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15일 저녁, 기자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몰려든 가운데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져… 1월14일 오전 8시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었다. 10시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옆에 서 있던 박처원 치안감이 말을 덧붙였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건강한 청년이 으름장 한 번에 그냥 숨이 넘어갔다는 이 삼류 개그 같은 발표가 나오자 곧바로 의혹이 들끓었다. 야당과 재야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정부·여당도 이를 일단 수용해 경찰에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의혹의 중심이 되고 있던 경찰 스스로가 진상조사를 한다는 점이 미덥지 않았지만 박종철을 부검한 황적준 박사가 “쇼크사라는 경찰의 주장과는 달리 흉부압박에 따른 질식사로 판단된다”는 소견을 검찰에 밝힘으로써 고문 사실 자체의 은폐는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1월19일에 다시 한번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진상’을 발표했다.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물고문을 당했으며 그 도중에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상부의 지시는 전혀 없었고,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두 경찰이 멋대로 벌인 일에 박종철이 그만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었다.
고문이 자행되었음이 인정된 이상 야당과 재야는 강도 높게 정부를 비난하며 강경 투쟁에 나섰고, 경찰 발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며 국회에서 국정조사권 발동 결의안을 냈다. 정부가 2월7일의 추도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김영삼·김대중·함석헌·고은·송건호 등을 가택연금하고 추모 인파를 강제 진압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김대중은 경찰이 둘러싼 자택에서 “추도식조차 하지 못하게 막는 정권이 어디 있느냐? 이제 국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한다”고 격분했다. 부산에서는 추도식을 준비한 혐의로 노무현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숨길수록 부푸는 의혹, 6월 항쟁의 시작
한 젊은 생명을 고문이라는 방법으로 죽여놓고도 이를 은폐하려 했고 말단 경찰 두 사람만의 책임으로 몰아가며 추도식조차 금지하는 정권을 향한 분노와 혐오가 날로 더해가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 내에서는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이 이끄는 세력과 여당에 호의적인 세력 사이의 다툼이 심해졌다. 마침내 4월9일에는 신민당을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는 두 김씨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4월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 논의를 올림픽 이후로 연기한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존 헌법의 간선제,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은 더욱 커다랗게 부풀어 손만 대면 터질 지경까지 갔다. 마지막으로 ‘손을 댄’ 쪽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5월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축소·조작되었다. 지금 구속된 경찰관들은 종범에 불과하며, 현장에는 상급자 세 사람(황정웅·반금곤·이정호)이 더 있었다”는 폭로를 한 것이다.
잦아드나 싶던 박종철 고문 사건이 다시 폭발했고, 정부는 다시 한번 진화에 나서 “경찰관들끼리 축소 모의를 한 것”이라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더 윗선에서 조작 지시가 내려졌을 것”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수사팀을 교체하고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에게서 빗발쳤다. 결국 5월29일,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이 은폐와 축소 과정을 지휘했으며 처음 범인으로 구속된 두 경찰에게 죄를 뒤집어쓰는 대가로 1억원의 돈을 안겼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박처원 등은 이때 구속되고, 훗날(1988년 1월) 황적준 박사에게도 은폐 압력과 뇌물 공세를 가했음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쇠고랑을 찬다. 또한 정부는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정호용 내무장관을 퇴진시키며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미 둑은 터진 뒤였다. 야당과 재야는 여당인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게 돼 있던 6월10일을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날로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6월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정부는 사건을 세 차례나 은폐·축소하려 하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고, 젊은 넋의 억울한 희생과 거듭된 비열한 조작은 그때까지 대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을 ‘좌경용공’으로 몰던 정부의 선전에 얼마간 수긍해온 일반 민심을 투쟁 대열로 이끌었다. 실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없었다면, 또는 묻히고 말았다면 ‘넥타이부대’가 학생들과 나란히 최루탄 속을 뚫고 거리를 달리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일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알력 다툼하다 ‘어설프게’ 사건 은폐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왜 ‘독재정권’은 이 사건을 효과적으로 은폐하지 못했는가? 또는 어설프게 대응해 오히려 반발이 커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가?
보통 몇몇 사람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사건이 묻히지 않았다고 이야기된다. 심장마비로 처리하라는 압력에도 부검한 그대로의 소견을 밝힌 황적준 박사, 초기 수사 과정에서 경찰의 은폐 시도를 차단한 안상수 검사, 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옥중의 몸임에도 그것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제보한 이부영씨,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등. 분명 그들은 위대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유신에서 5공까지 군사정권은 동베를린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민청학련 사건, 최종길 서울대 교수 사망 사건, 재일동포 간첩 사건 등에서 사건 진상 은폐에 성공해왔다. 시국사건 용의자를 고문하는 일도 흔했다. 박종철 사건 규명의 일익을 담당한 안상수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시국사건으로 죽어간 이들은 모두 의문사로 처리되어 묻혀버렸다. 그 때문에 시국사건 수사관들은 고문을 하거나 고문으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안기부, 경찰 대공분실, 보안사 등에서는 정권 유지에 방해되는 사람을 불법으로 구금하고 거리낌 없이 고문해왔다.”
