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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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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

‘제1회 길원옥 여성평화상’ 받은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의 18년 평화운동

“마음 담아 피해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
등록 2017-08-16 13:00 수정 2020-05-02 19:28
18년 동안 한결같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온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18년 동안 한결같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온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베트남에 도착해서 우리는 수정을 만났다. 우리의 답사 주제를 들은 수정은 서랍을 뒤져 자료를 꺼냈다. ‘전쟁범죄보고서-남부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중략) 한국에서 준비한 자료와 수정이 건넨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는 여기저기 파이고 생채기가 있는 베트남의 1번 국도, 사이공에서 하노이를 잇는 대동맥을 따라 길을 떠났다. 35년 전의 기억 속으로.”(김현아, 중)

핏빛 증언이 역사적 사실로

1999년 봄, 베트남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갔던 김현아 작가와 구수정씨가 만났다. 구수정씨는 당시 베트남 호찌민대학에서 베트남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이들이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자료 ‘전쟁범죄보고서’를 들고 베트남 1번 국도를 종단하는 동행의 기록 일부가 1999년 5월 기사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으로 보도됐다. 구수정씨가 호찌민 통신원으로 있을 때였다. 구수정씨는 이 첫 조사 작업 몇 개월 뒤 논문을 쓰기 위해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베트남 중부 지역을 45일간 답사했다. 반신반의하며 들어간 마을마다 피해자·생존자들이 “카이!” “카이!”(‘저요’를 뜻하는 베트남어)를 외치며 ‘한국군의 만행’을 말했다. 100여 명의 핏빛 증언 역시 1999년 9월 에 보도됐다. 소문과 의심이 ‘역사적 사실’로 자리바꿈하는 순간이다.

구수정씨의 이 기사들은 한국 사회에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을 규명하고 사죄하자’는 양심의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14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꾸려져 한국 정부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사죄, 배상 등을 요구했다. 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돕는 캠페인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를 진행했다. 평화단체 ‘나와 우리’는 2000년부터 10여 년 동안 ‘한베청년평화캠프’ ‘베트남 평화기행’ 등을 진행하며 베트남과 한국 사이의 접점을 넓혀왔다. 2000년 발족한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2017년까지 18년 동안 베트남 현지 진료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구수정씨는 지난 18년 동안 한결같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해왔다.

1999년 학살을 만난 연구자 구수정씨는 올해 2월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 진실 규명과 그에 따른 사죄와 반성 △희생자 추모 △피해자 지원 등을 통해 굴절된 전쟁의 기억을 바로잡고 동아시아 평화 네트워크를 꾸리려 한다.

은 8월4일 이 재단의 상임이사 구수정씨를 만나 그동안 활동의 소회와 앞으로 재단이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길원옥 여성평화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지난 5월 이화여대 신학대학에서 받은 ‘제1회 이화기독여성평화상’ 상금이 씨앗이 돼 만들어졌다. 앞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 활동가, 언론인 가운데 수상자를 선정해갈 예정이다.

베트남 평화운동의 출발은 위안부 할머니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의 이름을 딴 상을 받았다. 의미가 남다를 텐데.

할머니들로부터 베트남 평화운동이 출발했다. 1999년 이 처음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돈이 참 안 모였다. 캠페인 참가자 수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많은 개인들이 쌈짓돈을 모아주셨다. 다만 기업·단체·학교 등 기관이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이 가해자고 한국 사회 안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에게 “아버지, 베트남인을 죽이셨나요?”라고 질문하는 문제처럼 비쳤다. 그때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해 김장 비용 전액을 보내주셨다. 문명금·김옥주 할머니 두 분은 전 재산을 기탁해주셨다. 할머니의 이름, 할머니의 마음이 없었다면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로부터 베트남 평화운동이 출발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공부하러 베트남에 갔다가 활동가가 됐다. 연구를 포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포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선택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내가 베트남에 있었고, 이 문제를 만났고, 피해자들이 늘 가까이 있었다. 피해자는 한두 분이 아니어서 항상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긴다. 아프시면 병원 가고,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러야 하고. 한국에서 기자와 작가들이 왔다. 길 안내를 하든, 통역을 하든 피해자와 연계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1999년 학살을 만나고 알린 이후 2003년까지 1년의 300일은 무덤가에 있었던 것 같다. 외면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베평화재단은 어떤 사업들을 하나.

베트남 평화기행으로 피해자를 만나고, 학살지인 빈호아 마을의 초등학교에 매 학기 장학금을 주는 사업을 한다. 위령제가 열리는 곳에 제사기금을 보내고, 제사돼지와 조화를 보낸다. 역사를 기록하는 아카이빙 작업도 한다.

