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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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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전체의 실패는 막아야”


②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기업가적 사고와 물리적 힘으로는 국민 통합 힘들어
등록 2009-04-03 01:46 수정 2020-05-02 19:25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현재 직함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이다. 여의도에 사무실이 있다. 국회의사당이 길 건너편에 있다. 공식적으로 그는 정계를 은퇴한 상태다. 17대 총선 직후인 2004년 5월31일 한나라당 여의도소장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날 탈당계도 함께 제출했다.
24일 오후 여의도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보수정치사의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 주로 물었다. “혹시 청와대에서 도움말을 구하지는 않더냐”고 물었더니 “내 성격이 못된 것을 알아서 그런지 전혀 연락이 없다”며 웃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날이 서있었다.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는 비록 권위주의적 방식을 통해서나마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의 내용을 창출했다. 반면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지켜야 할 가치’를 민주화하는 ‘보수적 민주화’ 노선을 정착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보수 정치의 몰락을 가져왔다. 정권을 (진보개혁 세력에게) 내준 것은 그 결과였다.

결국 각 정부가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구현했는지의 문제가 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이명박 정부가 내걸었다는 ‘새로운 보수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제중심적 사고와 행태다. 과거 보수주의 정부들이 국민통합을 중시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기업가적 사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공화당 설득하는 오바마를 보라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경제가 국민생활의 기반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건물의 기초이긴 하지만 건물 그 자체는 아니다. 이미 세계적 흐름은 경제 제일주의로부터 삶의 질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촛불을 야기한 쇠고기 파동 때도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접근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맛있는 고기를 싸게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건강과 불평등 조약의 문제에 주목했다. 국민 의식과 대통령 의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입법전쟁 하겠다고, 질풍노도처럼 몰아치겠다고 집권 여당이 선언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과정 없이 질풍노도처럼 몰아친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 민주주의는 효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다. 아무리 급하고 비효율적이어도 어쩔 수 없다. 오바마를 봐라. 경제위기 극복이 얼마나 다급한가. 그런데도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그게 민주주의다.

조선왕조 시절에도 현명한 임금들은 형벌로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권력으로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공권력을 우선 생각하지 말고 국민을 설득해 동의를 얻는 노력부터 하는 게 좋다. 권력은 도덕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도덕적 권위가 없는 권력은 물리적 힘만 남는다. 물리적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어떻게 됐는지 과거의 역사가 말해준다.

새로운 보수적 패러다임 모색을

과거 보수주의의 특징은 국가주의, 성장주의, 반공주의다. 근데 이것으로는 안 된다.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모두 이야기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보수적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출범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명박 이후’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지만, 이명박 정부의 국정 수행을 지켜본 보수세력 내부에 우려가 적지 않다. 나라의 중심 가치도 없고 국정의 중심 세력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분들이 걱정하는 내용이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새로운 보수 가치가 정립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고 그것이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는 우려도 한다. 이 상황이 한국 보수 전체의 실패로 귀결되는 사태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끼리 뜻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느냐, 우리 몫을 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제도권 밖에도 상당한 보수세력이 있다. 한나라당과 대통령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있다.



■ 인터뷰 전문

- 한국 보수 정치의 뿌리는 아무래도 이승만 정부에게 있을 것이다. 그 정치사적 의미를 평가한다면
= 이승만 정부는 ‘보수 정치’가 지켜야할 기본적 가치와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는 2차 대전 종식과 냉전의 시작이라는 국제정치적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가치와 어떤 체제의 국가를 건설해 어느 진영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다.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제의 농업경제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공화정을 수립한 것과 자유진영에 한국을 자리매김한 것 등은 역사적으로도 긍정평가할 대목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반도에 남겨진 유산은 왕조적 전통을 이어받은 지주적 경제 질서와 강압적 식민정부였다. 이런 가치와 확고히 결별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역사적 경로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만 독재와 파행적 의회주의·정당정치 등은 이승만 정부가 우리에게 남겨준 부정적 유산이다.

