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은 ‘풀’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기득권 정당이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서도 ‘풀뿌리 후보’의 명맥이 끊기기는커녕 조금씩이나마 성숙하고 있는 걸 보면, 시인의 예지는 옳았던 게 아닐까.
2002년 대거 입성, 2006년은 시련기
1991년 지방선거는 YMCA, 경실련, YWCA,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중앙의 유력한 시민단체들이 직접 뛰어든 선거였다. 지방자치가 40년 만에 부활한 그해 시민사회엔 민주주의가 확대되려면 정치의 기초 단위인 지역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들은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연대회의)를 만들어 선거에 뛰어들었다. 환경 분야 전문가인 김정욱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이정자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총무(창조한국당 공동대표), 이덕승 서울 YMCA시민중계실장(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 등 13명이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영희 전 장관도 당시 연대회의 상임운영위원장으로, 출마자 13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시민사회의 의욕은 대단했지만, 조직도 없고 유권자들의 지방자치 인식도 낮은 탓에 당선자는 내지 못했다. 연대회의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강대인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은 “그래도 ‘가지마다 새 잎을’이라는 슬로건으로 분권·자치·참여가 무엇인지 알린 의미 있는 선거였다”고 회고했다.
이와 별도로 경기 고양·안양·부천시, 서울 관악구, 대전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노동 운동 출신 인사들이 기초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 등이다. 이들의 당선은 이후 해당 지역에서 지역 운동이 뿌리내리는 밑거름이 된다.
풀뿌리 후보가 다시 주목을 받은 건 2002년 지방선거였다. 환경운동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후보를 내면서 ‘녹색 후보’ ‘여성 후보’ ‘농민 후보’ ‘노동자 후보’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 중 30여 명이 당선됐다.
2006년 지방선거는 시련기였다. 2004년 총선연대의 낙선·낙천 운동이 불법 논란을 겪으면서 시민사회의 정치 개입을 곱지 않게 보는 이들이 늘어났다. 또한 그전까진 모두가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기초의원 선거에 정당공천제가 도입되면서 시민단체나 주민후보가 움직일 공간이 더욱 줄었다. 그 결과 ‘한국의 녹색당’을 내건 시민사회의 초록정치연대는 20명을 내보낸 기초의원 선거에서 2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이후 초록정치연대도 해산했다. 당시 초록정치연대 간사로 경기 과천시에서 당선된 서형원 시의원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의 에너지를 이끌어내겠다는 노력이 정당공천제,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 논란 등에 부딪히면서 좌절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386세대의 ‘하방’ 성공할까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는 풀뿌리 후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방’이다. 학생·노동·환경 운동을 경험한 386세대가 고향으로 돌아가 10~20년 동안 지역 운동을 펼친 끝에 지역 정치를 바꾸자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연대모임인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풀넷·2010net.tistory.com)도 중앙 단위 시민단체가 아닌, 개별 지역과 후보의 연대체다.
이들의 당선 가능성을 쉽사리 점치긴 어렵다. 그러나 지역 운동가들이 깨달음을 얻는 사이, 유권자라고 다른 세월을 보냈을까. 풀이 바람보다 먼저 웃는 날을 내다본 시인의 예지가 허황되진 않을 터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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