그런데 박종철 사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황적준 박사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까지 박처원 치안감 등에게서 조작된 결과를 발표하라는 집요한 강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고문 사실이 밝혀져도 괜찮다’는 통보가 내려와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옥중의 이부영씨에게 사건 조작 내역이 알려지고, 그것이 무사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서슬이 시퍼런 독재정권하에서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야당은 1985년 이후 직선제 개헌을 강력하게 주장해왔고, 여당은 개헌은 수용하되 내각제로의 개헌을 추진해 정국이 계속 경색되고 있었다. 여당은 인물 싸움이 되는 직선제 개헌은 두 김씨에 맞서 여당이 이기기 어렵지만, 총선 다수당이 권력을 쥘 수 있는 내각제라면 관권선거와 안보 장사 등을 통해 승산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었다. 직선제 개헌으로 설령 여당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당시 집권자인 전두환의 실권 상실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리고 누가 전두환을 계승할 것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는 전두환의 육사 동기이며 12·12의 동지인 노태우 민정당 대표였다. 그러나 전두환이 차기 정권에서도 실권을 이어나가기 위해 ‘심복’에 해당하는 다른 사람을 은근히 밀고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그렇다면 장세동 안기부장이 유력했다.
1987년 당시 여권 내에서는 두 진영 사이의 알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는 대야 협상에서 내각제 개헌을 이끌어냄으로써 차기를 굳히려 했다. 사실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중이었다. 이철승·이택희·이택돈 등은 두 김씨 세력이 주류인 신민당에서 친여 성향의 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1986년 12월24일 ‘이민우 구상’이 터져나왔다. 신민당 총재로 직선제 개헌안을 계속 지지해온 이민우가 지방자치제 실시와 구속자 석방 등을 전제로 “내각제 개헌에 합의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쳐 곧바로 무산됐지만, 그대로 협상을 계속하다 보면 야당이 내각제로 돌아설 수도 있음을 내비친 사건이었다.
그런데 마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이는 야당이 강력한 대여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안이었고, 그러면 개헌 논의는 물 건너가고 만다. 그리하여 노태우를 견제하려는 쪽에서는 이를 은폐하지 않고 적당히 공개함으로써 대야 협상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닐까? 사건 직후 소집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사실상 안기부가 주도했다는 데서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박종철 사건은 점점 격화되면서 반대로 장세동 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건이 한 차례의 진상 발표로 잠잠해지지 않고 추가 폭로가 거듭되며 안기부의 공작 능력이 불신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5월26일 개각 때 노태우 진영에 서 있던 정호용 내무장관이 장세동까지 경질되도록 강력하게 주장했음이 나중에 알려졌다. 그는 “입막음을 위해 주었다는 자금 1억원은 안기부 돈이 틀림없는데, 안기부장이 면책될 수는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죽은 박종철은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던 여당의 공든 탑에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켜 산산이 날려버렸다. 일반 국민과 학생과 재야, 야당이 하나 되어 대여 투쟁에 나섰고, 그동안 여야 사이에서 양비론으로 일관하며 은근히 여당을 옹호해온 보수 언론도 정부 비판을 본격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계 역시 정권을 외면했다.
비판하는 국민 무력 진압하겠다?6월 항쟁 당시 집권 세력은 무력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미국 대사와 재계 대표들이 비밀리에 정부 고위층과 만나 “무력 진압은 안 된다. 서울올림픽이 코앞인데 서울을 1980년 광주처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설득 내지는 압력 행사를 했다고 한다. 결국 정권은 6·29 선언으로 국민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한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에서 비롯된 일이다.
박종철이 대공분실의 욕조에 목이 눌려 죽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죽음이 예전처럼 묻히고 말았더라면, 1987년의 정치 일정은 여당의 계산에 따라 돌아갔을 것이다. 여야가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고, 이에 반발해 탈당한 소수 야당 세력을 제외한 여당과 친여적 야당 사이에 일종의 ‘보수대연합’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이들은 반대 세력을 좌경 용공으로 밀어붙이는 한편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해 일반 국민의 민주화 의지를 불식시켰을 것이며 곧이어 실시된 지방자치제에서는 지역감정이 불거짐으로써 전체적인 정국은 1990년 3당 합당 직후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더욱 기만적이고 정의를 찾을 수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막후의 실권자로서 덩샤오핑이나 가네마루 신처럼 여전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고, 체제는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 정권과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야만적으로 탄압되고, 일반 국민은 정치에 흥미를 잃어버린 채 돈벌이와 유흥에만 탐닉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박종철 사건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실로 한 알의 밀알이 피에 젖은 채 땅에 떨어져, 민주주의의 거대한 나무를 자라나게 한 것이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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