- 박정희 정부는 군사독재의 원형이고, 한국 보수 세력의 ‘요람’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부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가 세운 제도적 틀을 수호하면서, 그 안에 ‘알맹이’를 채워 넣는 역할을 했다. 냉전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해 경제개발계획 및 고도성장을 통해 국가의 물질적·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정치의 주력인 중산층의 토대도 건설했다. 사실상 ‘실질적 국가건설자’가 아니었나 한다.
특히 명확한 목표 설정, 질풍노도의 성장 드라이브, 끈질긴 과제 수행 능력 등은 보수 정치의 전범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단기간에 압축성장을 추진한 결과,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하거나 심지어 부정한 측면이 있다. 이는 보수 정치가 지향해야할 가치를 스스로 훼손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정보정치·강압정치·3선개헌·유신 등은 이후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이 오랫동안 비판받는 멍에가 됐다.

- 전두환·노태우 정부 등 이후 군사정권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하는 것인가.
= 전두환 정부는 성립 과정에서 (쿠데타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 자체까지 부정한 유신 정부의 일탈을 다소 완화하는 한편, 유신 정부 시절 이뤄진 무리한 중화학 공업 투자의 후유증을 수습하긴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정보정치·강압정치 등 박정희 정부의 연장선상에서 부정적 유산을 남긴 제2기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다만 집권 중반 이후 경제회복과 3저 호황으로 비약적 경제발전을 기하였고 이에 힘입어 민주정치의 주역인 중산층이 등장하게 됐다는 점,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은 ‘민주 전환’에 성공했고, 이어 정통성을 갖춘 군 출신 대통령이 선출되는 등 이후 ‘보수적 민주정치’가 전개되는 토대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태우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보수적 민주정치’의 경로를 깔았다. 그러나 비전 부재와 정치력 미흡으로 자본과 노동을 비롯한 사회세력의 거센 도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민주 전환’ 이후 보수적 민주화의 궤도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특히 3당 합당 이후 구심점을 상실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됐을 뿐 아니라, 새롭게 대두된 중산층을 시민사회로 전환시켜 보수정치의 승계세력으로 육성해 내는 데 실패했다.

- 김영삼 정부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공보수석을 맡는 등 가까운 곳에서 김영삼 정부를 지켜봤는데.
= 김영삼 대통령 취임 2년 뒤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내가 맡은 공보수석이 권력의 핵심은 아니다. 깊이 아는 건 없는데 그렇다고 관찰자 입장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여, 답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세력에 의한 보수정치’라는 새로운 보수적 민주발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핵 문제에 미봉적으로 대처해 분란의 불씨를 남겼다. 정보화·세계화 등 20세기 후반의 급속한 국제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그 결과 보수 정치의 몰락을 가져왔다.

- 상대적으로 87년 이후 보수 정권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 같은데.
=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구현했는지의 문제다. 이승만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까지는 비록 권위주의적 방식을 통해서나마 보수가 지켜야할 가치의 내용을 창출했다. 반면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지켜야할 가치’를 민주화하는 ‘보수적 민주화’ 노선을 정착하는데 실패했다. 정권을 (진보개혁세력에게) 내준 것은 그 결과였다.

-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과거 10년의 ‘민주정부’에 대한 반정립인 동시에 이전 ‘보수정부’에 대해서도 반정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새로운 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보수주의 정부와는 어떻게 다른가.
=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이명박 정부가 내걸었다는 ‘새로운 보수의 기치’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장과 효율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과거 보수주의 정부와 유사한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뚜렷이 다른 점이 많다. 이명박 정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제중심적 사고와 행태다. 당연히 국가나 정치는 경시되고 있다. 그동안 보수정치나 진보정치가 공히 보여주었던 국가중심·정치중심적 경향에 대한 반발인지 모르겠지만, 기업가적 사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과거 보수주의 정부들이 국민통합을 중시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결과를 가장 중시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이명박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공통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 일견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차이가 적지 않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는 어젠다, 스타일 등에서 모두 정치중심적이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중심적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무주역들은 연령·경력·정치인맥 면에서 김영삼 정부까지 이어져온 보수세력과는 거리가 있다.
시대적 과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김영삼 정부는 권위주의적 보수정치가 남긴 유산을 민주화하고, 탈냉전세계화에 대응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이명박 정부는 진보정치가 남긴 유산을 보수적으로 개혁하는 한편 세계화의 후유증을 치유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런 점에서도 두 정권을 구분해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성과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숙청이나 금융실명제 도입 등 과감한 정치개혁을 했다. 성공한 쿠데타(12·12 쿠데타)도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수립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확실한 개혁 프로그램이 없다. 아직까지 제대로 개혁할 여유도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영삼 대통령만 해도 취임 1년간 일을 많이 했다.
국민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은 취임 첫 해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에 따라 나머지 임기 4년이 결정된다. 대통령은 국가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게 소통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관심과 집중을 모으는 것이 통합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점에 비교적 충실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과거를 규정했다. 그런데 이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종합적 프로그램이 없다. 국민을 설득하여 동의를 받아내야 동력이 생기는데 그런 것이 없다. 취임 이후 1년을 돌이켜보면 상황에 정신없이 끌려간 면도 있다. 취임 1주년이 되면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준비를 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지금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앞으로도 이명박 정부가 어렵지 않겠는가.

