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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10년 가상역사 ‘만약에’

좌절된 좌우연합의 꿈, 흩어져 맞은 독립


식민지 시대 최대 좌우합작 조직 ‘신간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주체적인 독립 역량 키워 친일파 준동과 남북의 독재 막았을 것

제840호
등록 : 2010-12-15 14:39 수정 : 2010-12-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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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는 ‘신간회’라는 조직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회원 250명에 방청인까지 합쳐 1천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였다. 회장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월남 이상재가 추대되었고, 부위원장에는 사회주의자 홍명희가 선출되었다. 대회 분위기는 “투사의 모임에 있는 기분보다 신사의 다과회에 있는 기분”이란 표현에서 말해주듯 엄숙하고 격식이 있었다.

<동아일보> 중심으로 준동한 자치론자들

1928년 진주 촉석루(남장대) 앞에서 신간회 진주지회 회원들과 기념촬영한 신간회 간부들.한겨레 자료

신간회는 어떤 조직이었는가? 이상재와 홍명희의 사상적 배경이 말해주듯 좌우가 합작한 식민지 시대 최대의 항일사회운동 단체였다. 신간회는 실로 ‘최대’라는 수식어에 값할 만큼 대규모 조직이었다. 당시 전국 220개군 가운데 143개군에 지회가 설치되었고, 회원 수는 4만여 명에 이르렀다. 조선뿐만 아니라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에서도 지회가 조직되었고, 여성계에서 자매 조직인 ‘근우회’가 결성되는 등 규모와 영향력에서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단체였다. 조직 구성원도 다양해 유림과 지주부터 노동·농민운동가,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민족대의에 공감하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처럼 성황리에 출범한 신간회는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인 1931년 5월 자진해서 해산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해소’냐 ‘존립’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본래 신간회 해소론자들이 말한 해소는, 조직의 성격과 운영방식 등을 바꾸는 일종의 발전적 해체를 뜻했다. 그러나 이들이 새 단체 구성을 논의하려는 순간, 일제 경찰이 개입해 집회를 중지시킴으로써 신간회의 명맥은 허무하게 끊기고 말았다.

이 거대한 조직이 4년 만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해체되지 않았다면 국내 독립운동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또 해방 뒤 맞은 정국은 어떤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을까?

국내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협동전선 조직 논의는 이미 1926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주의자 일부와 물산장려회 계열의 비타협적인 민족운동 인사가 연합해 만든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가 그 결실이었다. 다만, 이들은 일제가 창립대회를 금지해 정식 활동에 들어갈 수 없었고, 신간회 출범 이후 이에 합류하게 되었다.


신간회 조직의 두 축은 이상재·안재홍·신석우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허헌·한위건·홍명희 등 좌파 사회주의자였다. 이들은 민족단일당 논의가 있은 지 채 1~2년이 흐르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하게 신간회를 탄생시켰다. 여기에는 두 진영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민족주의 진영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자치론자들의 준동에 위기를 느꼈다. 이광수는 1924년 1월 ‘일본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운동하며 조선의 자치를 모색하자’는 ‘민족적 경륜’이란 논설을 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게재했다. 이는 사회주의 진영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자치론은 조선총독부의 은밀한 공작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들은 <동아일보>에 거액의 급료를 지원해주고 이광수를 주필로 입사시켜 자치론의 기수로 활용했다. <동아일보> 쪽의 송진우, 김성수 등과 최남선, 최린 같은 이들도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협력 없이는 조선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들이 자치론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주의 진영은 타협적 자치론자(민족주의 우파)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민족주의 좌파)으로 급격히 분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민족주의 좌파 계열을 넘어 전체 운동 진영에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신간회의 태동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급격히 불 붙었다. 일제 쪽의 자료는 이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26년 말 우연히 평안북도 정주 소재 오산학교 교사로 있던 홍명희는 휴가를 이용하여 경성에 와서 최남선을 방문해 그에게서 자치론자들의 의중을 전해 듣고 서로 자치 문제에 대하여 밤을 밝히며 토의하였다. 다음날 홍명희는 안재홍(당시 <조선일보> 주필)을 방문하고 신석우(당시 <조선일보> 부사장)를 초치하여 대책을 협의한 결과 급속히 진실된 민족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이균영 <신간회연구>에서 재인용)

중국 국공합작 영향으로 좌파도 적극 참여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역시 통일 조직 건설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3·1 운동 이후 급격히 성장한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민족협동전선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운동으로 사회주의자들이 국민당 쪽과 연합해 성공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움직임은 ‘정우회 선언’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정우회란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가 연합해 결성한 사회주의 사상운동 단체였다. 1926년 사회주의는 338개에 이르는 이념 서클이 활동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이 4개 그룹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다. 1926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정우회는 그해 11월15일 유명한 정우회 선언을 한다. 선언문의 요지는 이전의 사회운동을 비판하면서 ‘분파투쟁의 청산과 사상단체의 통일’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협동전선의 전개’ 등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민족주의 세력이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들은 선언대로 신간회 결성 이후 민족협동전선을 위해 과감히 정우회를 해체했다.

양 진영의 이해관계 속에 출범한 신간회는 처음에는 철저한 합법 조직을 표방했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조선일보> 부사장이자 오너인 신석우가 움직였고, 애초 신간회의 명칭을 ‘신한회’(新韓會)로 하려고 했으나 총독부가 허가하지 않자 신간회(고목에서 새 가지가 솟는다는 뜻의 ‘新幹出古木’에서 유래)로 개명했다. 3개항의 강령 역시 애매하고 두루뭉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공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이 역시 총독부를 의식한 조처였다. 물론 당시 민중은 ‘기회주의 일체 부인’이란 항목에서는 자치론자를 떠올렸고, 정치적 각성 등의 문구에서는 민족 독립을 떠올렸다고 한다.

