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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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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공주의자’ 펄 벅

미국 보수 기독교 선교, 영·일 식민통치 등
제국주의와 냉전에 반대하는 정치활동 활발
등록 2016-05-28 15:36 수정 2020-05-03 04:28
중국 루산(여산)에 있는 펄 벅의 산장(위쪽)과 내부에 전시된 작가의 자료들. 임헌영

중국 루산(여산)에 있는 펄 벅의 산장(위쪽)과 내부에 전시된 작가의 자료들. 임헌영

한국과 중국에서 펄 벅(1892~1973)만큼 서운한 대접을 받는 유명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방중 때 동행을 원했으나 거부당한 채 그 이듬해에 작고하고 말았다. 기독교 선교사에다 반공주의 작가라는 낙인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문학기행 마지막 회에서는 정치활동을 통한 그의 참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는 1960년 11월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1969년까지 여덟 차례 걸쳐 오가며 경기도 부천에 펄벅재단을 설립(1967)했다. 이와는 별도로 부천의 펄벅기념관은 2000년 이희호 여사가 펄벅상을 받은 뒤 추진위원회를 발족, 2006년 개관한 문화공간이다. 기념관은 펄 벅의 생애와 문학을 조망할 수 있는 시설과 유품을 갖추고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반대

백인 작가로는 한국 문제에 가장 진지한 관심을 가진데다 침략국 일본에 반대했던 그는 1962년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일본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존 케네디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쐐기를 박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 싸이전주(賽珍珠 혹은 珀尔 巴克)로 부르는 펄 벅의 아버지 앱살롬 사이던스트리커가 신앙에 몸 바치겠다는 캐롤린과 결혼, 중국에 간 것은 1880년이었다. 1천 여 선교사들이 활동했지만 신자는 1만 명도 못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미국인에게 중국이란 이민금지법의 대상으로, 교활하고 알 수 없는, 매음굴과 아편 소굴이라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1830~40년대부터 미국 중서부 농촌 출신 신학대학 졸업생을 중국으로 집중 파견해온 선교활동이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지적한다.

“선교사의 설교는 이유 없는 공격이다. 그것은 유혹하고, 요구하고, 호통치고, 방해하고, 겁을 주려는 것 같다. (…) 당신이 결코 소망한 적이 없었던 결과들을 당신의 마음속에 이식하고, 그것들이 그 속에서 열매를 맺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끝난다.”(, 피터 콘 지음, 이한음 옮김, 은행나무 펴냄, 2004. 이하 인용 모두 이 책)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선교가 문화 파괴나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목소리까지 공공연히 나왔다.

중국에서 근무 중이던 선교사 부부가 일시 귀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펄 벅을 출산(1892년 6월26일), 석 달 만에 시장바구니에 아기를 담아 다시 근무지로 떠났다. 그러니 펄 벅은 생후 3개월부터 1934년 마흔두 살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격변기 중국의 체험자였고, 귀국 뒤에는 일생 동안 중국을 위한 각종 로비와 민간 차원의 활동에 기여했다.

그가 기독교 선교에 비판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은 보수적인 아버지의 선교활동 때문이었다. 소설 (1931)로 명성이 올라간 이듬해부터 그는 터놓고 중국 선교를 비판했다. 선교단을 ‘정신적 제국주의’로 호칭, 그들의 설교가 “모든 사유를 둔감하게 하며, 모든 현안을 혼란에 빠뜨리며, 따라서 중국 교회들은 위선자 무리를 만들어내고 있다”(앞 책, 258쪽)고 했다. 마침 중국에서 만났던 윌리엄 어니스트 호킹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의 (1932)가 널리 읽히면서 가열된 비판의 기운은 오히려 보수파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이단 재판설 등 온갖 위협을 가해 펄 벅은 선교사직을 사임(1933)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적 제국주의’ 선교 비판

펄 벅이 중국 현대사와 정면으로 맞선 첫 사건은 국민당이 북벌 때 난징에 입성(1927), 100여 외국인들을 감금했을 때다. 그간 외국인 살해나 주택 파괴 등을 공산당의 책임으로만 알고 반공의식에 빠져 있던 그는 장제스를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인물로 여겼다. 불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해서 14살 연하의 쑹메이링과 결혼한 장제스의 기회주의적 처세에는 냉소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정치적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펄 벅은 제국주의에는 철저히 비판적이면서도 공산주의 역시 반대했다.

