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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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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보수’는 환상이다

추천위원 박경신 교수의 반론 “보수는 가치 추구 세력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
등록 2009-04-02 09:03 수정 2020-05-02 19:25
추천위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설문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합리적 보수로 추천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특히 현역 정치인들 가운데 이런 반응이 많았다. 권영길·천정배 의원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며 마지못해 몇몇을 추천했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합리적 보수라고 할 만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내가 과문한 탓이길 바란다”고 했다. 합리적 보수의 ‘실체’에 대한 의구심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다.
합리적 보수가 존재하는지 의심될 정도로 한국의 보수 세력이 ‘강경보수’ ‘초보수’ ‘수구보수’ 일색이라는 판단이 이런 반응의 바탕에 깔려 있다. 독재정권의 구태를 벗고 새로운 보수가 되겠다고 등장한 ‘뉴라이트’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실용보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 역시 권위주의적 구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대한 실망이다. 보수 집권 세력 내부를 향해 비판하고 행동하는 보수주의자가 없는 한, 합리적 보수라는 ‘명예’를 부여할 수 없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나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오히려 ‘합리적 진보’가 있는지 자문해야 할 때”라고 했다. 진보주의자를 성찰하는 일이 ‘있지도 않은’ 합리적 보수를 굳이 발굴하려는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진보 진영의 그런 정서를 대표해 추천위원 가운데 한 명인 박경신 고려대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합리적 보수에 대한 기대를 접고 합리적 진보를 재구성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편집자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2008년 8월5일 오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300여 개 보수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나라사랑 한국교회 특별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2008년 8월5일 오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300여 개 보수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나라사랑 한국교회 특별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우리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진정한 보수’의 출현을 기다려왔다. 2005년 11월 ‘뉴라이트’가 출현했을 때, 2007년 말 과거 군사 쿠데타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던 박근혜를 누르고 이명박이 승리했을 때, ‘수구보수’가 아닌 ‘실용보수’의 출현으로 우리도 ‘우아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두 번 다 여지없이 무너졌다.

보편적 경제발전 원하지 않아

그리고 2009년 들어 우리는 다시 한번 “합리적인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협력해… 일종의 거국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백낙청 교수의 요청을 듣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합리적인 보수를 기다려온 데는 이유가 있다. 진정한 정치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투쟁이지 이익집단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의 주 전선은 식민지와 독재정권의 역사 속에서 유래한, 특권을 지키려는 집단과 특권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었지 여러 가치들 간의 투쟁이 아니었다. 2009년 2월 촛불시위를 지켜본 한 자칭 보수 네티즌의 말이다. “현재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다. 수구와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쇠고기 반대집회를 반대했던 이른바 ‘보수’라는 단체는 거칠게 이야기해서 친미매판 수구세력이다. …어느 나라 보수단체가 자국의 국기와 다른 나라 국기를 (함께) 들고 집회하는가.”

1997년에 출간된 (삼인 펴냄)이라는 책은 김대중·이건희·김문수 등 10인에 대한 평가하고 ‘한국에 보수주의는 없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과연 합리적 보수는 존재하는가? 보편적으로 세계의 보수 진영들이 내세웠던 가치는 전통·국가·가족·자유·경제발전·생명·법질서 등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자원개발이 전통 생활양식의 파괴를 수반하게 될 때, 보수 진영은 항상 전통의 반대편에 섰다. 가족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혈연관계의 성립과 유지를 위해서는 국가의 출산 지원 등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축소하려는 세력 역시 어느 나라에서나 보수 진영이다. 보수 진영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던 쪽은 항상 보수 진영이었고, 도리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의 표현의 자유까지 보호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미국시민자유연합(ACLU)과 같은 진보 진영이었다.

세계사 속에서 보수 진영은 절대로 보편적인 경제발전을 원하지 않았다. 초기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의 이유는 효율성이 아니라 기득권의 유지였다.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할 불법체류자들 없이는 미국 경제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미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불법체류자 추방을 외치며 보수표를 집결시켰다. 보수 진영은 사형제를 요구해왔고 기아 선상의 사람들에게도 인색했다. 보수 진영이 생명을 중시할 때는 낙태와 존엄사같이 자신의 우주관과 가치관에 따른 인간다운 삶과 죽음을 선택하려는 개인을 위선에 굴종하도록 억압하려 할 때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법질서에 대해서는 신영철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하지 않는 보수 진영의 모습을 지적하고만 넘어가자.

가치들을 지향하는 순수한 ‘보수적 개인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보수주의의 본질이다. 보수주의가 세력을 형성할 때 그 리더들은 항상 원래 내세웠던 가치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운다. 보수주의는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라 동시대에서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일 뿐이다.

‘합리적 보수’라는 개념은 진보 진영이 현재의 정치를 ‘이익 다툼’이 아닌 ‘가치의 투쟁’으로 해석해 만들어낸 환상으로 보인다. 가치 지향으로서 보수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진보 진영은 그런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들’이 협상 파트너가 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합리적 보수’를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자신의 지위에서 눈치 보지 말고 ‘가치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 현재의 정치는 ‘가치 투쟁’도 ‘이익 다툼’도 아니며 현실정치를 가치의 투쟁으로 만들려는 사람들과 현실정치를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다. 필요하면 불복종을 선언해야 한다. 또 진보집단 스스로가 ‘가치 투쟁’이 아니라 ‘이익 다툼’에 빠져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거나 부자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오는 것이 진보는 아니다. 구태여 도식화하자면 부자들이라는 ‘지위’ 자체를 없애는 것이 진보다. 이를 망각한 진보는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얻어낸 지위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그 지위는 임금으로 또는 정원제로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대한 미련은 정치를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고 이 다툼으로의 진입 자체가 패배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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