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보수 인사들이 에 떼지어 등장한 것일까? 사는 일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길을 개척할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진보주의자는 현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집단적 지혜에 기댄다. 중론을 모아 공론을 형성한다.
은 15살 생일을 맞아 통 크게 잔칫집 대문을 열기로 했다. 보수 인사들을 초청해 한 말씀 듣기로 했다. 그래도 ‘수준’이란 게 있으므로, 수구 인사에겐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자기 성찰이 가능하고 현실 비판에 스스럼없는 ‘합리적 보수’를 찾아나섰다.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지 엄밀한 개념 규정은 잠시 미뤘다. 선을 분명하게 그을수록 대화의 땅은 좁아지므로.
그래도 개념 정리가 아쉬운 독자를 위해 김어준 총수의 글을 소개한다.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공포와 대면하는 서로 다른 두 태도, 그게 바로 좌우라. ‘우’는 세계를 약육강식 정글로 본다. 그 두려움, 스스로 포식자가 되어 해결하려 한다. 키워드는 경쟁이요, 그 엔진은 욕망이라. 반면 ‘좌’는 정글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정글의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감당할 규모를 줄여 대처하려 한다. 하여 ‘좌’의 키워드는 연대, 그 엔진은 염치다.”( 2월11일치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가운데)
어떻게 ‘합리적 보수’를 가려낼 것인가? 엄밀성·공정성·객관성 따위에 굳이 연연하지 않았다. 평가자의 권위와 수상자의 체면을 억지로 높이려는 거품을 덜어냈다. 지난 1년여간 와 에 등장한 필자 또는 취재원 300여 명에게 설문 전자우편을 보냈다. 넓은 의미의 ‘진보·개혁 성향’으로 꼽히는 사람들에게 ‘합리적 보수 인사’에 대한 추천을 부탁한 것인데, 추천자 가운데는 ‘진보’라는 꼬리표를 속으로는 거부하는 이가 끼어 있을 수 있다.
“각계에서 활동 중인 보수주의자 가운데 ‘말이 통하는 보수’ ‘부드럽고 유연한 보수’ ‘보수 내부를 향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는 보수’를 가려내고자 한다”는 질문에 모두 56명이 회신했다(추천위원 명단 참조). 5명 가운데 1명꼴로 답한 셈이다. ‘합리적 보수 인사’를 추천한 진보 성향 인사들에는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소속 정치인, 인문사회 계열 교수, 변호사, 시민운동가, 출판·언론인 등이 두루 포함됐다.
이들은 각계의 155명을 ‘합리적 보수 인사’로 추천했다. 최종 선정된 15인은 적게는 5명, 많게는 24명에게서 추천을 받았다. 각 인물의 득표수는 굳이 밝히지 않는다.
누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합리적 보수’라고 진보 인사들은 생각하고 있을까? 정치권 인사들이 가장 많았다.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김성식·남경필·문국현·원희룡 의원이 뽑혔다. 창조한국당 소속의 문 의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한나라당 의원이다. 이들은 모두 수도권에 지역구를 두고 있다.
여기에 김종인·남재희·박세일·손학규·윤여준·조순 등 과거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을 더하면 15명 가운데 10명이 정치권 출신이다. 정치인들의 경우, 개인의 이념 지향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 진보 인사들이 ‘발견한’ 합리적 보수의 대부분이 정계 출신인 이유다.
학자 출신도 적지 않았다. 송호근·이상돈·정운찬은 모두 현직 교수다. 정치권을 거치긴 했지만 김종인·박세일·조순·손학규도 전·현직 교수다. 이들 대부분은 언론에 칼럼을 쓰고 단행본을 펴내면서 대중과 꾸준히 접촉해왔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논설위원을 지냈고,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에 칼럼을 썼다.
안철수와 김훈은 다른 인사들과 구분된다. 안철수는 카이스트 석좌교수지만, 공학을 공부한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다. 김훈은 언론인을 거쳐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15명 가운데 9명은 환갑을 넘겼다. 50대와 40대는 각각 3명이다. 설문 과정에서 ‘합리적 보수로 꼽을 수 있는 젊은 인물’의 추천을 특별히 부탁했는데, 결과적으로 응답자들은 ‘젊고 합리적인 보수’를 찾아내진 못한 셈이다.
어떤 면에서 이들이 ‘합리적 보수’일까? 상당수 추천위원들은 합리적 보수를 가려내는 중요한 잣대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태도’를 들었다. ‘합리적 보수’ 15인 가운데 한 명인 이상돈 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대선 전까지도 ‘뉴라이트’를 대표하는 보수 논객으로 꼽혔다. 대선 이후에는 대운하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은 물론 등 보수 언론까지 비판하고 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보수 진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아는데, 대선 이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이 교수의 모습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재희·윤여준 등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부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고, 원희룡·남경필·김성식 의원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하승수 제주대 교수는 “극단주의로 흐르는 오늘의 상황에서 ‘합리적’이라고 불릴 만한 행동을 직접 보여줘야 ‘합리적 보수’”라고 평했다. 보수 진영에 대한 진보 인사들의 요구와 기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인물이 합리적 보수로 꼽힌 점도 두드러진다. 최근 경제위기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은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 “관계에 있을 때의 경제정책으로 보아” 합리적 보수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제평론가 정태인도 합리적 보수를 가려내는 데 “‘케인스주의’가 하나의 잣대가 된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케인스주의는 ‘자유주의’에 가깝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케인스주의자가 보수로 평가되기도 하고 진보로 평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글이나 말에서 보이는 ‘품격’의 문제도 추천 과정에서 적잖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임대식 전 주간은 “‘합리적’이라는 것은 단지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이나 도덕성의 문제와 결부된다”고 말했다. ‘강경 보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합리적 보수’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윤여준·남재희·박세일 등은 평소 온건하고 온화한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무슨 생각이 이 시대 ‘합리적 보수’를 지배하고 있을까?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많았다. 자신들이 품고 있는 가치에서 이명박 정부가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개혁적 보수가 아니라 강경 보수의 모습을 많이 보인다.”(원희룡 의원) 민주주의 경시, 경제중심 사고 등이 비판의 근거가 됐다. “이명박 정부는 기업가적 사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는 효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다.”(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신자유주의 성향의 정책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도 공통적이었다. “글로벌 체제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국제경제와 국내 상황이 변했으면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김종인 전 의원) “‘리버럴’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지 않으면 경제적 위기가 정치적 위기로 번질 것이다.”(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개혁적 보수 중심 새로운 정치판 구상 중흥미롭게도 합리적 보수 인사들의 정서 밑바닥에는 개혁적 보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판을 짜야 한다는 구상이 있었다. “정치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우리 정치에 비전과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만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박세일 서울대 교수) “범여권의 분화가 진행되어 일부 세력이 일종의 대안세력 역할을 하는 양상을 상정할 수 있다.”(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이 상황이 한국 보수 전체의 실패로 귀결되는 사태는 어떻든 막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건강한 보수 세력의 이론적·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이들의 구상은 과연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 이들은 시장자유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 질서를 구축하는 보수 정치의 꿈을 이야기했다. 사상·정책·역사를 넘나드는 ‘합리적 보수’ 5명의 이야기는 200자 원고지 40~60매 분량에 이른다. 간략한 내용을 우선 지면에 담는다. 생생한 육성은 인터넷 (h21.hani.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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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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