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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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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차별에 공감하는 장애여성들

장애여성사 20년,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장애여성 극단 ‘춤추는 허리’ 기념 공연 준비 현장을 가다
등록 2018-01-30 08:54 수정 2020-05-02 19:28
장애여성공감의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조미경 소장, 배복주 대표, 나영정 정책연구원, 이진희 사무국장, 서지원 ‘춤추는 허리’ 팀장(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애여성공감의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조미경 소장, 배복주 대표, 나영정 정책연구원, 이진희 사무국장, 서지원 ‘춤추는 허리’ 팀장(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나에게 용기를 준 연극을 포기할 수 없어요.”

1월24일 오후 2시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장애여성 인권운동단체 ‘장애여성공감’. 이곳 회의실에서 극단 ‘춤추는 허리’ 단원 6명이 오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춤추는 허리’는 장애여성이 겪어야 하는 삶과 현실을 ‘몸’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장애여성들 스스로 모여 만든 극단이다. 단원들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은 그들보다 10년 앞서 극단에서 활동했던 옛 멤버들의 목소리였다. 단원들은 선배들의 음성을 듣고 “지금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 “공감이 된다”며 자기 느낌을 이야기했다.

뇌병변 장애여성으로 ‘춤추는 허리’를 이끌고 있는 서지원(39) 팀장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지만 그들의 말에서 ‘행복’ ‘도전’이라는 단어가 들린다”고 말했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듣던 이진희(42)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은 “그럼 그 단어들을 우리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춤추는 허리’ 단원들이 이날 모인 것은 2월2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리는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공연에서 단원들은 앞서 극단을 이끌었던 옛 멤버들의 목소리와 함께하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의 몸짓으로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행사 공연 준비를 하는 극단 ‘춤추는 허리’ 단원들.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행사 공연 준비를 하는 극단 ‘춤추는 허리’ 단원들.

한국 장애여성 운동을 이끌어온 장애여성공감이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1998년에 단체를 처음 만든 것은 장애인단체의 장애여성모임 ‘빗장을 여는 사람들’의 운영위원이었다가 그 단체를 나온 이들과 서울 고덕동 반지하방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한 3명의 중증장애여성이었다. 첫 사무실은 중증장애여성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고덕동의 반지하방이었다.

이들이 단체를 만들며 내건 슬로건은 ‘나는 장애여성이다’였다. 창립 멤버인 배복주(48) 대표는 “반지하방에서 벗어나 2001년 서울 고덕동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무렵 상근 활동가는 박김영희씨 딱 한 명이었다. 사무실 쇠문을 혼자 열 수 없어 출근할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장애여성공감 창립은 남성이 중심이던 한국 장애인 운동사에서 독자적인 장애여성 운동의 첫길을 연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현재 단체를 이끄는 배 대표가 장애인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 2학년 때인 1992년, 강남대에 다니던 장애인 백원욱씨의 휠체어 추락 사고였다. 배 대표는 “그때 대구의 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백원욱 장례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집회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이진희 사무국장 역시 “대학 때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했다. 그곳에서 장애인 의문사가 일어났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장애인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현재 장애여성공감에는 19명의 활동가가 일한다. 활동가가 늘어난 만큼 단체의 역량과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장애여성공감은 지체장애, 청각장애, 발달장애 등 다른 장애를 가진 여성이 만나고 소통하는 장소다. 활동가뿐 아니라 장애여성학교 회원들, 발달장애여성 합창단원, 자원활동가들 등이 이곳을 오간다.

이곳을 이용하는 회원들은 “내가 겪은 일들이 더 이상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 비장애인과 이성애 중심,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 안에서 겪는 배제와 차별을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하다”고 한다. 이진희 사무국장은 “지체장애인들은 발달장애인에 대해 모르고, 발달장애인은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에 대해 잘 몰랐다. 이곳에서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이 만나며 서로를 알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고 했다.

장애여성공감의 20년사는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온 한국 장애여성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2001년 8월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를 연 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장애여성을 위해 법률과 의료를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또 장애여성이 자신의 성을 바로 알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성교육과 반성폭력 운동도 펼치고 있다.

