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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10년 가상역사 ‘만약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지 않았다면


저격이 식민지화를 앞당겼단 주장이 있으나 오히려 독립의식 고취해

제824호
등록 : 2010-08-19 16:10 수정 : 2010-08-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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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 안중근을 묘사한 그림. 한겨레 자료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중국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정부의 실력자인 재무상 코콥초프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취재기자라며 일본 경찰을 따돌린 안중근이 쏜 것이었다.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으며 누가 쏘았느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이토는 중얼거렸다. “바카나야쓰(바보 같은 놈)!” 왜 최후의 일성이 ‘바카나야쓰’였을까? 아마도 대한국 정책에서 온건파를 대표했던 자신이 한국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 것이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 자충수?

1909년 안중근 하얼빈 의거

우리에게는 한일합병의 원흉으로 인식돼 있지만, 사실 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일본의 군부 강경파와 달리 조선에 대해 회유적인 노선을 폈다. 또 당시 일본 제일의 정치적 실력자이자 미국이나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는 비스마르크나 청나라의 리홍장에게 비교될 만큼 존재감이 큰 국제정치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에 소장 개혁세력으로 참여하며 일본 정계에 등장한 이토는 40여 년간 장관·총리·전권대사·정당(입헌정우회) 총재·추밀원 의장 등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 근대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미국·영국·러시아·청나라와의 협상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외교의 틀을 짜고, 일본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일본 현대사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가 일본에서 21년간(1963~84)이나 1천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토의 죽음이 미친 파장은 컸다. 한국 민중은 기뻐했고, 중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고 있던 약소민족은 안중근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며 일본의 팽창정책이 저지당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는 충격 속에 이토와 일본에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례로 친일적 논조를 펴던 영국의 유력지 <타임스>는 이토를 “조선에서 일본의 정책과 통치에 처음으로 융화적 성격을 각인시킨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온건파 이토가 암살된 것을 두고 “잔혹한 얄궂음이 느껴진다”고까지 논평했다. 무엇보다 한일합병 방침을 정해놓고 기회를 엿보던 일본의 강경파는 합병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일본 정부는 강제합병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아예 대놓고 합병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토가 죽은 지 일곱 달 만인 1910년 일본은 영국에 한일합병 방침을 통보하고 8월29일 강제로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보면 온건파 이토의 죽음이 한일합병을 앞당긴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 때문에 일본의 일부 논자들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을 ‘자충수’라고 평가한다. 이토는 한일합병 방침이 일본 정부 내에서 결정되기 전까지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통치하는 것이 경제적 비용이 적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토가 프랑스의 동화주의적 식민통치 방식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하는 영국형 통치 방식을 선호했다는 비즐리 같은 영국 학자의 평가도 있다. 또 한국인으로 내각과 의회를 구성하고 행정과 사법을 일본 정부가 감독하는 자치식민지와 유사한 구상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확실히 이토의 한국 정책은 강제합병을 하고 무단 식민통치를 했던 일본 강경파와는 달랐다.


 

온건파 이토도 병합을 부인하진 않아

그렇다면 일본 정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토가 사살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죽을 당시 69살이던 이토는 10여 년은 충분히 더 살 수 있었다. 호색한이던 그는 건강했다.

우선 한일합병은 조금 늦춰졌을 것이다. 물론 이는 자치식민지로의 합병이 아닌 내정과 외정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정통 식민지’로의 길이 늦어졌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민중이나 관리, 신문기자 등에 대한 연설 등 다양한 자리에서 “병합은 하지 않는다”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런 자신의 입장을 선전하고 한국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복을 입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두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 그의 보호국 구상조차도 식민지배에 필요한 행정·사법기관과 교육기관 설치, 급격한 정세 변화에 따른 방위 비용 증대 등 경제적 문제나 국제 정세 때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통감통치를 통해 식민지배 기반이 마련되고 서양 열강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식민지배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인의 독립투쟁도 그의 노선을 수정하게 한 요인이다. 결국 급격한 정책 전환으로 인한 한국과 세계 열강의 견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속도 조절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뿐이지 합병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7년 이토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오가와 헤이키치는 이토가 합병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 조건 문제를 이야기하며 당장의 한일합병을 반대했다고 전하면서 이를 두고 이토의 ‘점진주의’는 그의 유명한 ‘말려죽이기’ 방침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오가와는 일본 정계의 원로로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이토에게 ‘일한합방건의서’를 제출한 인물이다.

