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000년 대북 쌀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에도 지금처럼 ‘퍼주기’ 논란 속에서 지원…

남북화해는 물론 쌀 파동 막는 효과도 거둔 ‘쌀의 정치’ 되살려야
등록 2010-09-08 02:02 수정 2020-05-02 19:26
남북이 쌀을 나누는 일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1995년 남쪽의 쌀을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수송선. 사진 문화일보

남북이 쌀을 나누는 일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1995년 남쪽의 쌀을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수송선. 사진 문화일보

남쪽은 쌀이 남아돈다. 북쪽은 없어서 난리다. 남쪽은 남아도는 쌀을 처리하기 위해 골치가 아프다. 북쪽은 올해도 심각한 식량 위기가 예고되고 있다. 남는 쌀을 북한 동포들에게 나눠주면 서로 좋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분단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2000년 남아도는 국산 쌀을 지원했다면

10년 전에도 그랬다. 2000년 6·15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는 달라졌다. 그렇지만 대북 쌀 지원을 둘러싸고 ‘우리 안의 냉전’이 터져나왔다. 그때 대북 쌀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어이없는 풍경’이 펼쳐졌으리라. 국내 쌀 재고는 넘치고,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그리고 북한 동포들은 남쪽에 대한 증오를 키웠을 것이다. 쌀을 돼지에게 준다는데, 그런 뉴스를 접하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6·15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2000년 8월 말 평양에서 2차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북한은 100만t의 식량 지원을 남쪽에 요청했다. 그해 북쪽에 가뭄이 들어 식량 사정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는 대규모 쌀 지원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9월부터 실제로 쌀을 지원하는 10월까지 국내적으로 논란이 벌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이 ‘퍼주기’다. 지난 10년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대북 포용정책을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해온 프레임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고집하는 인식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는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대북 쌀 지원을 남북관계 개선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당시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쟁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쌀 지원을 이산가족 문제 해결, 그리고 남북 국방장관 회담의 조기 개최와 연계해서 협상했다. 몇 번의 신경전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협상은 성공했다.

그래서 정부는 10월 타이산 쌀 30만t과 중국산 옥수수 20만t을 차관 방식으로 북한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국제적인 대북 지원을 총괄하는 세계식량계획(WFP)에 외국산 옥수수 10만t을 무상 지원하기로 했다. 북한에 들어가는 식량은 모두 합해 60만t이었다. 금액으로 치면 1억100만달러 정도였다. 차관 조건은 10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이었으며, 이자율은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에 적용되는 연 1%로 정했다. 분배의 투명성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현장 접근을 허용했고, 쌀 포대에는 영어로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을 명시했다.

왜 당시 타이산 쌀을 선택했을까? 국내산 쌀을 지원할 수는 없었을까?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당시 한나라당은 ‘국내 쌀 사정이 넉넉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지원을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정치적 주장이었다. 이미 2000년 말 기준으로 쌀 재고량 예상치는 107만t에 달했다. 쌀 재고는 1996년 24만t(169만 섬), 1997년 49만t(345만 섬), 1998년 79만t(559만 섬), 1999년 71만t(501만섬) 정도였다. 1999년까지만 하더라도 적정 재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0년 하반기부터 국내 쌀 수급에 공급 과잉이라는 빨간불이 켜졌다.

쌀 소비는 줄고, 공급은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내 1인당 쌀 소비량은 1980년대에 연평균 1.1%씩 소폭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는 연평균 2.2.%씩 감소했다. 식생활의 변화로 쌀 소비가 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공급은 어떤가? 쌀 생산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2.7%씩 증가했다. 여기에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로 1995년부터 의무적으로 외국산 쌀을 들여와야 했다. 우루과이라운드 가입국은 10년 동안 쌀 관세를 유예하는 대신 의무적으로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을 수입해야 했다. 1995년 연간 소비량 1%에 해당하는 5만7천t이 들어왔고,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매년 0.25%씩, 이후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0.5%씩 증량해야 했다.

정부의 정책 실패도 한몫했다. 수급 조절 대신, 오히려 쌀의 과잉생산을 부추겼다. 수매가를 예로 들어보면, 1994년 이후 2000년대 초까지 일본은 수매가를 평균 10.3% 인하했고 대만은 동결했는데, 한국은 26.4%나 인상했다. 농민들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벼 재배 면적이 늘어났다. 1997년 105만ha, 1999년 106만ha, 2001년에는 108만ha로 오히려 증가했다. 수매가가 오르면서, 채소나 과일을 심었던 곳에 벼를 재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쌀 주고 뺨 맞았던 김영삼 정부

지금 시점에서 보면, 2000년 당시 이미 국내산 쌀을 지원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당시 대북 쌀 지원에 대한 정부의 원칙은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은 곡물을 구입해 가급적 빨리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을 정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1995년 쌀 지원 사례와의 차별화였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대북 쌀 지원은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재앙’으로 기록된다. ‘쌀 주고 뺨 맞았다’는 말이 그때의 사건을 요약한다. 일본이 대북 쌀 지원 방침을 발표한 시점에서,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김영삼 정부는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서두르다 부실한 협상이 됐다. 결국 쌀을 싣고 간 배에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면서, 국내 여론을 자극하는 등 쌀 지원 과정에서 크고 작은 소동이 발생했다. 사태 해결 과정에서 남북의 불신이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쌀을 주고도 남북관계는 오히려 악화됐다.

1995년 그때, 김영삼 정부는 국내산 쌀을 무상으로 원조했다. 가격으로 치면 2억3700만달러였다. 2000년 보수 야당이 ‘퍼주기’ 주장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1995년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의 식량을 보내려 했다. 그런 원칙이라면 외국산 쌀을 보낼 수밖에 없다. 2000년 당시 국산 쌀은 t당 1500달러 정도였지만, 타이산은 t당 200~250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2000년 당시 정부는 양은 60만t 정도지만, 김영삼 정부 때와 비교해서 비용은 절반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퍼주기 주장에 대한 정부 차원의 논리였다.

