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천재 연애대장 바이런

‘악마적인’ 자유 찬미하고 타국 그리스 국민영웅으로 칭송받는 로맨티시스트 혁명시인
등록 2016-05-13 15:03 수정 2020-05-03 04:28
그리스 메솔롱기에 있는 바이런의 동상(왼쪽 사진)과 기념비(오른쪽 사진). 임헌영

그리스 메솔롱기에 있는 바이런의 동상(왼쪽 사진)과 기념비(오른쪽 사진). 임헌영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은 문학사상 최고의 미남에다 연애대장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에서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거론, 한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사악한’ 귀족이던 종조부(큰할아버지)의 남작 작위를 승계한 이 시인이 “찬미한 자유란 독일 왕이나 체로키 인디언 추장의 자유이지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열등한 자유가 아니었다”(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고 러셀은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가 “열등한” 것이란 표현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바이런이 추구했던 악마적인 ‘자유’의 실체에 대한 설명으로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노동권 옹호한 만능 스포츠맨

그의 모험담들, “자유사상가들의 용기를 뛰어넘는 죄”의 실체를 러셀은 “바이런 가문에 속한 이스마엘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그는 사탄에 카인이며, 프로메테우스이자 아폴론, 돈 판(돈 후안)이자 카사노바다.

키 174cm, 몸무게 60~89kg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그는 잔혹한 다이어트로 날씬함을 유지했고, 태어나면서 절름발이였지만 복싱·승마·수영·크리켓·펜싱 등 스포츠 만능으로 불릴 만큼 몸을 단련했다.

상원의원 바이런이 한 첫 국회 연설은 노팅엄 양말공장 노동자의 폭동을 진압 위주에서 고통 경감으로 바꾸라고 비판한 것(1812년 1월15일)이었고, 두 번째 발언은 노동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노동법의 부당성을 비판(2월27일)한 것이었다.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러다이트 운동’으로 기록된 이 투쟁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에 걸친 한 흐름이었다. 산업혁명 뒤 기계화로 편직(編織) 노동자의 해고가 급증하자 이에 반대한 노동자들이 밤중에 6~50명씩 무리지어 고용주의 편물기기를 부수는 투쟁이 영국에선 1811~17년에 고조됐다. 양말 제조업체에선 1811~12년, 레이스 제조 기계들에 대한 투쟁은 1816년에 절정을 이뤘다.

이복누나와의 불륜
스위스 몽트뢰의 시옹성(왼쪽 사진). 지하감옥 벽에 바이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사진). 임헌영

스위스 몽트뢰의 시옹성(왼쪽 사진). 지하감옥 벽에 바이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사진). 임헌영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은 “기계 도입에 따른 폐해뿐만 아니라 임금수준의 저하, 실업의 증대, 물가 상승, 노동자의 권익 침해 등”( 1권 120~137쪽, 김금수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으로 현대 노동운동과 비슷했다.

운동이 격화될수록 징역형에서 사형으로 대응하자 바이런은 폭도, 난동분자, 위험분자, 무식꾼인 폭도로 몰아대는 그들의 노동으로 우리가 밥을 먹으며, 육해군 병력의 원천이라고 윽박질렀다.

누를 길 없는 바람기를 잠재울 상대로 선택한 밀뱅크와의 결혼은 이내 파탄 났는데, 바이런의 이복누나로 6살 연상인 오거스타와의 불륜 때문이었다. 밀뱅크는 남편을 영국에서 추방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둘 사이의 딸(에이다 러브레이스)은 수학의 천재로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이론적인 제공자로 유명하다. 러셀은 “무의식적으로 연인이 아닌 어머니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오거스타 이외의 모든 여인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고 썼다.

바이런이 1816년 28살에 추방당해 36살 그리스에서 죽을 때까지의 8년간은 가히 로맨티시즘의 태풍이었다. 그해 6월23일 셸리와 함께 루소의 의 무대를 찾아다니다가 몽트뢰의 시옹성을 참관했다. 스위스 제네바 호반의 이 성은 애국자이자 종교개혁 운동가인 보니바르가 성주 사보이에게 핍박당해 1530~36년 투옥된 감옥으로 악명 높다. 사보이가 통치하던 이 지역은 가톨릭에 절대권력 통치였으나 보니바르는 신앙혁명과 제네바의 독립을 동시에 추구했다.

바이런의 시옹성 관련 시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지하 일곱 번째가 감옥이고, 셋째 기둥에 바이런 서명이 각자되어 있으며, 다섯째 기둥에 보니바르가 묶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55대 총독 반란 사건을 다룬 시극 를 잊을 수 없다. 총독이지만 귀족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모욕당한 팔리에로가 노동자를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처형당한 희귀한 사건이다. 팔리에로는 총독 자리를 포기하고 “국가의 자유”를 되찾으려 했고, 폭군으로 사느니 시민의 손에 쓰러질 각오를 하며 폭군의 대리인은 아니라고 했다.

타국 독립전쟁 참전과 죽음

이 미남 천재의 최후의 장렬한 장면은 그리스 독립전쟁 근거지였던 메솔롱기에서 보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참전해 부상한 것으로 유명한 레판토 해전 전적지를 지나, 바이런이 1824년 1월에 상륙했던 메솔롱기에 이르면 한적한 마을이 온통 바이런으로 차 있다. 유적과 기념상, 특히 메솔롱기 바이런 협회는 세계 바이런 관련 학자들과 많은 행사를 열고 있었는데, 한국의 학자들도 꼭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바이런은 이 독립전쟁에서 그리스군을 위해 재원과 군사훈련을 아끼지 않고 전력투구했다. 레판토 침공 작전을 논의하던 중 열병으로 서거한 이 위대한 로맨티시스트 혁명시인의 투지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바이런을 국민적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