적절한 때를 기다려 한국을 병합한 이토는 식민통치도 좀더 문화적으로 했을 것이다. 강제합병 뒤 육군 출신의 데라우치를 총독으로 임명한 이후 무단통치로 일관해 한국인의 반발을 샀던 군부강경파는 결국 3·1 운동을 불러왔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서구 열강에 대한 지식 또한 풍부한 이토는 아마도 무관 대신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했을 것이다. 헌병경찰 대신 보통경찰을 두었을 것이고, 교사에게 대검을 차게 하는 군국주의 방식보다는 좀더 세련된 형태의 ‘교화정책’을 폈을 것이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1920년대 문화통치 이후 개량주의자가 득세하고 식민지배를 내면화한 자들이 쏟아져나온 것과 같은 효과를 얻었을 것이다. 실제 이토는 을사조약이나 고종 퇴위 강요 때에도 이완용, 송병준 같은 친일배를 키워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일진회 같은 친일단체의 활동도 조장했다. 더 많은 이완용, 송병준, 일진회가 경쟁적으로 배출됐을 것은 자명하다. 물론 한국인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전 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이 1909년 9월1일 남한대토벌작전 때까지 있었다. 이토 역시 항쟁에 대해서는 무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의 무력 진압 뒤에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무식한’ 송병준보다 ‘유식한’ 이완용을 신뢰한 것도 이런 ‘문관적 취향’ 때문이었다.

 

군부 주도의 팽창정책은 바뀌지 않았을 것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직후 일본은 강제병합의 속도를 높였다. 한겨레 자료

세 번째는 이토가 살아 있었다면 일본 군부의 무리한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 개전을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예상이다. 복거일의 역사대체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이토가 안중근에게 피격당했지만 경미한 부상에 그쳐 16년을 더 살았을 것을 가정하고 소설적 상황을 설정한다. 현실주의 정치가로서의 이토는 근대 일본과 동북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은 전세계 역사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곧 일본 군부와 내각의 협조 속에서 국제적 여론을 무마해가면서 만주를 잠식해 동북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치를 구축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 노선을 지켜 큰 번영을 누렸으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이토의 조선에 대한 강력한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돼 한국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식민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란 가정도 나온다.

과연 그럴 가능성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1930년대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세계 대공황이란 조건,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위상 때문에 이토 역시 식민지 팽창정책으로 일관했을 가능성이 더욱 농후하다. 이런 점을 빼더라도 현실 속의 이토는 타협주의자였다. 그는 러일전쟁을 반대했지만 전쟁 분위기가 팽배하자 1904년 총리로서 개전을 결정한 바 있다. 한일합방 시기상조론을 펴던 그였지만 일본 정부가 한일합방 방침을 결정하자 이에 그대로 따랐다. 그가 하얼빈에 간 것도 러시아의 실력자 코콥초프와 한국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내용의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곧 대세가 정해지면 그것을 원만히 진행할 여건을 조성하는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했을 뿐이지 이를 거스르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토가 대외 팽창으로 돌진하는 군부를 통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형이 단기적으로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이나 일본 내 합방 분위기를 고조시킨 면은 있다. 이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열도에서는 메이지 원훈이 살해됐다고 격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복수를 부르짖는가 하면, ‘즉시 합방’을 외치는 과격한 주장이 들끓었다. 그러나 이토 사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내 민심이 환희에 달아오르며 민중에게 독립 의지를 고취한 정도는 그보다 100배 이상 컸다.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안중근만큼 즉각 주목받은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안중근이 처형된 지 3주 뒤인 1910년 4월 국내에서 발행된 <근세역사>는 안중근의 출생에서부터 공판 과정과 사형당하는 순간까지를 기술하며 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1910년대에만 6종의 안중근 전기가 출간되었고 그의 사진과 기념 달력·엽서가 발간되었다. 식민지로 전락해 좌절에 빠진 상황에서 그의 의거는 이를 극복하는 발화점 역할을 했고, 1910년대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 내내 독립운동의 좌표가 되었다.

 

독립파 조선 청년의 역할 모델

구체적으로는 청년들이 안중근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조선 침략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듯 ‘반도의 수뇌자인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이 잇달았다.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항상 칼을 가지고 다니다 일본인 2명을 사이토로 오인하고 찔러 죽인 송학선, 1935년 총독 폭살을 기도했던 조안득 등 다수의 청년은 안중근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안중근의 당당한 처신과 동양평화론에 감명받았다. 1930년 일본의 대표적 정론지 <중앙공론>에는 희곡 <안중근전>이 발표되기도 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인의 식민지배 내면화는 더욱 확산됐을 것이고, 자치론자나 친일파는 더욱 일찍 준동했을 것이다. 안중근의 투쟁은 이토 히로부미의 부재로 인한 무단통치의 가속화를 불러오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이다. 안중근의 투쟁이 가진 커다란 역사적 의미는 그것이었다.

최용범 역사작가

참고 문헌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이성환·이토 유키오 편저, 선인, 2009) <한국사 43>(강재언 지음, 국사편찬위원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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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10년 가상역사 ‘만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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