2000년 만약에 국내산 쌀을 보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2001년 쌀 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퍼주기라고 비판하던 한나라당이 여당보다 먼저 나서 30만t의 쌀을 북한에 지원해야 한다는 ‘보기 드문 흐뭇한 풍경’이 연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01년 국내 쌀 재고는 적정 재고의 두 배가 넘는 159만t이 되었다. 2010년 지금처럼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나라당에서 대북 쌀 지원을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쌀 재고가 쌓이면 쌀값이 떨어지고, 수매량이 줄고, 수매가도 낮아진다.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진다. 농촌 출신 의원 입장에서는 대북 지원이라도 해서 재고를 줄여야 한다.

2000년 일본의 사정도 비슷했다. 일본은 당시 쌀 지원을 북-일 관계 개선 수단으로 활용했다. 당시 일본도 남아도는 쌀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일본은 2000년 3월 10만t을 지원한 데 이어, 10월에는 50만t을 북한에 지원했다. 3월에 줄 때는 90%를 수입쌀로 구성했지만, 10월에는 100% 일본산으로 보냈다. 자민당 내 농촌 출신인 이른바 ‘농수산족’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다. 풍작으로 쌀값 하락을 우려한 농민을 대표해 농촌 출신 의원들이 보수적 여론을 설득했다. 2000년 10월 당시 일본 정부의 재고미는 75만t 정도였다. 이 중 50만t을 북한에 보내면 재고는 25만t으로 준다. 그러면 국내 쌀 수급에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고 쌀은 쌀 수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보관 비용도 만만찮게 들어간다. 보관료, 금융비용(연 6% 기준), 묵은 쌀의 가치 하락 등을 고려하면 2000년 초 100만t 기준으로 보관 비용은 3150억원에 달했다.

남쪽에서 남아도는 쌀을 동물에게 주는 동안 북쪽은 심각한 식량 위기에 처했다. 지난 7월23일 국제적십자사 사무원이 북한 주민에게 밀가루를 나눠주고 있다. 사진 연합

남쪽에서 남아도는 쌀을 동물에게 주는 동안 북쪽은 심각한 식량 위기에 처했다. 지난 7월23일 국제적십자사 사무원이 북한 주민에게 밀가루를 나눠주고 있다. 사진 연합

쌀지원, 민족에 대한 예의

2002년 8월 국내산 쌀 40만t을 지원한 이유는 국내 쌀 수급 때문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까지 남북관계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매년 30만∼50만t 정도를 북한에 지원했다. 대북 쌀 지원은 그동안 남북관계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핵심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 주민의 보건·영양에도 긍정적 효과를 미쳤다. ‘체형의 분단’을 그나마 최소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쌀 수급에 숨통을 터주었다. 물론 남아도는 쌀 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업정책의 구조 전환이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과도기의 상황에서 대북 지원을 통해 쌀 재고를 줄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10년 만에 다시 ‘쌀의 정치학’이 등장했다. 2008년부터 대북 쌀 지원이 중단됐기 때문에 예고된 재앙이다. 2010년 10월 양곡연도 기준으로 재고미가 149만t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적정 재고의 두 배가 넘는 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지원을 배제하고 남아도는 쌀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그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대책이라고 해보았자 술을 만들고 사료로 쓰는 것이다. 제3세계의 어려운 국가들을 돕자는 주장도 있으나, 가까운 불우이웃을 못 본 체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은 정치를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10년 전 대북 지원이 지금 현안이 되는 이유가 또 있다. 10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이라는 합의에 따르면, 올해부터 북한의 상환이 시작돼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퍼주기라고 그렇게 공격했으니, 이제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돈을 받아내야만 한다. 사실 남북 대화가 유지됐다면 이미 상환 방식을 협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차관 방식이 결국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받지도 못할 거면서 국내 여론을 고려해 형식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아니다. 퍼주기에 대한 국내 여론을 고려한 측면이 물론 있다. 그러나 차관 방식은 북한 역시 동의한 것이다. 2000년 당시 북한 관계자들이 말했다. “체면이 있는데,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형편에서 얼마나 성의를 보일지 몰라도, 북한도 공짜를 원치 않는다. 벌써 10년의 거치 기간이 끝났다. 이제는 비즈니스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가 돈을 받아내는 능력을 보여줄 때다.

그리고 지금 쌀 지원의 효과를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10년 전 쌀을 주지 않았다면 남북관계를 풀지 못했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도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며, 군사 당국이 만나 군사적 신뢰 구축을 논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선전 방송을 철거하고,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협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아돌아 골치를 앓으면서도, 없어서 난리인 동포를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뢰를 쌓을 것인가. 증오를 키우며 현안을 논의하기는 어렵다.

쌀을 풀면 남북 관계도 풀린다

다시 ‘쌀 파동’인가? 해답은 나와 있다. 10년 전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쌀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태풍이 잦다. 이미 북한은 수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하천 인프라가 낙후된 북한의 현실을 고려할 때, 똑같은 비가 와도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인도적 지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국내 쌀 수급이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올해에도 대북 지원을 하지 않으면, 재고량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날 것이다. 더 이상 쌓아둘 창고도 없다. 마지막으로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11월이 되면 주요 20개국 정상회담(G20)을 치러야 한다. 국제사회에 긴장의 한반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한반도의 평화 환경을 조성하고,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우선 대북 쌀 지원부터 해라. 그래야 남북관계가 풀린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