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딸이 행복한 학교를 위해”
류정이(46)씨는 6월2일 경기 안산시 가선거구(사1·2·3동, 본오3동)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좀 극성맞은, 류씨 표현대로는 “치마로 운동장을 쓸고 다니는 아줌마”이긴 했다. 그래도 선거에 나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7년 전 결혼해 안산에서 처음 신접살림을 차릴 때만 해도 류씨는 “살림이나 잘하고 애나 잘 키워야지” 생각한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안산은 못 살 동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고교 비평준화의 여파가 초등학교에까지 몰아쳐 3학년부터 입시공부를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 사는 친구들을 봐도 초등학교 3학년은 영어 말고는 별나게 공부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딸이 다니는 학교에 항의를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즈음 “안산은 못 살 동네”인 이유도 눈에 들어왔다. 교통도 불편하고, 치안도 불안하고, 유흥업소 종사자도 너무 많고…. 이사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큰딸이 막무가내로 울어젖혔다. 친한 친구가 있고 정이 많이 든 동네를 떠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져 줘야만 했다. 류씨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럼 안산을 살고 싶은 동네로 바꿔보자.”
학교 운영위원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이웃들과 ‘안산지역 고교 평준화를 위한 학부모 모임’을 만들었다. ‘고교 평준화를 위한 안산시민연대’에도 참여했다. 안산시교육청·경기도교육청을 쫓아다니며 평준화 제도를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교육청은 서로 책임을 떠밀거나 “안산에서 그런 평준화하자는 사람은 아줌마뿐”이라고 타박했다. “시의원 데리고 와서 얘기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정작 안산시의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줌마’가 넘기엔 벽이 너무 높았고, 화가 났다.
교육에 관심이 깊어질수록 화를 돋우는 일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각 학교에 지급하는 학습준비물 예산은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3인 지금까지 10년 동안 1인당 1만원으로 제자리였다. 연말만 되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는 데 예산을 들이부으면서, 아이들한테는 왜 그렇게 인색하기만 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턱없이 비싼 교복을 공동구매하겠다고 나섰을 땐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며 교장이 가로막았다.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3년 동안 끈질기게 교장을 설득해 올해 드디어 보통 가격보다 40% 낮은 가격에 교복을 공동구매할 수 있게 됐지만, 학생·학부모가 아무리 요구해도 교장 한 사람을 이기기 어려운 구조가 답답했다. 그를 지켜본 주변에서 “‘아줌마’로 혼자 고생하는 것보다 ‘시의원’이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내가 안 나서면 누가 하겠어?” 고민은 길지 않았다.
2. “안전한 어린이집을 위해”민주노동당 광주 광산구 라선거구(월곡1동·운남동) 구의원 후보인 김선미(36)씨의 출마 계기도 아이를 키우다 부딪힌 벽이었다. 2004년 태어난 큰딸은 아토피가 심했다. 어린이집을 물색할 때 급식과 생활환경에 특별한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김씨의 눈에 들어오는 시설이 없었다. 초등학교도 아닌 어린이집에서 영어·과학 같은 수업을 하는 것도 싫었다. “현실에 없으면 대안을 만들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웃들과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꾸렸다. 협동조합은 규모가 커져 지금은 두 곳에서 4살 미만 영아와 4~7살 어린이를 나눠 받고 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어린이집을 공동육아 조합처럼 아이들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먹으며 마음껏 놀 수 있게 운영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때 광산구에서 민주노동당 구의원 4명이 당선된 뒤, 이들의 의정활동을 돕는 ‘광산구위원회 의정지원국장’을 맡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이상한 데’ 쓰이는 예산이 많았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는 안전성이 가장 중요한데, 모래가 위험하다며 더 위험한 고무매트로 바닥을 덮어버렸다. 어린이도서관은 규모보다 접근성, 즉 학교나 학원을 오가는 길에 언제든 들를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중요한데, 구청은 ‘크게 짓기’에만 관심을 뒀다.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실용적으로 쓰일 예산이 허투루 쓰이는 게 안타까웠다. 그런 시각으로 동네를 볼 수 있는 건 여성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부터 결심하지 않으면 다른 여성들도 정치에 진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서울 노원구 마선거구(상계2·3·4·5동)엔 어느 정당 소속도 아닌 풀뿌리 구의원 후보가 있다. 이 동네에서 10년 가까이 지역운동을 해온 서진아(46) 전 마들주민회 대표다. 처음 마들주민회와 인연을 맺은 2002년엔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할 마음뿐이었다. 마들주민회를 드나들며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원구의회 감시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동네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러면서 주민의 요구가 구청·구의회에서 제대로 수용되지 않는 이유 하나를 발견했다. “동네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여성이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남성이 주도해요. 가령 노원구의회 22명 가운데 여성은 비례대표 2명밖에 없어요. 각기 다른 당이라도 여성이 의회에 많이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말이죠.”
