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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새끼’에서 ‘혁명가 친구’ 된 푸시킨

“세계의 독재자들이여! 두려움에 몸을 떨라!” 러시아 차르 시대, 스물한 살 때부터 ‘혁명시인’
등록 2016-04-30 15:16 수정 2020-05-03 04:28
푸시킨이 12살 때 고향 러시아 모스크바를 떠나 공부했던 리체이 학습원에 있는 시인의 동상. 임헌영

푸시킨이 12살 때 고향 러시아 모스크바를 떠나 공부했던 리체이 학습원에 있는 시인의 동상. 임헌영

스물한 살 때 쓴 시 한 편 때문에 죽을 때까지 황제의 감시 아래 살았던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문학인 중 동상이 가장 많은데다 지명, 학교, 거리 이름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문제의 시 ‘자유’는 “세계의 독재자들이여! 두려움에 몸을 떨라!/그리고 그대들, 엎드린 노예들이여,/ 용기 내어 그 노래 새겨듣고 떨쳐 일어나라!”라고 선동한다. “전제정치의 악인이여!/ 그대를, 그대의 왕관을 나는 혐오한다./ 그대의 파멸, 후손들의 죽음을/ 내 잔혹한 기쁨 가지고 보노라./ (…)/ 그대는 세상의 공포, 자연의 치욕,/ 그대는 신에 대한 지상의 모독.”이라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박형규 옮김, 써네스트 펴냄)는 경고로 이 시는 끝맺는다.

‘황제의 충견’ 기르는 학교 입학

그의 생일(6월6일)은 러시아 시의 날이다. 어릴 때 별명이 ‘볼품없는 오리새끼’였던 푸시킨은 열두 살에 고향 모스크바(생가는 사라졌음)를 떠나 차르스코에셀로(‘황제의 마을’이란 뜻. 현 푸시킨시)의 궁정부속학교 격인 학습원(리체이) 제1기생으로 들어갔다. 분수대로 유명한 페테르부르크 근교 여름궁전 가까이에 있었던 황제의 충견을 기르기 위한 리체이가 푸시킨 전기에서는 혁명가 양성 기관처럼 그려졌다. 이 시절의 친구들이 러시아혁명사의 제1장인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주역이었다.

재학 시절부터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푸시킨은 졸업(1817) 뒤 외무부에 근무, 독서모임, 녹색램프 등은 물론 비밀결사 회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밀결사에서는 용감한 이 시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이 많고 성격이 급해 걸핏하면 결투로 치닫기에 그냥 시인으로 혁명을 기록하고 노래하도록 두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는 설과, 행여 비밀이 탄로될까 예방 차원이었다는 설이 엇갈린다. 사육신의 무장 유응부가 일갈한 서생불가여모사(書生不可與謀事)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자유’를 읽고 분노한 게 이때(1820)였다. 친구들이 구명활동을 해준 덕분에 그는 외무부 10등 관직을 유지한 채 남러시아 캅카스로 전근 형식의 추방길에 올랐다.

친지들의 로비로 한촌에서 도시로 전근 다닌 추방 생활은 마치 혁명투사의 수련 과정 같았다. 치밀한 감시 아래서도 푸시킨은 나름대로 여행과 집필과 연애를 즐겼다. 그러다가 서신 검열에서 무신론에 관심 있다는 게 밝혀져 차르는 시인을 공직에서 해고(1824), 전근이 아닌 추방령을 내렸다. 어머니의 영지가 있던 미하일롭스코예로 유배당한 시인은 바이런과 셰익스피어에 매료당해 리얼리즘으로 작풍을 전환했는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이 무렵에 쓴 시다.

아무도 감히 찾지 못했던 미하일롭스코예로 리체이 시절의 친구 푸신이 나타난 것은 1825년 1월. 재학 시절부터 비밀결사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그는 제대 뒤 법원에 근무 중이었다. 혁명가 푸신은 이웃 농민의 딸들이 푸시킨의 집에서 바느질을 하는 걸 보다가 유난히 예쁜 임신한 하녀에게 시선이 갔다. 푸시킨은 푸신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청년 귀족들이 농노의 딸과 예사로 관계를 가지고는 죄의식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푸신에게는 부끄러웠을 터이다.

‘자유’ 시 한 편 쓰고 추방 생활
데카브리스트 광장 모습. 임헌영

데카브리스트 광장 모습. 임헌영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푸신은 돌아갔는데 12월 초, 편지로 페테르부르크로 오라고 했다. 추방자 신분인 푸시킨은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집을 나섰는데 얼마 안 가 산토끼가 앞길을 가로질렀다. 다시 가자 산토끼가 두 번이나 더 나타나더니 네 번째는 승려를 만나게 되자 뭔가 징조가 안 좋다는 생각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와마 토오루 지음, 이호철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 참고)

만약 푸시킨이 그냥 갔다면 13일에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바로 시인 릴레예프의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이튿날 거사할 1825년 12월14일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푸시킨이 참석했다면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앞장섰을 것이고, 다른 주동자와 달리 추방 중이라 그에게는 아마 가중처벌이 내리지 않았을까.

거사날 아침 릴레예프가 동지와 집을 나서자 아내와 여섯 살 딸이 시인을 못 가게 막아섰다. 만류해도 안 되자 부인은 까무러쳤고 시인은 그냥 광장으로 가버렸다.

3천여 군인들이 일으킨 세계 역사상 희귀한 이 군사반란은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즉위에 반대하며 농노제 폐지, 법 앞의 평등, 민주적 자유, 배심재판의 도입, 국민 개병제, 관리들의 선거제, 인두세 폐지,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의 전환 등 러시아 사회정치 체제의 혁명을 요구했지만 즉시 진압당하고 말았다.

산토끼가 가로막은 반란 참여

유형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푸시킨은 체포자 명단과 자신과의 관련 여부 등으로 불안했지만 “자네들에게 확실히 말해두지만 절대로 나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도와줄 생각들은 말게나.”( 유리 로트만 지음, 김영란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라고 떳떳하게 나섰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인 푸시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황제에게 관대한 처분을 호소했으나 이듬해에 릴레예프를 비롯한 5명의 처형에, 120여 명의 유형이 잇따랐다. 친구 푸신은 20년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그는 끈질기게 차르에게 접견을 요청, 1826년 9월8일 모스크바의 크렘린 서재에서 니콜라이 1세와 첫 대면을 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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