- 경제중심적이라고 지적했는데, 그런 ‘경제주의’ 성향 때문에 당선된 것 아닌가.
= 그동안 신자유주의 물결이 한국에서 계속 됐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경제 제일주의로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시운을 탄 측면이 있다. 그런데 경제가 국민생활의 기반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건물에 비유하자면 건물의 기초이긴 하지만 건물 그 자체는 아니다.
이미 세계적 흐름은 경제제일주의로부터 삶의 질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도 이미 세계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경제도 중요하지만 복지나 환경, 여성 분야의 삶의 질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실망이라는게 먹고 살기가 어려워져서 그런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삶의 질에 대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를 보면 모두 돈과 관련이 있다. 747, 대운하 등의 선거공약도 그렇고 도곡동이니 BBK니 하는 상대편의 네거티브도 결국 돈 이야기였다. 촛불을 야기한 쇠고기 파동을 가만히 보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접근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맛있는 고기를 싸게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비싸냐 싸냐가 아니라, 건강에 관한 대목에서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도 무엇인가 불평등조약의 성격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반발한 것이다. 나는 지난해 촛불 집회를 보면서 국민 의식과 대통령 의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산업화 이후 신자유주의가 더 촉진됐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런 흐름을 만든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다. 그 책임까지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다른 가치를 향해 나아갈 시점인데 그런 의식이 없는 것 같다.

-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의 비효율’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 같다.
= 한국 정치가 오랫동안 효율이나 생산성과 동떨어져 왔기 때문에 그런 요소를 집어넣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효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다. 아무리 비효율적이어도 어쩔 수 없다. 민주적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걸 모르고 민주주의를 했나.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시급한 법안이라면 미리 국민들을 설득할 노력부터 했어야 한다. 야당이 (국회에서) 폭력적 방법을 쓴 것도 이유가 있다. 만일 국민들이 여당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야당이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야당이 그렇게 나온 것의 근저에는 이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없다는 판단이 있다. 국민은 민주적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하는데 정부 여당이 그걸 안한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오바마는 안 그런가. 경제위기 극복이 얼마나 다급한가. 그런데 오바마는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그렇게 해야 한다. 효율성보다 민주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설사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안됐다고 쳐도 어쩔 수 없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못받으면 못하는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 효율성에 대한 집착이 권위주의적 억압 통치로 넘어가는 것 같다.
= 요즘 주변에서 ‘공안정국’에 대해 말을 많이 하더라. 언론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한국 언론에도 후진적 요소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권력이 언론을 직접 손보려 해서는 안된다. 그 충동을 잘 참아야 한다. 독자·시민의 압력에 의해 언론이 스스로 고치게 할 생각을 해야지, 언론을 직접 손대려고 하면 그것이 곧 언론탄압이 된다. 현실적으로 봐도 그 싸움에서 (권력이) 이기기도 힘들다.
조선 왕조 시절만 해도 현명한 임금들은 형벌로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권력으로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법치를 하지 말라는게 아니다. 공권력을 우선 생각하지 말고 국민을 설득해서 동의를 얻는 노력부터 하는 게 좋다. 권력은 도덕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도덕적 권위가 없는 권력은 물리적 힘만 남는다. 물리적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어떻게 됐는지 과거의 역사가 말해준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권력 정통성 문제 때문에 효율성을 살려 이를 보충하려는 노력을 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상황에 끌려오다 지지기반까지 흔들리니까 마음이 조급할 것이다. 그런 나머지 뭘 빨리 하려는 충동이 생기는 것인데, 그럴수록 잘 참아야 한다.

