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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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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신의주를 홍콩처럼 개방했다면



실현되지 못한 2002년 ‘특별행정구’ 계획…

미국의 대북 강경책 약화시키고 남-북-중 잇는 철도 건설로

새로운 물류망 구축했을 텐데
등록 2010-08-13 06:48 수정 2020-05-02 19:26
‘신의주 특별행정구’ 건설 계획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개혁·개방 의지에서 비롯됐다. 신의주를 홍콩 방식으로 개발해 해외 자본과 기술을 활발히 도입하겠다는 취지였다. 연합

‘신의주 특별행정구’ 건설 계획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개혁·개방 의지에서 비롯됐다. 신의주를 홍콩 방식으로 개발해 해외 자본과 기술을 활발히 도입하겠다는 취지였다. 연합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경제개방을 추진했다면,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방된 도시에서 핵의 그림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개방과 핵개발은 상충되기 때문이다. 기회는 있었다. 2002년이다. 그해 7월1일 북한은 경제관리 개선 조처를 발표했다. 제한된 조처였다. 그러나 계획경제를 고수해온 북한 처지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리고 9월 신의주 개방을 발표했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개방 의지였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만약 북한의 발표대로 신의주를 홍콩식으로 개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2002년 9월12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건설 계획 발표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2002년 9월12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건설 계획 발표

‘한 나라 두 체제’식 신의주 구상

2002년 9월12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특구는 입법·행정·사법권을 갖는다. 중앙정부는 외교 업무를 제외하고 일체의 사업에 간섭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검찰과 재판 책임자의 임명 및 해임권까지 주었다. 법률만으로 보면, 마치 중국과 홍콩의 관계에서 보이는 ‘한 나라 두 체제’와 같았다. 그리고 북한은 자신의 개방 의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특구의 법률 제도를 이후 50년간 개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발표를 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의주 경제특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양빈(楊斌) 어우야그룹 회장이다. 당시 양빈은 화훼사업으로 큰돈을 번 젊은 기업인으로 알려졌다. 중국계이지만 네덜란드 국적을 지녔다. 그는 중국에 ‘네덜란드 마을’, 즉 허란춘(和蘭村)을 건설했다. 화훼단지와 고급 아파트가 어우러진 새로운 부동산 개발 방식이었다.

신의주 개방은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어떻게 북한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어우야농업이 평양의 김일성 주석 주검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에 꽃을 제공하면서 북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그는 중국에서 얻은 재력으로 북한에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의주를 홍콩식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북한을 설득한 것도 그였다.

북한도 당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금강산 관광이 안정적 궤도에 올랐고, 개성공단 건설에도 합의했다. 남북관계 발전이 북한의 개방 환경을 조성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또한 ‘접촉을 통한 변화’였다.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경제협력으로 신뢰를 쌓고, 이를 기반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주겠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그런 점에서 북한의 신의주 개방을 환영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했지만, 국내외적으로 북한의 개방 의지를 의심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과거의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미래의 북한에 대한 상상력을 방해했다. 그런 시점에서 북한의 신의주 특구 발표는 당연히 개성공단의 미래에 긍정적 신호로 여겨졌다.

북한 내에서도 개방이 필요했다. 7·1 조처를 통해 제한적이지만 경제정책 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와의 협력이었다. 내부에 없는 발전 동력을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과 기술 도입이 필요했다. 경제특구를 만들어 외국자본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중국의 성공신화에도 자극받았다.

북한 내부적으로 신의주 개방을 적극 검토한 계기도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이었다. 당시 그는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과 회담을 통해 단둥-신의주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귀국길에는 직접 신의주에 들러 신의주와 개성을 중국 상하이 방식을 참고해 경제특구로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2002년에 들어와 남신의주에 주택 건설이 본격화됐고, 공공건물을 짓고, 특구와 외곽지대를 구분하기 위한 울타리 공사를 시작했다.

행정장관 구속·2차 핵 위기로 물 건너가

그러나 새로운 신의주는 실현되지 않았다. 신의주 개방은 ‘해프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의주의 실패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양빈이다. 그의 존재가 신의주 개방에 결정적이었지만, 동시에 실패의 이유도 된다.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양빈이 중국 당국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왜 양빈을 구속했을까? 그때도 지금도 중국의 양빈 구속에 대해서는 억측이 난무한다. 중국이 북한의 경제개방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필자가 중국 단둥에서 만났던 단둥시 관료들은 신의주 개방을 환영했다. 신의주 개발이 접경도시인 단둥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기대감과 자신감이 있었다. 가능하면 부족한 전력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새로운 압록강 다리 건설 계획도 갖고 있었다.

