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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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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충돌에 짓밟힌 민주주의의 봄



1968년 청와대 습격·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 도발 없었다면…

남북의 독재체제 완화되고 남쪽 보수 세력도 ‘계몽’됐을 것
등록 2010-12-22 07:28 수정 2020-05-02 19:26

남북관계가 불안하다. 누가 현재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를 실감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평화는 산소와 같아서, 결국 사라지니 귀중함을 알 것 같다. 북한은 해서는 안 될 영토 폭격을 했고, 이명박 정부는 위기를 관리하기는커녕 증폭시키고 있다. 국민이 정부를 불안해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세계는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만 20세기적 전쟁의 공포에 떠는 현실이다. 잠깐의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1968년에도 그랬다. 세계적 격변의 해에 한반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반복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북한 모험주의자들이 꾀한 ‘남조선 혁명’
1968년은 타리크 알리(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좌파 활동가이자 저술가)의 표현대로 ‘세계를 바꾼 해’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복이라고 할까. 근대를 지탱해온 가치들이 무너지고, 탈근대가 시작되는 전환의 해였다. 베트남전쟁은 구정 대공세로 절정으로 치달았고, 2월 베를린, 3월 런던, 그리고 마침내 5월 파리에서 반전 평화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체 게바라가 새로운 대중적 진보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존 레넌은 그해 이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8월21일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현실 사회주의가 더 이상 진보가 아님을, 단지 극복돼야 할 낡은 질서였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서구 좌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 사회주의와 결별했다. ‘신좌파’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세계가 알을 깨는 진통을 겪을 때, 한반도에서도 차가운 평화, 즉 냉전이 요동쳤다. 그러나 전후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몸부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질서로 돌아가고 있었다.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질서 말이다. 1968년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험한 해였다. 북한은 군사국가의 절정으로 치달았고, 남한 역시 냉전반공주의를 내면화했다. 지구 곳곳에서 설 땅을 잃은 냉전의 광풍들이 마치 한반도로 한꺼번에 모여들어 한풀이를 하는 듯했다. 세계적 격변기인 1968년에, 한반도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까?
1968년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이 가장 빈번했던 해다. 간첩 침투나 쌍방 교전의 빈도수를 비교해보면, 그 이전과 이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가 그해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바로 1·21 청와대 습격 사건, 1월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그리고 11월 거의 두 달 동안 계속됐던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북한은 당시 왜 이런 모험주의를 채택했을까? 국제 정세가 북한에 유리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권은 중-소 분쟁으로 분열됐다. 북-중 관계 역시 최악이었다. 이미 1967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김일성 체제를 관료주의로 비판하면서 갈등을 겪었고, 북-중 양국의 국경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북한 내부 정세는 모험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1967년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가 숙청됐다. 이미 국내에서 경쟁 세력이 부재한 김일성 체제는 유일 체제로 가고 있었다. 북한의 군사화 경향은 이미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발표하며 구체화됐지만,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군사적 행동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베트남전쟁 양상은 북한의 모험주의자들이 오판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북한은 이미 1966년 전투기 조종사 50여 명과 군사고문단 300여 명을 베트남에 파견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북한 내에서 일종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리전쟁’으로 인식됐고, 을 비롯한 관영매체는 애국주의를 연일 선동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모험주의자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고, 힘이 분산돼 있으며, 그래서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에 개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한국 또한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약한 고리’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들만의 세계 정세 분석에 따라, 이른바 ‘남조선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오판을 한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북한은 남한에서 이른바 ‘지하당’의 구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예비군 창설, 주민등록 강화, 고교 군사훈련 시작…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북한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 도발이라는 변수를 반공체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했다.<’69 보도사진연감>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북한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 도발이라는 변수를 반공체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했다.<’69 보도사진연감>

북한의 도발은 다양한 방식으로 벌어졌고, 실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처럼 현실적 공포로 작동했다. 당시 120여 명에 달하는 무장 게릴라들은 두 달여 동안 태백산맥을 휘저으며 ‘제한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물론 북한의 도발은 모두 실패했다. 그렇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나 할까. 남한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냉전반공주의는 국가이념으로 자리잡았지만, 북한의 직접적인 군사 도발은 그것이 강화되고 일상화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도발이 박정희 정권을 살렸다는 점이다.