- 민주당의 책임은 없나.
= 한국 현대사가 이데올로기의 역사다. 필연적으로 대결의 역사다. 거기다 독재와 민주의 대결 구도까지 내려온다. 지금 민주당 분들은 전통적으로 보면 (한나라당과) 뿌리가 같은 보수지만, 권력을 놓고 여야로 갈라져서 극단적 대결 구도 아래 정치를 해왔다.
아직도 그런 관성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오늘날의 국민들이 그런 야당을 원치 않는다는 데 있다. 시대가 바뀌어서 야당에 대한 국민의식도 바뀌었다. 민주-반민주 구도에서는 야당이 무조건 투쟁만 하면 성원해줬다. 그런데 이젠 싸우지 말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야당다운 야당을 요구하기도 한다. 싸우지 않으면서 어떻게 강력한 야당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엔 지금 야당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투쟁인지 생각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민주당은 차기 집권은커녕 존립도 어려울 것이다.

- 다른 방식을 찾고 싶어도 정부 여당이 워낙 몰아붙이니까 궁여지책으로 대응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 물론 야당만 나무랄 수는 없다. 여당 대표가 입법전쟁 한다고 선포하고 질풍노도처럼 몰아치겠다고 직접 말했다. 입법을 하면서 전쟁하겠다는 나라가 있나. 그것도 집권여당에서 전쟁선언하는 일이 어디 있나. 민주사회는 법이건 정책이건 국민적 동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과정과 절차 없이 질풍노도처럼 몰아친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

- 앞으로 한국 보수 정치가 추구해야할 다른 가치가 있다면.
= 과거 보수주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국가주의, 성장주의, 반공주의다. 근데 이것으로는 안된다. 새로운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내놓을 식견이 나한테는 없다. 그러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모두 이야기하는데, 이명박 정부 시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보수적 가치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 정치가 새로 품어야할 가치를 굳이 열거하자면 안전·환경·복지·여성 등 삶의 질의 문제와 더불어 배려·관용·협력 등이 아닌가 한다. 현재 한국 보수 정치를 대표하는 가치는 효율성·수월성·개인·자유·기업 등인데, 전반적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다소 경시하는 것 같다.

- 대선 직전까지 ‘새로운 보수’의 재구성이 ‘뉴라이트’로 대표됐다. 그 담론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 뉴라이트와 그 담론이라는 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고, 여러 흐름과 갈래가 있어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크게 보아 정권 상실 이후 보수세력의 자기혁신 차원의 몸부림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진보세력에 대항하여 그로부터 정권을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 같고, 그 점에서 이명박 정부 탄생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신보수의 철학을 정립하고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거시적·장기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는 미흡하지 않았나.
실제로 지금 뉴라이트라는 것이 대부분 활동이 정체돼있는 것 아닌가. 박세일 교수가 이끄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이 그나마 활발한 모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곳에서 내거는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것이 국민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좀 어려운 개념이다. 김진홍 목사가 있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정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운동을 펼쳐서 이명박 정권 탄생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지만 진짜 보수 가치를 추구하는 노력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 뉴라이트 운동에 직접 참가할 생각은 없었나.
= 김진홍 목사 등과는 전혀 개인적 인연이 없다. 박세일 교수는 잘 알고 지내는 편이지만, 석학들이 하는 일에 나같이 무식한 사람이 뭐 할 일이 있겠는가. 그들이 내놓은 성과를 공부는 하지만, 그런 일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 한국 보수 정치권 내부에 ‘이명박 이후’에 대한 구상이나 동력은 있나.
= 출범한 지 이제 1년이 조금 지났다. 현재 시점에서 ‘이후’를 논의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다만 지난 1년 동안 이명박 정부의 국정 수행과 보수 정치권의 행태를 지켜본 보수 세력 내부에 우려가 적지 않다. 주변 분들을 만나 보면 나라 장래에 대해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 그 내용이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새로운 보수가치가 정립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고 그것이 쉽게 회복될 것 같지도 않다는 우려도 한다. 이명박 정부가 이런 식으로 가면서, 결국 한국 보수 전체의 실패로 귀결되는 건 곤란하고, 그런 사태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라의 중심가치도 없고 국정의 중심세력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적으로야 그런 요소들이 다 있지만, 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없다. 그러니 이대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계적 흐름을 보면 인류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았는데, 이런 때일수록 좋은 리더십이 국민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나라를 잘 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