제사기금을 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지역에 희생자를 기리는 두 가지 추모행사가 있다. 하나는 관에서 운영하는 위령제다. 다른 하나는 유가족들이 주축이 돼서 하는 ‘따이한 제사’다. 위령제는 관에서 하기 때문에 매년 열리지만 따이한 제사는 그렇지 않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제사이다보니, 한번에 수백 명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 빈호아 마을을 예로 들면 학살자로 확인된 분만 430명이다. 우리처럼 베트남도 음복을 하는데, 유가족 430명이 모이니 음복만 1천여 명이 해야 한다. 제사 비용이 엄청나다. 그래서 어떤 마을은 3~4년에 한 번, 어떤 마을은 5~6년에 한 번, 또 어떤 마을은 10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 마을을 다니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올해는 제사를 못 지내서 흉년이 졌다’ ‘올해는 제사를 못 지내 많은 사람이 다쳤다’ ‘제사를 못 지내서 태풍이 왔다’ 같은 것이다. 돈이 없어 희생자를 기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늘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제사 비용 전체는 아니더라도 마음을 표하자는 뜻으로 지원금 100만원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 비용이 동력이 됐다. ‘한국 사람이 제사 지내라고 100만원을 보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돈을 마련해 제사를 매년 이어가시더라. 적은 액수지만 마음을 담아 드리니 큰 힘이 되는구나 느꼈다.

돈 없어 제사 못 지내는 마을
지난해 2월 빈안 학살 50주기 위령제에 한베평화재단이 보낸 조화가 처음 제단으로 올라가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지난해 2월 빈안 학살 50주기 위령제에 한베평화재단이 보낸 조화가 처음 제단으로 올라가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조화를 보내는 것도 비슷한 의미인가.

조화는 위령제 때 제단에 올라간다. 2013년 우리가 조화를 처음 보냈을 때, 시선이 냉담했다. 제단에 인민위원회가 보낸 조화, 현에서 보낸 조화, 옆 마을에서 보낸 조화 등이 올라가는데 우리가 보낸 조화는 눈길도 못 받고 제단에도 못 올라갔다. 속이 상했지만 꾸준히 보냈다. 그분들의 상처가 얼마나 큰데 한국인이 보낸 조화가 예쁘겠나. 그러다 지난해 빈딘성 빈안 학살 50주기 위령제에 참배단을 꾸려 참석했다. 그때 마을 분들이 처음 조화를 올려주셨다.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정말 감사했다.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빈호아 마을에선 한국인이 아직 마을 입구까지만 갈 수 있다고 들었다. 이런 마음들이 더해져서 이제는 좀 바뀌었나, 아니면 여전히 못 들어가나.

빈호아는 증오비가 있는 마을이다. 아직 마을 입구까지만 갈 수 있다. 우물 이야기를 들으면 빈호아 마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빈호아 학살은 1966년 다섯 지점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한 지점에 우물이 있었다. 한국군이 학살을 마친 뒤 이 우물에다 주검을 던졌다. 우물이라 잘 타지 않으니까 지푸라기도 넣고, 기름도 부어서 주검을 태웠다. 이 사건 이후 마을 사람들은 내가 갔을 때인 1999년까지 30여 년 동안 옆 마을까지 왕복 40분 거리를 물지게를 지고 오가며 물을 길어먹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집에 도착하면 통 속 물의 절반은 달아나 있다. 이들의 한국인에 대한 마음이 어떨까.

이재갑 작가와 함께 사진 아카이브 작업을 하기 위해 2013년 학살 마을을 찾았다. 과거에 시민단체 ‘나와 우리’가 10여 년 동안 한베청년평화캠프를 진행해 생존자 집짓기를 하고, 위령비까지 가는 길을 닦아 집단 묘지를 만들고 유치원도 세운 꽝남성은 분위기가 다르다. 이곳에선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잡아끈다. 물과 바나나도 갖다준다. 그런데 빈호아가 있는 꽝아이성은 유령마을처럼 차갑다. 주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 마을을 가고 피해 주민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진상 규명 없이는 사과 아니다 한국 정부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사과보다 중요한 건 한국 정부의 진상 규명 작업이다. 진상 규명 없이는 사과가 아니다. 그걸 사과라고 하면 일본은 수백 번 사과한 셈이다. 우리가 피해자로서 일본에 요구하는 것과 가해자로서 베트남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 문재인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계승하는 만큼 이전 정부를 잇되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베평화재단 '만만만 캠페인'


마음을 기다립니다.


한베평화재단은 올해부터 2018년 3월까지 ‘만만만 캠페인’을 연다. 만일의 전쟁, 만인의 희생, 만인의 연대를 뜻한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전투부대 파병 이후 1966~68년에 집중됐다. 2018년은 1968년 청룡부대가 꽝남성에 들어가 마을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꽝남성 학살 50주기 되는 해이다. 한베평화재단은 함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억울한 희생을 추모하며, 베트남에 대한 한국인의 마음을 나누는 여러 프로그램을 꾸리고 이를 위한 모금도 한다.
모금액으로 베트남 중부 한국군 피해 마을에 조화 1천 개와 제사지원금이 담긴 돼지저금통 100개를 보내고, 마을의 소원을 듣고, 내년 4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함께하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시민평화법정을 연다.
베트남에 보낼, 마음을 기다린다.
후원 문의: 02-2295-2016
후원 계좌: 국민은행 878901-00-009326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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