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옵니다. 맞바람이 붑니다. 옷이 축축해집니다. 반대쪽 차선에서 자전거 여행자가 지나갑니다. 인사나 나누고자 유턴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네요…. 저한테 불어오는 맞바람이 자전거 여행자의 등을 밀어준다 생각하니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여행은 머리나 가슴만으로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적어도 소녀상과의 이번 여행은 엉덩이로 합니다.”
‘엉덩이로 하는 여행’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이호철(36·가명)씨가 자신의 오토바이에 ‘위안부’ 할머니를 형상화한 ‘작은 소녀상’(미니어처)을 태우고 한국을 떠난 지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그는 지난 3월20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배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중앙아시아 지역 50여 개국의 현지 일본대사관을 찾아, 작은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을 주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길 건너편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과 꼭 닮은 모습이다. 과거 전쟁범죄의 책임을 도외시하는 일본 정부의 반인권적 태도를 피해자들의 상징인 ‘소녀상’이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좌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첫 여정은 부산에 있는 일본국총영사관에서 시작됐다. 일본 정부가 자국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외국인에게 입국 거부를 취하는 경우를 우려해 얼굴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을 때는 ‘각시탈’을 썼다. 그렇게 세계 일본대사관을 찾는 각시탈과 소녀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시작됐다. 몸에 지닌 것은 최소한의 여비와 오토바이 한 대, 간이 텐트, 그리고 소녀상을 담기 위한 플라스틱 케이스뿐이다.
첫 행선지 러시아에서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빙판 위에서 오토바이는 속수무책이었다. 전화도 안 터지는 시베리아 산골에 며칠씩 발이 묶이기도 했다. 설상가상 러시아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여권과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바로가기)에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시베리아 도로 사정은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비포장도 아직 남아 있고, 포장을 가장한 비포장도 많습니다. 소녀의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합니다. 첫 번째 목적지 모스크바는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그때까지 소녀가 잘 견디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소녀상에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여정이다. 이씨의 오토바이가 빙판길에서 쓰러질 때마다, 소녀상도 머리·발목 등 곳곳이 부서졌다. 소녀상이 앉았던 의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소녀가 감당하기엔 힘든 여행인가 봅니다. 폭설로 강제휴식을 하는 동안 소녀 치료를 하였습니다. 안전과 건강을 최선으로 하겠습니다.”
예상 이동 거리만 무려 4만5천km. 그러나 힘을 냈다. 출발 25일 만인 4월12일 드디어 첫 행선지 러시아 모스크바 주일대사관에 도착했다. “오늘은 러시아 바이커 친구네 집에서 하루 신세지기로 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저를 같이 바이크를 탄다는 이유로 잠자리와 먹거리를 내어주는 친구들! 시베리아는 척박하지만 사람들은 따뜻합니다.”
폭설 만나 소녀상 부서져도러시아 대륙을 지난 뒤, 본격적으로 일본대사관을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일주일 만에 핀란드 헬싱키, 라트비아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 리투아니아 빌뉴스, 폴란드 바르샤바, 체코 프라하 주재 일본대사관을 찾았다. 북유럽으로 향하는 길부터 빠듯한 경비가 어깨를 짓눌렀다. 노숙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현지 노숙인들에게 미리 잡아둔 자리를 뺏기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도 저도 없는 날, 폭우가 쏟아지면 고속도로 휴게소 구석에 남몰래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했다.
“비가 옵니다. 잠시 휴게소에서 쉽니다.북유럽으로 갑니다. 독일도 물가가 30% 뛰었는데, 북유럽은 두 배라네요…. 이미 준비된 자금은 다 썼고 혹시 아프거나 급한 일 생기면 돌아갈 비행기표 비상금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비상사태니까 비상금 써도 되겠지요? ‘여행 초 분실 사건만 없었어도 풍족하지 않아도 부족함은 없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도움도 좋습니다. 혹시 유럽에 동생이 산다든지 해서 하루 재워주셔도 좋습니다^^. 북유럽 2개국을 가지 말고 다른 나라를 갈까 고민이 많습니다. 기름값과 꼭 타야 하는 페리 티켓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그렇게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프랑스 파리 주재 일본대사관에도 도착했다. 파리에선 소녀상을 놓고 일본대사관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대사관 경비원에게 제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제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충돌할 필요는 없으니 길 건너에서 촬영해야겠습니다.”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배에 오토바이를 싣고 영국으로 향했다. “소수점 자리까지 계산해서 지출을 하는데, 배표가 싸길래 ‘영국 가자’ 해서 항구에 왔다가…. 유로가 아니라 파운드를 쓰네요^^. 며칠 고생해야겠습니다.”
영국 런던에서는 거창하고 고풍스런 일본대사관 건물 위로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이곳 일본대사관은 고압적인 담벼락을 갖고 있었다. 또다시 대사관 경비원과 사진 촬영을 놓고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길에 ‘고속도로 배기량 제한’에 걸려 벌금 30유로를 냈다. 앞서 스위스 고속도로 통행증을 구입하는 데 40프랑이 들었다. 25일치 식비에 해당하는 돈이다. “여행이 그런 것이지만, 오늘은 좀 지치는” 그런 하루였다.
소녀상과의 여행이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잠시 소녀상을 잃어버렸을 때, 이르쿠츠크 로샤라는 러시아 친구는 자기 일인 양 백방으로 수소문해 소녀상을 찾아줬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음식 한 보따리’를 사서 안겨준 한국인 여행자, 연료가 떨어진 오토바이를 보고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주고 말도 없이 떠나버린 바이커, 우연히 만나 언제든 자기 집에 묵으라며 연락처를 준 ‘알렉세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시골에서 짐 나르는 거 도와주고 오토바이 기름 한 번 넣어달라고 했는데 밥까지 챙겨준 농부님들, 스페인 세비야에서는 페인트칠 아르바이트 해줬더니 일당 100유로와 숙식까지 챙겨준 이들처럼 말도 할 수 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오늘도 안전하자”그는 5월17일 현재 포르투갈 리스본, 모로코 라바트를 거쳐 스위스 베른 주재 일본대사관을 끝으로 발칸반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을 거쳐 중국을 이번 50여 개국을 목표로 하는 ‘1차 여정’의 종착지로 생각한다. 계획대로 일정이 끝날 수 있을지는 오토바이와 자금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제 전 슬로베니아로 출발합니다. 오늘도 안전하겠습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여러분의_도움이_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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