 서약을 받을 계획이다. 조례가 상징적인 제도로만 남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구상 중이다. 구나 동별로 주민들이 상시적으로 예산 문제를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고, 공무원·시민단체·전문가를 반드시 포함시킨다는 내용을 조례에 담겠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연대회의에 참여하는 각 시민단체 회원 한사람 한사람이 이 조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홍보·교육 활동을 강화하고, 조례가 시행됐을 때 회원들이 참여기구에 주체적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복안도 마련했다. 이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주민 참여의 취지를 살린 제도가 마련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은 시 예산안에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할 권리와 책임을 얻게 된다. 주민자치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풀뿌리 자치연구소 ‘이음’의 김현 연구위원은 “조례 자체가 주민의 권리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시민사회가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했으면 그 제도가 잘 운영되도록 개입하고 모니터링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제주도와 3월 일본 지바현 조시시에서 벌어진 도지사와 시장 주민소환 시도는 제도에 대한 주민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지 비교해볼 만한 사례다. 김태환 도지사는 강정리에 해군기지를 유치해 주민소환청구를 당했고, 오카노 도시아키 시장은 적자에 시달리는 시립종합병원을 휴원했다가 같은 처지에 놓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김 도지사 소환투표는 투표율이 11%에 그쳐 개표조차 하지 않은 채 무효로 처리됐다.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은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해야 개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환이 확정되려면 투표자의 과반이 소환에 찬성해야 한다. 반면 오카노 시장 소환투표의 투표율은 56%를 넘었다. 소환 찬성표는 62%나 됐다. 두 사람의 소환 운동을 주도한 ‘김태환 주민소환운동본부’와 ‘조시시정을 바꾸려는 시민모임’은 모두 집회를 열고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단체장들도 똑같이 투표 불참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의 운명은 정반대로 결론이 났을까?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은 “우리나라 주민소환제는 2007년에야 도입됐기 때문에 아직 주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전히 ‘우리가 뽑은 사람을 어떻게 끌어내리나. 잘못했으면 다음 선거에서 심판하면 된다’는 온정주의도 깊다. 소환이 무산된 건 김 지사 쪽의 투표 방해가 거셌기 때문이지만, 일차적으론 아직 ‘소환제도=유권자의 권리’라는 인식이 충분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정확히 60년 앞서 주민소환제를 도입한 일본은 이미 주민들의 머릿속에 ‘주민 뜻을 거스르면 단체장 옷도 벗길 수 있다’는 생각이 깊이 각인된 반면, 우리에겐 이런 인식이 확산될 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수많은 거점을 만들어내자

결국 지방자치 발전의 핵심은 주민들의 자치 역량 강화다. 주민이 각 지역 상황에 맞게 대안을 만들고, 지방정부가 한눈 팔지 못하도록 매섭게 감시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단체장의 소속 정당에 따라 지방의회의 여야가 갈리고 다수 여당이 지배하는 지방의회는 단체장이 주민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더라도 이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일본 ‘참가형 시스템 연구소’ 하야시다 아키코 사무장의 충고는 기억할 만하다.

“자치는 시민 스스로 힘을 기르고, 돈·능력·지혜를 모아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행정과 연계해야 하는 부분도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어떻게 하면 지역을 발전시킬지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주민들이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고 실험해야 한다. 생협이나 싱크탱크, 시민단체들은 이들이 모일 거점을 만들고, 참여모델이 될 만한 사업을 끊임없이 내놔야 한다. 그래야 행정부도 자극을 받고, 지방자치가 발전한다.”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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