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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미군정의 민정장관이 됐다면



민정 추진 최고책임자 존슨과 ‘장관 제안 회동’ 앞두고 암살돼…

‘경제적 안정→정치적 통합→낮은 수준의 통일 국가’ 가능성
등록 2010-09-30 01:55 수정 2020-05-02 19:26
여운형은 좌우합작 세력의 리더였다. 극우·극좌 세력에게 끊임없는 견제를 받고 정치적 고초 또한 겪었지만 여운형은 김구와 이승만을 제치고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얻은 정치인이었다.한겨레 자료

여운형은 좌우합작 세력의 리더였다. 극우·극좌 세력에게 끊임없는 견제를 받고 정치적 고초 또한 겪었지만 여운형은 김구와 이승만을 제치고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얻은 정치인이었다.한겨레 자료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여운형이 탄 차를 가로막았다. 사내 한 명이 차 위에 뛰어올라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총탄은 여운형의 심장과 복부를 관통했다.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던 한지근이란 자의 소행이었다. 해방 뒤 열한 번이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이었다. 그는 끝내 열두 번째 테러에 목숨을 잃었다.

서울 전체가 애도… 고종 장례식보다 성대

그의 장례식을 직접 목격한 이수성 전 국무총리에 따르면, 서울 시내 전체가 애도의 분위기에 잠겼다고 한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는 에서 3·1운동을 촉발한 고종의 장례식이나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보다 여운형의 장례식이 더 성대했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과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여운형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처럼 거대한 애도의 물결을 만들었던 것일까?

몽양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자,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1945년 11월 선구회라는 단체가 서울 시민 2천 명에게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묻는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여운형은 33%의 지지를 받아 21%에 그친 이승만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설문에는 978명 중 195명이 여운형을 꼽았다. 김구나 이승만을 제치고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았던 것이다.

이런 인기의 배경에는 여운형의 화려한 독립투쟁 경력과 특유의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여운형은 자신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형사나 테러리스트까지도 자기 편으로 만드는 특이한 인간적 매력과 도량의 소유자였다.

그는 거칠 것 없는 거인이었다. 30대에는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 지도부와 만났고,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찌민 등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3·1운동에 놀란 일본 정부 수뇌부가 그를 초청해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꾀하기도 했다. 남다른 도량을 지녔던 그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회유와 압박에 시달릴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와 달리 몽양은 도쿄의 제국호텔에 모인 일본 정계와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향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의 연설은 일본과 서구 신문에 대서특필돼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적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이같은 담대함에 일본 쪽 인사들도 기가 질린 듯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의 성향과 대중적 영향력 때문에 조선 총독이나 정무총감도 함부로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몽양은 정세 인식도 빨랐다. 일본이 패망하기 1년 전 이미 해방을 준비하는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조선총독부는 80만 명에 달하는 재조선 일본인과 10만 군대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여운형에게 협력을 타진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협력 요구에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건국사업에 대한 불간섭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이를 관철했다. 건국에 필수불가결한 요건들이었다. 일제가 항복을 발표하자마자 여운형은 안재홍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해방과 건국을 가장 먼저 준비한 여운형이었지만 해방 공간의 3년 동안 극심한 좌우 대립과 미소의 각축, 여러 정치세력의 견제 속에서 끊임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가 당한 숱한 테러는 어쩌면 필연이었다.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하던 그도 결국 극우·극좌 세력의 끊임없는 도발을 끝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47년 여운형 암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47년 여운형 암살

존슨 “한국 지도자들이 중간좌파 여운형 천거”

운명의 날, 그의 승용차 안에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가방이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인민당 관련 문건과 북한 쪽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서류철이 든 가방이었다. 미군정의 3인자이자 민정 추진의 최고책임자인 민정관 E. A. J. 존슨에게 보여줄 문건이었다. 여운형은 그날 오후 존슨의 집에서 비밀회동을 하기로 돼 있었다. 어떤 내용의 비밀회동이었을까? 존슨의 회고에 따르면, 미군정의 실권인 민정장관직을 여운형에게 타진하는 자리였다. 이정식 교수가 발굴한 존슨의 회고록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 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 쪽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모두 무시돼왔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 쪽의 영향을 막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이정식, , 서울대출판부, 2008)