처음 일제는 신간회 활동에 어느 정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물론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가담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지만, 신간회 결성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산발적으로 일어날 민족운동이라면 오히려 한 군데로 모아놓는 것이 감시하기에 편리하다는 점, 신간회 역시 다른 운동단체처럼 내분으로 무너질 것이며 그럴 경우 민족운동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막상 신간회의 활동, 특히 중앙본부와 달리 급속하게 번진 전국 각 지회의 활동에 일제는 크게 당황했다. 신간회는 표면적으로 중앙집행부를 장악한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40여 개에 이르는 지방조직의 회원 상당수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농민·청년 운동조직의 구성원이었다. 그 때문에 일제는 1928년 2월 열릴 예정인 정기대회를 금지했다. 이 대회에서 지역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된 의안들이 토론될 예정이었다. 일제가 내건 금지 이유는 “반항적 기운을 선도하고 민족적 반감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제 방침에 대해 대부분의 지회는 일제의 탄압을 대중투쟁으로 철회시키는 비타협적·전투적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족주의 좌파가 장악한 신간회 중앙본부는 ‘온건화’ 노선을 택했다. <조선일보>계가 주축을 이룬 이들은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신간회 내부에 침투해 있는 공산당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33일간 정간된 상태에 놓여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 경영진에게 일제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총독부는 “신간회에 가입돼 있는 <조선일보> 사원 전원이 탈퇴할 경우 복간을 허락하겠다”고 제안했다. 중앙의 온건화는 이에 수반된 것이기도 했다.

타협적 지도부의 등장이 조직 쇠퇴 불러

1946년 반탁운동 세력이 서울 경교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한겨레 자료

이듬해에도 정기대회가 불허되자 신간회 각 지부는 1929년 6월 인근 지역대표의 대표를 뽑는 ‘복(複)대표대회’를 열어 새 임원을 뽑고 새 규약을 채택했다. 창립 당시와는 달리 상향식으로 모인 의견의 결과는 반수 가까운 사회주의자가 간부로 뽑히고, 역시 사회주의자인 허헌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 시기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인 허헌 체제는 일제 탄압을 더욱 심하게 받았고, ‘민중대회사건’을 계기로 붕괴 위기를 맞았다.

민중대회사건이란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시작돼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타올랐던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된 것이다. 신간회는 진상조사위원을 시위 현장에 파견했다. 이것은 조사만이 아닌 선전 활동의 일환이었다. 경성에서는 민중대회를 열어 제2의 3·1 운동을 기획하려고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 전 이를 파악한 일제 경찰은 일제히 주요 관계자를 검거했다. 이 사건으로 허헌을 비롯한 신간회의 지도급 인사 44명과 조선청년동맹, 조선노동총동맹 등 사회운동 관계자 47명이 체포되었다.

대규모 검거 이후 신간회는 회원 수가 증가하는 등 오히려 조직의 세가 확대되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도부였다. 새로 집행위원장이 된 김병로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운 것이다. 김병로는 최린·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조직으로 삼으려 했고, 당연히 지방의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해소론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30년 부산지회를 통해서였다. 그러자 다른 지회에서도 해소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창립대회 이후 최초로 열린 전체대회를 통해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후 새 단체 조직을 안건으로 해 논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간회는 완전한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간회 해소 이후 전투성을 잃지 않았던 민족주의 세력은 시련의 길로 들어섰다. 대부분이 1930년대 본격적인 친일로 들어섰다. 안재홍 등 지조를 잃지 않던 민족 인사들은 이후 더 이상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개인적 차원의 저항에 그치고 말았다.

사회주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신간회에 참여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던 ‘합법 공간을 통한 영향력 확대’라는 목표를 스스로 박차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사회주의자는 지하로 들어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몰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중과 고립되어 이후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합법 공간에서 역량 키워 해방 준비했을 수도

만약 신간회가 말 그대로 발전적으로 해체돼 반합법적인 ‘민족협동전선’으로 남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균영이 <신간회연구>에서 결론 내린 대로,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사회적 훈련의 도장 혹은 일제 통치 세력에 대한 일정한 압력 수단 단계의 협동전선으로 남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좀 느긋한 상상이지만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으로 주체적인 독립운동 세력을 형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08년 촛불집회가 집단 지성의 운동이듯, 당시 신간회 회원 4만여 명은 이력서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 쓸 수 있는 지식 대중이었다. 여기에 불붙여 합법 공간에서 활성화한 ‘야학운동’을 강화해 학습열이 높은 조선 민중을 민족·민중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합법 공간에서 다져진 힘은 네트워크를 강화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의 실체나 상하이 임시정부의 무기력함, 그리고 김일성의 보천보 신화 등을 깨뜨리며 2천만 대중이 독립을 준비하는 시간과 공간적 여유를 주었을 것이다. 8·15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하지만 신간회란 거대 합법 조직이 유지됐더라면 민중의 준비 상태는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해방 공간에서의 친일파 준동과 좌파의 혼란, 그리고 이승만류 권력투쟁 달인의 권력 쟁취 같은 비극적 장면은 없지 않았을까? 이북 역시 김일성 중심의 권력 지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1930년대의 대공황을 맞이해 후발 제국주의국으로서 일본이 만주와 아시아 침략을 통해 이 상황을 돌파해가려는 상황에서 1945년 해방까지는 너무 긴 기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비극적 상황을 맞더라도 정도를 걸으려는 태도를 견지했다면, 그리고 그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고 강제 해산의 상황을 맞았더라도 그것은 3·1 운동과 1980년 광주항쟁이 남긴 것처럼 우리에게는 큰 자산이 됐을 것이다.

최용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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