‘떨치고 일어선’ 또 다른 이유는 주민 뜻을 제대로 전달할 통로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2008년 구의회가 급작스럽게 의정비를 인상하자, 서씨는 주민들과 함께 서울시에 의정비 인상 관련 주민감사를 청구했다. 그러자 그동안 예산 감시 등 주민 활동에 비교적 호의적이던 구의원들도 “뭐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느냐”며 등을 돌렸다. 안타까웠다. 사전에 구의원이 주민과 소통하는 과정이 있었더라면 그 속에서 반대도 하고 대안도 낼 수 있었을 텐데, ‘사후약방문’식 대응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거구마다 여성 1명 이상’ 선거법 개정해도…
류정이·김선미·서진아씨가 들려준 얘기처럼 여성은 지방자치의 핵심이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뿐 아니라, 육아·교육·복지 같은 생활 의제를 다루는 지역정치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지방자치가 발달한 것도 생협을 중심으로 한 주부들의 참여 덕분이었다(792호 표지이야기 참조). 하지만 우리나라 지방자치에서 활약하는 여성 정치인은 드물다. 여성 광역단체장은 단 한 명도 없고, 기초단체장도 4명(김영순 서울 송파구청장, 박승숙 인천 중구청장,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 이청 전남 장성군수)에 불과하다. 여성 광역의원은 89명(12.1%), 여성 기초의원은 2778명(15.7%)인데, 그나마도 공직선거법에 따라 절반을 여성 후보로 공천해야 하는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선출된 여성 지방의원 비율은 5% 미만으로 뚝 떨어진다.
왜 그럴까? 조직동원력·자금력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세다. 동네에서 목소리깨나 높인다는 사람이 누군지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자영업자나 공무원 출신, 관변단체 임원 등 지역에서 ‘유지’로 행세하는 이는 대체로 경제력이 있는 남성들인데, 이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면서 끈끈한 유대를 유지한다. 누군가 선거에 나설 경우 인적·물적 지원이 얼마든지 가능한 관계다. 반면 여성은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런 차이는 여성에게 공천을 당선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정당의 공천제도와 경선은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여성에겐 엄청난 장벽이다. 당원들의 의사로 결정되는 경선은 조직동원력에 좌우되는데,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성 중심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선거 때마다 정당이 내놓는 얘기가 “공천할 만한 여성이 없다” “여성 후보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평소 여성 정치인을 키우려는 노력조차 안 하고, 때 되면 구색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의 지적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국회는 정당이 광역·기초 의원을 공천할 때 국회의원 선거구마다 여성을 반드시 1명 이상 포함시키고 이를 위반하면 해당 지역 후보 등록을 무효화하도록 지난 2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개정 선거법에 따라 여성 지방의원 비율이 20~25% 안팎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정당들도 저마다 여성 공천을 확대하겠다며 갖은 약속을 꺼내놨다. 한나라당은 서울 3곳(동작구·송파구·강남구), 부산·경기 각 2곳, 다른 광역시·도 각 1곳 등의 기초단체장 후보에 여성을 전략공천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공천 심사 때 여성에게 가산점 20%를 주고, 수도권 기초단체 3곳에 여성을 전략공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전체 후보자의 30%를 여성으로 공천한다.
하지만 말과 행동은 다르다.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회는 4월14일 이은경 변호사와 박인숙 울산의대 교수, 이재순 전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장을 각각 강남·송파·동작구청장 후보로 영입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천을 확정하는 서울시당 공천심사위원회는 4월22일 현재 심사 절차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공심위원장과 부위원장인 이종구(강남갑)·유일호(송파을) 의원이 이들의 ‘경쟁력’을 문제 삼아 중앙당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탓이다. 다른 지역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구에 여성을 전략공천할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민주당 상황은 더 갑갑하다. 234개 기초단체 가운데 민주당이 공천한 여성 후보는 인천 부평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는 홍미영 전 의원이 유일하다. 여성 전략공천을 어디에 할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한 여성 예비후보들은 지난 3월28일 당사에서 농성까지 벌였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이번엔 한나라당을 이길 후보를 내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 공천을 주저하고 있다.
생활정치 정착, 또 하나의 상식을 위해보다 못한 여성단체들은 4월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각 당에 기초단체장 20%, 선출직(비례대표를 제외한 지역구 지방의원과 단체장) 30%를 여성 몫으로 공천하라고 촉구했다. 여성의 정치 진출 활성화를 위한 여성계 모임인 ‘2010 지방선거 남녀동수 범여성연대’는 이날 “실질적으로 공천 권한을 행사하는 당협위원장들로 인해 중앙당 차원의 여성 공천 확대 약속이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며 “각 지역 당협위원장이 여성할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지 모니터링해 그 결과를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총선 출마 가능성이 높은 당협위원장이 실행한 여성 공천 결과를 유권자에게 알려 다음 총선의 ‘선택 기준’으로 삼도록 하겠다는 압박인 셈이다.
정당문화와 정치제도, 여성에 대한 인식이 한꺼번에 바뀌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상상’으로 여겨지던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는 어느새 ‘상식’ 이 됐다. 지역정치를 실질적인 생활정치의 장으로 만드는 것도 상식이 될 수 있다. 그건 유권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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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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