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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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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이 폭력 부른다”

<말이 칼이 될 때> 펴낸 혐오표현 연구자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마음속 편견→혐오표현→증오범죄 ‘악순환’
등록 2018-01-16 08:47 수정 2020-05-02 19:28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전선은 무너졌다.”

독일에선 올해 1월 ‘네트워크운영법’이 발효됐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특정 대상을 증오하는 내용이 담긴 ‘혐오 콘텐츠’가 올라오면 업체 쪽이 의무적으로 삭제해야 하는 법이다. 전통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진보적인 의제였다. 하지만 네트워크운영법을 둘러싼 전선은 흥미롭다. 이 법에 반대하는 전선에 진보정당인 녹색당, 좌파당과 더불어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합류했다. AfD는 2017년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에서 709석 중 94석을 차지해 제3당에 오른 극우정당이다. ‘나치’라는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일에서 극우정당이 이처럼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다.

이 전선의 맞은쪽에는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집권당인 기독민주-기독사회 연합, 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이 있다. 혐오는 이처럼 전통적인 정치 전선의 관습적 구도를 깨뜨리는 쟁점이 되고 있다. 오랫동안 혐오표현을 연구해온 홍성수(사진)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최근 이 민감한 논쟁의 길잡이가 될 책인 (어크로스)를 펴냈다. 1월10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연구실에서 홍 교수와 만나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묻고 들었다. 홍 교수는 “혐오표현은 곧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문제 ”라며 “이를 막으려면 정부와 사회, 개인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책을 펴낸 계기는?

한국에서 혐오 이슈가 제기된 것이 2013년께다. 그러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여성혐오가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영화 와 에서 드러난 중국동포 혐오가 논란이 됐다. 한국 언론이나 학계는 이 문제를 단발성 혹은 산발적으로만 다뤄왔다. 혐오 문제의 현 상황과 대안까지 고민해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혐오표현에 대해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양성 경험 적은 한국 더 위험” 왜 지금 혐오표현을 말하나.

외국 사례를 보면, 마음속 편견이 혐오표현으로 이어지고 증오범죄로 넘어가는 일련의 흐름이 있다. 물론 단계적인 것은 아니다. 편견이 바로 증오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혐오는 어떤 계기를 만나 바로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문제다. 지금 한국 사회를 위기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증오범죄는 여러 이유로 일어난다. 한국에서도 어떤 계기로 폭발할지 모른다.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차단하지 않으면 심각한 차별이나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표현의 해악은 무엇인가.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우선, 혐오표현은 소수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위를 박탈하는 힘을 가진다. 둘째, 표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나 실질적 차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은 ‘표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혐오표현을 많이 하는 대표적 집단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누리집 회원이 2014년 통일 토크콘서트에서 황산 테러를 한 사건이 벌어졌다. 혐오가 테러로 이어진 것이다. 같은 해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장에서 일베 회원들이 ‘폭식 투쟁’을 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는 자리에도 이들이 등장했다. 인터넷 공간을 넘어 현실사회에도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없던 현상이다. 현실사회로 넘어왔다는 것은 일종의 정치행동을 개시했다는 뜻이다. 현실로 넘어오는 게 처음은 어렵지만 두 번째는 쉽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일베가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였지만, 한번 현실에 나왔던 일베는 어떤 계기를 만나면 다시 정치행위자가 될 수 있다.

“다양한 형태로 진화한 미러링” 외국과 한국의 차이점은 뭔가.

한 사회에서 혐오 문제가 전개되는 양상은 대개 비슷하다. 다만 한국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 더불어 살았던 경험이 적다.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경험을 쌓는 데 방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자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 사회가 아직 이런 상황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기에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혐오 논쟁을 다룬다. ‘맘충과 노키즈존’ , 영화 , 강남역 살인사건, 퀴어문화축제, 메갈리아 등이다. 책에서 다루는 사안은 찬반이 갈리는 문제들이다. 치열한 논쟁으로 서로 설득하고 설득당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누군가를 특정한 공간에서 ‘삭제’하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노키즈존이 대표적이다. 홍 교수는 책에서 “특정 소수자 집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식의 손쉬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인종이나 이주자 이슈가 강한 반면, 한국은 젠더 중심으로 혐오표현이 이뤄지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보면 이주자 혹은 이슬람 혐오가 주된 이슈다. 여성이나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한 나라도 많다. 유럽이나 미국만 해도 성소수자 혐오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전부터다. 아직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한국에선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여성혐오를 남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미러링’도 다뤘다.