펄 벅이 장제스의 실물을 직접 본 것은 1929년 6월1일 쑨원의 장례식(1925년 작고했으나 북벌 성공 뒤 이날 난징의 중산릉에 공식 안장)에서였다. 난징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 여선교사에게 장제스의 크고 대담하고 쏘아보는 눈빛은 감동을 주었다.

이듬해에 펄 벅은 입양녀 제니스를 난징의 힐크레스트학교 부설 유치원에 넣었는데, 그 반에 장제스의 심복 장관이자 손위 동서인 쿵샹시(부인은 쑹아이링)의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를 데려다주는 일은 쑹메이링이 맡았기에 펄 벅은 그녀가 나타나면 일으키는 요란스러움을 지켜보곤 했다.

그토록 신뢰했던 장제스로부터 펄 벅이 등을 돌린 것은 영구 귀국(1934)한 후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난징이 허망하게 점령당하자 격분한 펄 벅은 국방비를 횡령 착복해 체이스은행에 빼돌린 중국 군벌의 부패가 이런 비극을 초래했다고 날을 세웠다. 이후 그는 중국을 지원하는 모든 활동에 적극 가담해, 미국으로 하여금 석유와 철강의 대일 수출 금지 여론 환기에도 앞장섰다. 펄 벅은 중립 그 자체가 일본을 도우는 행위라면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마침 에드거 스노와 님 웨일스가 중국에서 전개 중인 인더스코(Indusco)를 널리 전파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농업용 장비와 군사용 장비를 공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 운동은 항일전의 성패를 좌우했다. 중국 긴급 구호위원회 창립 위원장을 맡은 펄 벅은 저절로 세계적인 반전평화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여성해방운동으로 FBI 감시받아

인도 독립을 얼버무리는 처칠의 외교술을 맹비난하면서 루스벨트에게 결코 영국의 식민정책을 묵인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흑인민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전위대 역을 맡은 펄 벅에게 본능적으로 문학인을 싫어하는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감시망은 점점 조여왔다. 펄 벅에게 씌워진 혐의는 “유명 공산주의자들, 공산주의 동조자들, 러시아 공산당 독재정책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의 편을 든다는 것이었다.

펄 벅이 달갑잖게 여기는 쑹메이링이 신병 치료를 구실로 미국 워싱턴에 간 것은 1942년 11월이었다. 이듬해 5월까지 머물면서 쑹메이링은 몸에 짝 달라붙는 까만 중국 드레스로 치장하고서 상하합동의회에서 1시간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백악관에 몇 주 머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갖고 온 비단이불을 쓰는 등 까다로운 공주처럼 굴었다.

그 직후 펄 벅은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여 쑹메이링이 비록 매력적이긴 하나 그 부부 누구도 민주주의자가 아니며, 국민당은 무능과 부패로 신망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펄 벅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경이로우며 반대로 장제스의 정적 숙청은 스탈린과 닮았다고 비난하며, 중국 농민을 포용하는 유일한 정당은 공산당이라고 단언했다. 중국 현장을 보고 싶다는 루스벨트 영부인에게 펄 벅은 저우언라이를 꼭 만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도 직성이 안 풀린 이 작가는 가장 영향력이 큰 잡지 에다 ‘중국에 관한 경고’라는 글을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꼭 이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미국 정계와 여론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지지 열기는 싸늘해져버렸다.

장제스 국민당의 무능·부패 경고

1944년 뉴욕의 쑨원 추모집회에서 펄 벅은 그의 부인 쑹칭링까지 추어올렸으나 장제스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혁명의 이상은 쑹칭링을 통해 구현될 것이며 그녀야말로 중국 도덕의 중심이자 민주주의 희망의 상징이라면서, 동생 쑹메이링을 깔아뭉갰다. 이 연설도 에 실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펄 벅은 에서 연합국이 해방시킨 나라에 식민통치를 종식시키라는 주문과 함께, 아시아인은 유럽과 미국이 진보적인 정책을 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쟁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46년 3월5일 처칠은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학 학위 수여식 연설 ‘평화의 원동력’에서 ‘철의 장막’이란 냉전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를 경멸했던 펄 벅은 즉각 “우리는 러시아 사람들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다”면서 이 신형 ‘십자군 전쟁’을 비판하고 나섰다.

펄 벅에 대한 비판이 이것으로 다 풀리진 않겠지만 이만한 양식의 반공주의자라면 용납될 법하지 않을까.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임헌영 소장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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