- 어떤 대책이 있나.
= 지식인에게 사회적 책임이 크다. 지식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소흘히 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정치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끼리 뜻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서로 만나면서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러면 개별적으로 모래알처럼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안되지 않겠느냐, 우리 몫을 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 청와대 참모나 관료들의 부주의와 무능에 대한 지적도 있다.
= 청와대 참모나 비서진은 이미 언론 등에서 많이 비판을 했다. 내가 거기에 더 보탤게 뭐 있겠나.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분들의 자질이 크게 떨어지거나 게으르거나 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제3자 입장일 때는 잘 보이던 것이 당사자가 되면 잘 안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국가경영이나 권력운용의 경험이 너무 없는 ‘참신한 분’들만 있어서 실수를 많이 한 것 아닌가 한다.
지난 대선 과정을 보면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를 무능정부라고 비판했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유능할 것이라고 자처했다. 실제로 국민들도 그렇게 기대했다. 지금까지 보면 전문성도 없고 경험도 풍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대통령 지지율이 30% 정도인데, 그 내용을 뜯어봐야 한다. 경제위기에 안보위기까지 겹치는 마당에 국민들은 사회가 흔들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도자 중심으로 모이는 측면이 있다. 국정수행 능력을 지지해서 그런 것인지는 다시 봐야 한다.

- 어쨌든 한나라당은 거대 집권 여당이다. 한나라당의 틀을 통하지 않고 보수 정치의 쇄신이 가능하겠는가.
= 한나라당의 사정을 예민하게 지켜보진 않았다. 여야 모두 국민에 대한 신뢰를 워낙 잃었으니까 현재의 정치지형이 과연 이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어떤 큰 변화가 오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에 계신 분들도 서로 생각이 다른 것 아니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가치·이념 중심으로 뭉친 정당은 아니다.
보수세력 가운데도 합리적·개혁적·건강한 보수라고 자부하는 분들은 이명박 정부의 실패가 보수 전체의 실패로 귀결될 경우, 정권재창출에 실패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수 정권을 유지하려면 다음 대선에서는 제대로 된 보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아직 몇 년 남았으니까 지금부터라도 그런 사람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 그게 박근혜 의원인가.
= 박근혜가 될지 누가 될지 그런 정도의 논의가 나온 적은 없다. 아직 그런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니다.

-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틈’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은데.
= 지금은 그런 것 같지만, 꼭 이명박과 한나라당이라는 틀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틀에서만 봐도 다른 균열이 생길 수 있다. 제도권 밖에도 상당한 보수세력이 있다. 한나라당과 대통령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정치적·현실적 고민도 많이 하고 있다.

- 기존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인가.
= 역대 총선 때마다 한나라당은 이른바 ‘공천 교체율’이 높았다. 의원들의 면면은 계속 바뀌어왔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보기에는 한나라당은 변화가 없다. 새 사람을 충원하긴 했는데, 그게 ‘같은 유형’의 인물이라서 그렇다.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당이 바뀐 것 같지 않은 이유다.

- ‘새인물’이 없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자 대부분이 기득권에만 연연하면서 공동체적 연대의 정신이 취약한 데서 비롯한 것은 아닌가.
= 진보세력은 공동체적 연대정신이 강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보수세력에 비해서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진보 쪽 인사들이 공동체 연대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은 없다. 오히려 흑백논리와 배척논리가 상당히 강하다. 과거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을 배척한 것에 대한 반대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상당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그건 공동체적 가치와는 다른 것 아닌가.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인물은 보수 세력 안에도 상당하다.

- 흑백·배척논리가 강하다는 지적은 진보정당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 민주노동당에서는 아직도 그런 면을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는 민주노동당보다 진보신당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은가 한다.

- 진보세력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 내가 관찰하기에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과도한 이상주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국가·국민의 현실적 안전과 복리후생보다는 아직도 선악 이분법적인 흑백논리, 현실에 대한 과도한 윤리적 평가, 현실에 대한 총체적 부정 등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으로나 글로벌한 차원에서 볼 때도 원래 진보세력은 국제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는 법인데, 한국의 진보세력은 과도하게 폐쇄적·민족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다.

- 개인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진보주의자가 있다면.
=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백낙청 선생이나 김지하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경청할 대목이 많더라. 김지하 선생은 철학적 고뇌를 담아 문명사적 이야기를 많이 하고, 백낙청 선생은 민족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오랫동안 천착했다. 최장집 교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 그가 쓴 책이나 글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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