한마디로 이승만과 한민당 등 극우는 세력을 키웠으되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 세력이고, 박헌영 등의 극좌와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간좌파로 대중적 지지가 높은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를 원만하게 이끌어나가자는 것이 당시 미국의 입장이었다. 몽양이 지니고 있던 문서는 이같은 미군정의 구상에 신뢰와 확신이라는 덕목을 부여할 참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운형이 암살되지 않고 민정장관이 돼 실권을 잡았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판이한 행로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전제돼야 할 조건은 있다. 우선 미군정에 부정적이던 여운형의 민정장관직 수락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따져볼 때 여운형은 이 자리를 수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여운형은 남로당 박헌영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둔 상태였다. 나아가 그는 1946년 8월 미군정에 박헌영을 제거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평양을 다녀온 박헌영이 스스로 주장하던 좌우합작운동 노선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이 배신감은 좌파 3당 합당 문제로 더욱 증폭됐다. 여운형이 부재 중인 상태에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남조선 신민당, 여운형이 당수인 인민당 등 좌파 3당의 통합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당수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통합이었다. 이 사건들으로 몽양이 혼신의 힘을 다해 추진하던 여러 구상들은 파산의 위기를 맞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과 건국을 누구보다 먼저 준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여운형이 휘문중학교에서 연 집회에 시민들이 모여 있다.한겨레 자료

여운형은 해방과 건국을 누구보다 먼저 준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여운형이 휘문중학교에서 연 집회에 시민들이 모여 있다.한겨레 자료

친일 부역배 청산, 지금과는 달랐을 것

이제 남은 것은 김규식·홍명희 등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자신이 새롭게 창당한 좌파 계열의 근로인민당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여운형은 이 새로운 좌우합작운동으로써 당시 재개된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미소공위)의 성공을 이끌어내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제안하는 민정장관직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절호의 카드였다. 협상과 담판에 능하던 여운형으로서는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운형이 민정장관직을 맡았더라도 역사의 전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의 행정기구를 장악한 한민당의 방해 공작과 남로당 등 극좌파의 격렬한 반대는 불 보듯 뻔했다. 당시 민정장관은 중도우파로서 좌우합작운동에 나섰던 안재홍이다. 친일 인사가 중심이던 극우 한민당은 안재홍을 몰아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그들은 “1개월이 넘지 않는 동안 이 자를 쫓아내겠다”고 공언했다. 안재홍의 인사권은 이들의 사보타주 속에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친일 경찰과 관료, 정치인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던 안재홍의 정책이 관철되는 순간 자신들의 생명이 날아갈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운형에게 성공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추진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던 안재홍과 달리 여운형은 좌우합작 세력의 리더였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 좌절되기는 했지만 당시 미 국무부와 국방부를 대표하는 한국문제특별위원회는 3년간 총 5억4천만달러 원조안을 승인했다.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이라면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최대 과제이던 농지개혁의 신속한 추진 역시 가능했을 것이다. 여운형이 책임자로 있는 한 적어도 미 군정에서 실권을 잡은 한민당 일파나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가 원조 물자를 착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력도 훨씬 높아졌을 가능성이 컸다. 아울러 통일 문제 또한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물론 소련과 북쪽의 노동당이 여운형을 불신했지만 이승만처럼 극우반공 정권을 수립해 북쪽을 무력으로 통일하자는 단세포적이고도 무모한 주장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좌우를 묶어 세우는 데 혼신의 힘을 바쳤던 몽양이라면 한순간의 불신을 녹이고 낮은 수준에서나마 통일된 국가를 세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친일 부역배 청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정치적·행정적 혼란이 있더라도 최소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강제 해산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수십 년을 끌어온 친일 부역배 처리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나 이에 따른 국론 분열과 해악은 그 강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문제나 식민지 시대 이후 사회 전반의 기풍을 민족·민주적 과제에 따라 엄정하게 확립하는 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하다.

“단독정부 반대세력 묶을 수 있었던 인물”

그러나 이 모든 가정은 여운형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됐다. 그의 죽음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추진력을 잃었고, 미소공위는 결렬됐다. 몽양이라는 거인이 일거에 스러지면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계획은 날개를 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망 이듬해에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은 우리 역사의 미래를 결정지은 크나큰 분기점이자 비극이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여운형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묶어 세울 수 있는 중심축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좌파와 우파, 미국과 소련 군정의 최고위 인사들과도 교류가 가능했던 그의 사망 이후 단독정부 반대세력은 여러 갈래로 분열돼 힘을 상실했다. 해방 공간에서 주요 정치가들이 암살당했지만 여운형의 피살이 아쉽고 가슴 아픈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민족적 분열과 대결을 막는 가장 유력한 방파제의 붕괴를 상징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는 우리 역사가 보여온 그대로다.

최용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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