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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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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건강한 ‘지역주의’



중앙정당과 ‘따로 또 같이’ 가면서 지역 문제를 이슈화하는 ‘지역정당’들…
한국 정당법은 지역정당 출현 자체를 막아
등록 2010-06-04 07:34 수정 2020-05-02 19:26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정당 ‘가나가와 네트워크’ 소속 전·현직 지방의원들이 지역 현안인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정당 ‘가나가와 네트워크’ 소속 전·현직 지방의원들이 지역 현안인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최근 일본 정치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지역정당’(792호 표지이야기 ‘생활인이 정치인’ 참조)이다. 하시모토 도오루 오사카부 지사가 ‘오사카 유신회’라는 지역정당을 만들어 지난 5월23일 시의원 보궐 선거에서 압승하는 등 성공적으로 세몰이를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에 성공한 민주당 중의원 출신의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 역시 ‘감세일본’이라는 신당을 만들어 기존 지방의원들을 규합하고 있다.

오사카·나고야 시장의 특별한 점

일본에서 지역정당은 사전적 의미로 ‘지역적인 주장을 근간으로 하며 생활협동조합과 노동조합 등 지역 생활단체의 활동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 많으나, 엄밀하게 규정하자면 정당이 아닌 정치단체’다. 일본에는 우리와 같은 ‘정당법’이 없다. 그 대신 ‘정당 조성법’ ‘정치자금 규정법’ ‘공직선거법’ 등에 관련 규정이 있는데, 현역 의원이 5명 이상이거나 선거에서 유효득표율 2% 이상을 획득한 정치단체를 정당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기존 정당 체제에 편입하지 못한 이런 지역정당이 일본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은 기존 제도나 정치가 각 ‘지역’의 이해와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과제 해결에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하시모토 지사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만 보더라도 ‘원(One) 오사카’(하나의 오사카)라는 모토를 내세워 오사카·사카이 시 등 11개 시를 특별구로 통·폐합해 이 지역을 성장시키고, 행정도 효율화하겠다는 목표를 강조한다. 가와무라 나고야 시장의 감세일본은 세금을 많이 낸다고 여기는 주민을 겨냥해 항구적으로 시민세를 10% 깎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역정당이다. 주장의 옳고그름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기존 전국정당이 수용하지 못한 지역주민의 요구를 이들이 정확히 반영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지역정당의 본격적인 확산을 알리는 신호탄은 1984년 7월 결성된 ‘가나가와 네트워크’였다. 가나가와 네트워크의 활동은 이미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다. 생협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들의 활동은 ‘대리인 운동’(지역 주민이 이웃을 대리해 정치를 한다는 뜻)이라 불리며 시민사회와 정치를 묶는 하나의 모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역정치의 관심을 주민의 생활과 지역사회로 돌리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운동은 계속적으로 확대돼 현재는 전국에 12개 지역에서 지역별 네트워크가 활동하고 있다.

정당서 독립하거나 소비자운동서 생겨나거나

특히 자유민주당과 사회당의 양대 정당으로 고착화된 ‘55년 체제’가 1994년 붕괴한 뒤 지역정당 운동은 더욱 확대됐다. 중앙정치나 중앙정당이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각 지역의 정치 세력이 기성 정당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가진 시민들이 네트워크 운동을 참고로 다양한 그룹과 정치단체를 만드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 가운데서도 1993년 5월 시즈오카시 의회 일부 의원들의 시도가 눈에 띈다. 이들은 지방자치단체 개혁에 뜻을 둔 지방의원 모임인 ‘전국혁신의원회의’와 대리인 운동, ‘환경문제 지방의원 연맹’ 등을 설득해 ‘지방의원 정책연구회’(LOPAS·Local Party Study)를 결성했다. 지방의원들이 모임을 만들어 지역정당의 가능성과 지방주권, 지역정책 등을 연구한 것이다.

농민들이 농산물 수입 자유화에 반대해 전국을 12개 블록으로 나눠 농민연합을 출범시키고, 1995년 참의원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아쉽게도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가나가와 네트워크처럼 소비자운동이나 시민운동을 모체로 한 네트워크운동이 이 시기 매우 활성화돼 지방의회 등에 대거 진입했다. ‘녹색의 미래’라는 당명의 일본 녹색당은 기존 정당과 달리 본부와 지부의 관계가 독립적이고 대등해 네트워크형 정당으로 분류된다. 현재 17개의 지역정당이 ‘녹색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하시모토 오사카부 지사가 만든 오사카 유신회나 가와무라 나고야 시장이 만든 감세일본과 같이 국회의원이나 단체장이 만든 지역정당이 특이한 점은 이들이 중앙정당과 ‘따로 또 같이’ 간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속한 중앙정당을 탈당해 새 정당을 만든 게 아니다. 중앙정치는 자신이 속한 중앙정당에 지향점을 두되, 지역정치에선 그 지역의 담론이나 그에 맞는 자신의 정책은 지역정당을 통해 펼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소 복잡하지만, 지역정치에서는 기존 중앙정당에 대한 소속감과 관계없이 자신의 담론에 동의하는 사람은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사카 유신회에는 하시모토 지사의 자민당 의원뿐만 아니라 민주당 소속 의원들도 참여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엔 단체장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의회 권력마저 장악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발목이 잡혀 지역 담론보다 중앙 담론에 집중하는 현실에서, 중앙정치와 지역정치를 구분하고 지역 이슈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처방은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북풍·노풍에 날아가버린 지역 이슈

지방자치 발전과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선 지역정당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일본의 학자나 정치인도 공감하는 편이다. 한국도 비슷하다. 하지만 한국에선 정당법이 지역정당 출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정당법상 정당은 △서울에 중앙당 사무소를 두고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가져야 하며 △각 시·도당은 당해 시·도당의 관할구역 안에 주소를 둔 1천 명 이상의 당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의 지역정치는 중앙정치에 묶여 있는데다 지방분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지방자치의 성숙도가 낮아, 지역정당이 출현한다 해도 곧바로 제 역할을 해내리라는 기대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번 6·2 지방선거 양상을 보더라도 지역 이슈는 북풍, 노풍 등 온갖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없고, 중앙 이슈의 편가르기에 줄서기만 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갈수록 다양해지는 지역 과제를 해결하고, 나날이 성장하는 시민의 정치의식을 받아 안으려면 ‘거버넌스(민관 협치) 실현의 장’으로서 지역정당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즉 지방의회가 지방정부를 제대로 견제·견인하지 못하고 중앙정치의 시녀 역할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타파하려면, 지역주민이 지역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넓혀 지방의회 기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주민이 지역사회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야 할 시점이다.

강내영 일본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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