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부터 제57조까지. 법안의 문장은 건조하다. 성숙한, 어떤 사람들은 건조한 문장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서로의 존재를 느슨하게 감각한다. 때로 염려한다.
성소수자 부모 위니는 제3조 1항 1호를 두고 생각한다. 23개 차별 금지 사유(정체성)가 빼곡하다. 마침내 법이 내 아이의 존재를 불러줄지 몰라.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놓친 또 다른 ‘복잡한 정체성’이 있다면?
농인의 비장애인 자녀이자 여성인,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이길보라는 제3조 1항 6호(복합차별 조항) 앞에서 생각한다. ‘이유’ 없이 당연했던 차별 앞에 이유를 물을 수 있는 힘이 될지 몰라. 암 경험자 이정훈은 제41조 1항(제3자 진정권)을 보고 생각한다. ‘이유’를 짐작하고도 침묵했던 내 친구들한테 싸울 힘이 될지도 몰라. 그 싸움이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이란 난민 친구를 위해 목소리 냈던 열입곱 살 지민은 제35조(교육 책임자 등의 의무) 덕에 한층 더 예민하게 차별을 ‘인식’하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차별금지법안이 9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법안의 문장을 고민하는 일은 드물었다. 익숙하고 막연한 혐오가 있었고, 그것과 싸워야 했다. 생뚱맞은 데 그어진 전선에서 갈등하다가 정작 법안은 잊히는 일을 13년 동안 일곱 번 겪었다.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이번만은 다를 이유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니까.(류승연 작가) 내 자녀, 내 부모, 내 친구, 그래서 나의 일인 차별은, 당신과 당신 사람의 일이기도 할 것이니까. 그리하여 건조한 법안의 문장 앞에서 나와 다르지만 사랑하고 싶은 타인을 떠올릴 테니까. 그러다 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어떤 생물도 고독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진 않는다. 태어나보니 밤이었고, 혼자였고, 떠밀려서 차라리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김비 소설가)_편집자주
*기사는 2020년 6월29일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을 바탕으로 썼다.
차별금지법안 제3조 1항 1호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 및 가구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사회적 신분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위니(오은지·49)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결혼 뒤 대구에 살았다. 가톨릭이다. 아이 둘과 남편, 시어머니와 5인 가족을 이룬다. 작은 출판사 대표다. 특별히 소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2015년, 둘째 자녀 우빈이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위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적이 있을 정도의 부모였으므로, 우빈의 커밍아웃을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 같은 부모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들어했던 아이의 고통”에 같이 아팠을 뿐이다. 그때 우빈은 17살이었다. 우빈이 자기 정체성을 깨달은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2년 넘게 아팠다. 우울증을 앓았고 몸도 약해졌다. 학교를 그만뒀다.
10대는 고민하느라 20대는 비용 마련하느라
우빈이 커밍아웃하고 가족의 삶은 변했다. 주변에 아이의 정체성을 함께 밝혔다. 여러 매체와 인터뷰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책도 출판했다. 우빈 같은 성소수자들이, 정확한 정보보다 혐오의 말을 먼저 볼 게 걱정됐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했다. 부모뿐만 아니라 “나이는 어려도 단단한 모습으로 자신을 이야기하며 가르침을 주는” 성소수자를 많이 만났다.
9월16일 위니와 우빈이 함께 일하는 출판사 사무실에 포근한 볕이 든다. 길고양이 밥까지 살뜰하게 챙겨놓았다. 우빈은 씽긋 웃고 푸른색 마스크를 단단히 채운다. 외출 준비를 한다. 책장에는 최근 출판사가 낸 책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박경미 지음, 2020, 66쪽 참조)가 꽂혀 있다. 소셜펀딩으로 출판 비용을 마련했다. 우빈이 직접 디자인한 굿즈인 배지가 모금에 큰 힘이 됐다. Q(퀴어의 첫 글자)자 모양 무지개를 배경으로 하트를 품은 예수님의 ‘쿨한’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잘 다녀와” 우빈에게 인사를 건넨다. 위니와 마주 앉아 차별금지법, 그 가운데 특히 ‘정체성’을 두고 이야기한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제3조 1항 1호)에는 23개, 국가인권위원회가 추진하는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권고안)’(제3조 1항)에는 21개의 ‘정체성’(차별 금지 사유)이 적혀 있다. 성별, 장애, 나이, 출신 국가, 성적 지향, 성정체성, 학력, 용모, 병력 등이 빼곡하다.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면 안 되는 정체성이다. 모두가 몇 개쯤 품고 있을 법하다. 평소처럼 지니고 살다 어느 날, 어떤 차별 앞에 돌연 절박하게 숨기거나 절박하게 드러내야 할지 모를 것들이다.