미러링 자체는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다수자들이 그동안 해왔던 행동을 거꾸로 생각해보게 해서 충격을 던져주고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미러링의 기본 취지다. 미러링이 혐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선택 가능한 방법이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미러링에 대한 주된 비판은 ‘남성들의 거부감이 크다’는 것이다. 여성혐오 문제 해결의 우군이 될 수 있는 남성을 떨어져나가게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저항하는 여성 주체들의 등장을 유심히 봐야 한다. 실제 미러링으로 여성들이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미러링이 아니었으면 저항하는 여성 주체들이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겠냐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물론 극단적으로 흐르는 양상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여성혐오 문제를 인식한 누군가는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언론 모니터를 하거나 책 읽기 모임을 꾸리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전례 없이 다양한 흐름이 형성됐다. 일부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만 보면서 실패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들이 분명한 메시지 던져야”혐오표현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누구나 혐오에 가담할 수 있다. 전혀 관심이 없던 대상을 특정한 계기로 혐오하기도 한다. 가령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5·18 유공자 때문에 공무원 자리가 없다는 글을 접하면 혐오가 싹틀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면이 있다. 증오 선동은 이런 취약점을 공략한다. 물론 그 대상은 약자나 소수자다. 동남아시아 사람은 혐오해도 백인은 혐오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도 이성애자는 그렇지 않다. 약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차별해도 저항하지 못할 거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한다. 소수자 정체성이 여러 가지가 중첩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기 더 쉽다. 국회의원이었던 이자스민씨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큰 혐오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여성이자 이주민 출신이었다. 만약 여성이기만 했거나 이주민이기만 했다면 그 정도 폭력을 당했을까 생각이 든다.

책에서 정치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치 지도자가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에 따라 혐오세력이 활개를 칠 수도 있고 위축될 수도 있다. 이들을 아예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들을 묵인하는 정치세력을 만나면 힘이 나서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이런 활동을 꾸짖는 이가 많다면 잠잠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일베를 적극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보수 정부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선을 긋지 않았고 심지어 이용했다. 그런 묵인이 혐오세력을 오프라인에 나오게 한 것이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에서 증오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증오범죄가 늘어나고 혐오단체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 지도자는 꼭 직업정치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라면 총장, 회사라면 대표이사 등 한 집단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분명하게 선을 긋고 메시지를 주지 않으면 혐오세력이 고무된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는 추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와 달리 커뮤니티의 지도자들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면 혐오세력은 위축되고, 소수자들은 ‘아직 희망이 있구나’ ‘사회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걸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학 내에서 소수자 혐오 발언이 있을 때 총장이 바로 나서서 “우리 대학은 평등한 대학입니다. 우리 학교에선 그 어떤 차별과 혐오를 용납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나?

홍 교수는 책에서 미국과 유럽의 사례를 여러 번 소개한다. 수정헌법 제1조에 ‘표현의 자유’가 명시된 미국에서는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강하게 제지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미국시민권연맹은 나치 시위대가 유대인 마을에서 행진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 문제를 법의 손에 맡겨놓고 관심을 두지 않는 손쉬운 길이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다. 미국시민권연맹은 “더 적은 표현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 최고의 복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수시로 차별금지에 대해 발언하고, 대학과 기업이 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증오범죄가 일어나면 전 사회가 나서서 반대 입장을 명확하게 한다.

“혐오표현 용납 안 되는 분위기 만들자” 마지막으로 혐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여러 측면의 대응이 필요하다. 가령 소수자에게 폭력을 가하자는 증오 선동은 법적으로 처벌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처벌로 해결할 순 없다. 법적 처벌을 피해 교묘한 형태의 혐오표현이 더 활발해지면 어쩔 것인가. 국가가 혐오표현을 막는 제도를 마련하고 소수자를 지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육이나 홍보를 통해 의식을 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 개인들이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혐오표현을 차단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혐오표현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혐오표현금지법 혹은 차별금지법 제정도 의미 있을 것이다. 처벌 근거가 마련됐다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혐오와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선언이자 상징이 될 수 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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