중국이 문제 삼은 것은 신의주가 아니라, 양빈이었다. 양빈의 계획 중 신의주 카지노 사업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양빈의 중국 내 사업이다. 양빈은 화훼산업을 앞세웠지만 고급 아파트 건설로 돈을 벌었다. 후분양 방식인 중국의 부동산 개발은 리스크가 높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지었는데, 그것이 분양되지 않으면 사업은 망한다. 필자도 당시 선양을 방문해서 확인했지만, 양빈의 거대한 규모의 고급 아파트 건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막대한 대출은 지역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고, 양빈의 자금 여력으로는 아파트 건설을 지속할 수 없어 보였다. 선양에는 이미 사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신의주 행정장관 임명이 발표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북-중 관계가 악화됨에도 양빈을 구속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양빈의 구속은 신의주 개방에 직격탄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국제 환경이었다. 2002년 10월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시작됐다. 제임스 켈리 전 미 국무부 차관보를 대표로 한 미국의 대표단은 북한을 방문해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했고, 북한은 자신들의 표현법으로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북한이 의혹을 시인했다고 몰아갔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깨지고 한반도는 다시 격랑에 진입했다. 경제개방은 우호적인 정치·군사적 환경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핵 위기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투자 환경이 조성될 리는 없다. 양빈의 구속이 신의주 개방 실패의 직접적 이유였다면, 2차 핵 위기는 실패의 배경을 제공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파격적인 신의주 개방은 물 건너갔다. 만약에 양빈이 아니었다면? 중국도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의 인사가 행정장관으로 임명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인물을 고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양빈이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행정 능력이 아니라 재력 때문이었다. 자신이 직접 상당한 투자를 하겠다고 했기에,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을 준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과연 북한에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겠는가?

금강산 개방과는 다른 것이다.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금강산 관광을 시작한 것은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었다. ‘고향 사업’으로 시작했고, 남북관계에 대한 사명감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분간 이 사업으로 돈을 벌지 못할 것을 그는 처음부터 알았다. 미래를 내다보고 민족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신의주는 개성공단에 비해 남한 기업에 매력이 덜했다. 처음 북한이 현대에 공단 조성 부지로 신의주를 제의했을 때 망설인 이유가 있다. 북한 지역에 건설하는 공단은 대부분의 설비를 남쪽에서 제공하고 북한에서 생산해 다시 남쪽으로 반입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물류가 중요하다. 개성은 접경지역이다. 신의주는 그런 측면에서 노동력과 산업 인프라를 갖췄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매력이 덜했다.

신의주 경제특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양빈 어우야 그룹 회장이 2002년 9월30일 중국 선양시 허란춘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의주 개발 계획은 그의 구속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연합

신의주 경제특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양빈 어우야 그룹 회장이 2002년 9월30일 중국 선양시 허란춘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의주 개발 계획은 그의 구속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연합

한-중 경제협력 키울 대륙철도의 꿈

북한이 재력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행정장관을 찾고, 구체적인 투자 분야와 협력 방식을 마련하고, 단지 조성과 관련해서 중국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서 북한의 정책 결정 방식의 문제점도 드러났다. 양빈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양빈이 행정장관으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 선양에서의 사업 실패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실무적으로 양빈의 투자 능력을 검증할 수 있었다면, 그런 참혹한 실패는 예방할 수 있었다.

중국은 신의주 개방에 우호적이다. 지방정부의 이익도 있었다. 북한이 당장의 현금보다 중국과의 협력을 우선했다면, 조금 늦게라도 신의주 개방은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과 2차 핵 위기가 심화됐더라도 제한적 개방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김대중 정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네오콘의 강경정책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을 지키고, 개성공단의 끈을 놓지 않고, 철도와 도로 건설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른바 한반도의 격랑과 파고 속에서 평화의 회랑을 건설하고 있었다. 양빈 같은 변수가 아니었으면, 한-중 양국의 공동 노력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의주와 개성이 서로 기대면서 한반도 정세 악화를 방지하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면 신의주 개방이 전면적이든, 아니면 수정된 형태로 추진됐다면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치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각각 개성과 신의주를 거점으로 하는 한-중 양국의 대북 경제협력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퍼주기 이데올로기의 홍보 효과도 반감시켰을 것이다. ‘퍼주기’는 경제협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층의 저주에 불과하다. 경제협력은 일방적 지원이 아니다. 북한에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이익을 가져온다. 신의주 개방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의미한다. 국내의 경계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남북 협력의 필요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신의주 개방이 개성공단의 건설에 주는 긍정적 영향이다. 사실 남북 경제협력과 북-중 경제협력은 서로 보완적 의미도 있지만, 경쟁 관계도 있다.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은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 비교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한국과 중국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중국 중심의 신의주 개방은 개성공단 건설에 긍정적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북-중 경제협력 속도에 자극받아 개성공단 구축에 속도를 냈을 수 있다.

둘째는 남북 철도 연결에 주는 긍정적 효과다. 신의주는 북한과 중국을 이어주는 접경도시다. 신의주는 중국의 노동생산 기지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물류 거점이다. 당시 남북한은 철도와 도로 연결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륙철도의 꿈도 있었다. 러시아와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도 중요하지만, 개성∼평양∼신의주를 거쳐 가는 중국 횡단 철도도 매우 중요하다. 한-중 경제 관계가 날로 확대되는 시점에서 철도를 통한 새로운 물류망 구축은 북한을 중개 거점으로 한국과 중국을 이어주는 중요한 경제협력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신의주 개방은 남북 철도 연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철도가 결국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다시 개방해도 남쪽은 지켜만 보는 신세

그때 신의주 개방은 무산됐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남북 경제협력 없는 북-중 경제협력의 시대가 왔다. 신의주는 조만간 개방될 것이다. 2002년의 실패가 거름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 지켜만 봐야 하는 신세가 됐다. 개성공단의 부진이 더욱 걱정스럽다. 새로운 북-중 경제협력의 시대를 바라보아야 하는 한국 중소기업들의 조바심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다시 북한 붕괴론의 도래를 본다. 북한의 변화 의지는 언제나 의심받고 있다. 북한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대북정책 실패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2002년 신의주를 홍콩식으로 개방하려 했던 북한의 시도를, 환경이 조성되면 북한도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변화를 바라는가? 그러면 변화할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해라.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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