세상이 어떤 정체성은 없는 셈 치는 사이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다. “부모나 이웃이나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많은 트랜스젠더가 10대에는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느라 시간을 써버려요. 20대에는 수술 비용을 마련하느라 허비하고, 30대에 막상 수술하고 나서 텅 비어버린 듯한 상태가 된다고 해요. 자기 정체성과 싸우다보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아무것도 준비해놓은 게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는 거예요. 그렇게 사라지는 젊은 친구들의 가능성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트랜스젠더 2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40%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연구 결과(김승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도 되짚는다. “우리 아이도 끝까지 숨기고 혼자서 짊어질 생각까지 했다는 거예요.” 법이 정체성을 불러준다면, 소수자는 거기 기대어 자기 존재를 표현할 힘을 얻는다. ‘존재를 표현할 자유’는 “죽을 뻔한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고 위니는 생각한다.
많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이웃에 있을 줄은
정체성을 말하는 우빈과 위니를 보며 같은 고민을 짊어진 이웃도 숨통을 텄다. 가까이 지내는 동네 이웃들에게 아이의 정체성을 이야기한 2018년 가을밤을 떠올린다. 조마조마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막상 곁에 있는 우빈의 이야기를 모두가 잘 받아들여줬다.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메시지가 왔어요. ‘죽으란 법은 없나봐. 우리 애도 지난달에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어’ 하는 내용… 제가 늘 말로는 ‘적게 잡아도 성소수자는 한 반에 한 명씩은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서 정작 내 이웃이 그런 일로 혼자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 뒤 위니와 우빈은 좀더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덜 주저했다면 그분이 고민하는 시간도 줄었을 거잖아요.”
위니는 몰라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계속 공부하고 겸손해지기로 한다.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장애인에 대한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평등에 대한 헌법 조문도 읽는다. 다시 차별금지법으로 돌아와 위니는 묻는다. “남편이랑 차별금지법을 얘기하다가 좀 걸렸던 것이 있는데요. 몰라서 23개 안에 채 넣지 못한 정체성이 있으면 어떡하죠? 오히려 헌법은 차별금지 원칙을 폭넓게 담고 있는데.”
차별 금지 사유를 얼마큼 구체적으로 법안에 적을 것인지는 오랜 고민거리다. 지나치게 구체적일 경우 채 담지 못한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다. 이미 헌법 제11조가 폭넓게 차별 금지 사유를 포괄하고 있기도 하다.(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위니의 생각처럼 “헌법 정신만 제대로 구현된다”면 따로 법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독일의 일반평등대우법은 다소 느슨하게(8개) 차별 금지 사유를 적을 뿐이지만, 이들 사유를 폭넓고 포괄적으로 해석한다.
명문 규정이 없는 경우
다만 ‘한국처럼 차별금지법제가 안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률에 명문 규정으로 없는 차별 금지 사유가 인정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홍성수,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평등기본법을 위하여’) 현실도 엄연하다. 그래서 법안은 되도록 많은 정체성을 담고, 새로운 차별 사유를 추가할 수 있도록 ‘~등’을 문장 끝에 적어두는 방식을 택했다. 우리 현실과 헌법 속 선언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다.
예민하고 겸손하게 나와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성을 일상 곳곳에서 되새기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제 나이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이가 아니었다면 ‘이제 세상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거예요. 아이 덕분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기 풍성하고 다채롭다는 것을 알았고, 세상에 대해 계속 공부해나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해요.”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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