당시 남한의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1967년 6·8 선거는 부정선거로 얼룩져 있었다. 목포에서는 대리투표를 하다 잡힌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고 전북 진안의 투표율은 101.4%였다. 전국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고, 마침내 6월12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야당인 신민당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1967년 말까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정치투쟁이 계속됐다. 마침내 부정이 심한 지역을 대상으로 재선거를 한다는 양보를 여당인 공화당으로부터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상황이 일순간에 변화했다. ‘북한 도발’이라는 외부적 상황 변화가 국내 정치의 대립을 해소해버린 것이다. 곧이어 벌어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수준이 높아졌다. 미국은 사건 초기에 억류된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실제로 군사작전을 검토했다. 이후 미국은 인질 석방을 위해 북한과의 협상을 선택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런 미국의 태도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군사적 보복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도발이라는 공포심을 자극해 국내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1월22일 대간첩 대책본부가 발족했고, 4월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됐으며, 5월10일에는 주민등록증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전의 주민등록 제도는 상대적으로 미비해서 자진 신고가 부실하고, 호적과의 관련 또한 미흡해 국민 통제에 허점이 많았다. 북한의 도발은 주민등록제 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동시에 중·고등학교에 반공 도덕 전담교사를 두게 하는 등 반공교육도 강화됐다. 9월19일에는 서울의 성동고를 시작으로 고교 군사훈련이 시작됐다.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에 ‘적대적 상호의존’이라는 말이 있다. 두 개의 분단국가 각각에서 강경파들이 적대적 관계를 활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1968년은 적대적 의존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북한의 도발이 박정희 정권을 살렸다. 그리고 적대의식은 남과 북 모두에 군사국가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 북한 내부에서 개혁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한에서는 민주주의가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견고해진 유신체제와 유일체제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1월23일 저녁 북한의 서해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한 현황 보고를 받기 위해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에 들어서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1월23일 저녁 북한의 서해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한 현황 보고를 받기 위해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에 들어서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만약 1968년 남과 북이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에서 모험주의 노선이 아니라 다른 노선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체코처럼 말이다. 당시 체코의 둡체크 체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사회주의는 중-소 분쟁이라는 대격변에 진입했고, 친소파와 친중파로 갈라졌으며,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는 독자노선을 선포했다. 체코는 사회주의권의 질서 변화기에 새로운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소련군의 탱크가 프라하의 봄을 앗아갔다. 그러나 만약 북한에서 새로운 개혁정책을 추진했다면, 지리적으로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보나, 쉽게 소련이 개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북한은 중-소 분쟁 국면에서, 스탈린 체제와 유사한 전통 노선을 선택했다. 베트남전쟁 과정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던 한반도에서 그들의 선택은 상황의 산물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독자노선으로 군사모험주의가 아니라 ‘교류협력 정책’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세계적인 냉전 상황 속에서도 교류협력을 추진한 동독과 서독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렇게 했다면 남한의 냉전반공주의도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1968년의 도발이 없었다면 1972년 7·4 공동성명 국면도 달랐을 것이다. 1968년 전쟁 직전까지 갔던 남북관계가 1972년 극적인 대화 국면으로 전환된 것은 미국 닉슨 행정부의 데탕트 정책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증오가 멈추어야 평화가 온다고 했던가. 증오심을 갖고 대화를 한다면 당연히 성과를 보장하기 어렵다. 7·4 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이 합의한 상호 인정과 비방 중단의 원칙들은 결국 ‘1968년 체제’가 만들어놓은 국내 냉전의 두꺼운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짧은 대화 국면이 끝나갈 때, 남북한은 다시 한번 이 국면을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1972년 북한에서는 주석제 신설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있었고,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유일체제와 유신체제, 두 개의 분단국가는 결국 적대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국내 정치의 도구로 활용했다.

또한 1968년은 한국 보수의 성격을 규정해버렸다. 냉전반공주의로 말이다. 서구에서 68혁명은 진보의 진보를 의미하지만, 보수 개혁의 계기로도 작용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던 닉슨이 대통령이 되어 세계적인 데탕트를 추구하지 않았던가. 유럽의 보수당들도 전후 보수의 가치였던 반공이 아니라, 현대적 개념의 보수적 정체성을 새롭게 성찰했다.

그러나 1968년은 한국 보수의 이념을 동결시켰다. 아직도 논리가 막히면 ‘친북 좌파’라는 딱지 붙이기가 횡행하고, 과학과 이성이 아니라 이념을 앞세우는 보수 같지 않은 사람들이 보수의 위치를 오랫동안 차지하게 한 심층의 기억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전히 반공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반근대적 사고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1968년과 같은 적대적 의존이 남겨놓은 유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적대적 의존 관계가 없었다면 한국 보수도 서구의 계몽된 보수처럼 현대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도 달라졌을 것이다. 보수가 정상화돼야 현대적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부패와 무능을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덮어버리는 보수가 아니라, 국익을 우선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서구적 의미의 보수가 존재해야 참다운 민주주의의 경쟁이 가능해질 것이다.

적대적 의존의 시대는 지났다. 현 시점에서 다시 1968년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다. 너무 많이 변한 세월만큼이나 한국이 처한 상황도 달라졌다. 우선 개방경제에서 대책 없는 냉전반공주의를 지속하기 어렵다.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일전불사’를 외칠 시대가 아니다.

공포와 불안의 안보는 지지받을 수 없다

이제 시민들도 적대적 의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한다. 1968년에 남북한의 강경파들은 권력을 얻었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냉전반공주의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일전불사를 선동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시민들은 북한의 도발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누가 북한 체제를 예쁘게 보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전쟁의 공포를 실감하는 현재의 불안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 경제적 수단도 있고 외교적 수단도 있는데, 1968년처럼 군사적 대응에만 집착하는 정부의 안보 능력을 누가 지지하겠는가. 그리고 냉전시대와 달리,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성취했고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졌다. 누구든지 ‘글로벌 시대’를 말한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는가? 1968년 같은 적대적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평화 없이 우리는 미래로 가기 어렵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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