장애여성은 싱크대, 남성은 서재

2005년 만든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은 이후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을 위한 지원·조사·연구 사업을 해왔다. ‘숨’은 장애여성들이 서로 경험을 나누고 지지하는 동료 상담, 탈시설 운동, 재생산 권리, 장애여성과 안전 등을 주제로 장애인자립생활(IL)과 젠더 포럼을 진행했다. 그중에서 장애여성공감이 힘을 쏟는 사업은 교육이다. 해마다 장애여성학교를 개설해 각종 교육에서 배제된 장애여성과 함께한다. 이곳에서는 한글반, 연극반, 합창반, 미술반, 인권반, 장애와 여성주의반 등을 열고 있다. 장애여성 교육과 수평적 연대 활동으로 여성 스스로 자신을 표현할 힘을 갖고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장애여성공감은 실제 적지 않은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장애인 독립생활에 필요한 활동보조인 지원제도를 꾸준히 요구했다. 이 제도는 2007년 도입됐다.

2008년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를 가진 여성임을 이유로 모든 생활 영역에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제33조)는 조항을 넣었다. 현재 이들은 장애여성의 성과 자기결정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낙태죄 폐지를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2017년 3월 재결성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이름을 올리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넘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나영정 정책연구원은 “장애여성들이 가족 안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은 있지만, 독립생활을 하려는 이들을 위한 제도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무엇보다 독립 비혼 장애여성을 위한 제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선의로 하는 지원이지만, 장애여성들 편에선 성차별적이라 느끼는 일도 많다. 나 정책연구원은 “일례로 정부에서 주택 개조 서비스를 할 때, 여성 장애인 집이면 싱크대를 고치고 남성 장애인 집이면 서재를 고쳐준다”고 했다.

장애여성이 차별에 맞서는 법

일상의 차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진희 사무국장은 “지금 사용하는 사무실을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우리의 입주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4∼5군데를 거쳐 지금 사무실에 입주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를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1억 줄 테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분이 있다”고 했다. 조미경(44)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소장 역시 지하철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떨떨 폭력’을 당한단다. “저보고 밑도 끝도 없이 ‘희망을 가지세요’ 말하고 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돈을 주고 가는 분도 있다”고 한다.

장애여성공감이 지난 20년 동안 헤쳐온 역사는 다른 소수자들과 함께한 연대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 전쟁을반대하는여성연대 ‘와우’ 등과 함께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다닮연대)를 2003년 만들었다. 배복주 대표는 “이주여성, 성소수자들과도 연대하고 있다. 활동가들이 다른 단체의 집회에 나가 연대 발언을 하고 토론자로 참여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들과 우리를 연결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길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만든 사회적기업 ‘춤추는 베이커리’의 실패가 가장 뼈아픈 경험이다. “상품의 질만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에 유기농 밀가루, 유기농 설탕 등 비싼 재료를 썼다. 생산 속도도 느렸다. 당연히 수익이 나지 않아서 2년 가까이 운영하다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일이 반면교사가 됐다. 실패를 통해 살아남을 근육이 생겼으니까.” 이진희 사무국장의 말이다.

단체 활동가들은 장애여성공감 덕분에 고립된 방을 벗어나 거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춤추는 허리’의 서지원 팀장은 “장애여성의 독립과 연애 이야기를 담은 ‘춤추는 허리’의 공연을 보고, 나도 저런 무대에서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보조인도 없고 혼자 외출하기 어려워 집에만 있었지만, ‘춤추는 허리’를 알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 팀장은 2004년부터 ‘춤추는 허리’의 연출가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조미경 소장은 야학에 가고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애여성운동에 관심을 갖다 장애여성공감을 만났다. “장애여성공감 활동을 하며 장애여성 차별이 내 문제가 아니고 사회구조적 문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곳을 통해 내 욕구를 알고 나를 표현하고 내 언어를 만들어내며 힘을 기르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20주년, 다른 차별에 맞선다

장애여성공감은 창립 20돌을 맞는 올해,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사회의 차별적 시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사무국장은 “우리를 ‘불구라는 이름으로 낙인찍고 차별하는 이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앞으로 어떤 연대를 하고 어떻게 확장할지 고민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장애여성공감이 올해 중점적으로 벌이는 것은 반차별 운동이다. 배복주 대표도 “복지 사각지대에 있고 학대와 폭력을 당하며 고립된 장애여성을 위한 사업을 할 계획”이라며 “더불어 반말, 욕설, 사진찍기, 지하철 괴롭힘 등 일상적 차별을 막는 캠페인도 펼칠 것”이라고 했다.

‘정상성에 도전하는, 소수자와 연대하는’ 장애여성공감은 장애여성의 속도를 존중하면서 느리지만 함께 가려는 공감의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앞으로도 유쾌하고 까칠하게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맞서나갈 것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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