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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보복-응전-전면전’으로 치달았을 가능성… 통제 불가능한 상황 막으려 미국이 군정을 실시했을지도
등록 2010-05-07 15:00 수정 2020-05-03 04:26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는 현대사에 비극의 한 장면으로 남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안정에는 적잖은 도움을 줬다. 테러 직전 아웅산 묘역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장관들. 연합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는 현대사에 비극의 한 장면으로 남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안정에는 적잖은 도움을 줬다. 테러 직전 아웅산 묘역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장관들. 연합

“쾅!”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23분, 버마의 수도 랑군(지금의 양곤)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묘소의 지붕이 산산조각났고, 자욱한 연기와 먼지 속에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울렸다. 한국 대통령을 태운 리무진은 현장 도착까지 5분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다급하게 차를 돌렸다. 잠시 뒤, 얼굴이 사색이 된 경호원이 달려와 장세동 경호실장에게 보고했다. “죽었습니다. 모두, 모두 다··· 죽었습니다!”

<font color="#00847C">전방 찾은 전두환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font>

‘아웅산 묘지 폭파 사건’은 건국 이래 대한민국 대통령을 노리고 벌어진 암살 기도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다. 해외, 그것도 버마의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산이 묻혀 있는 성역에서 벌어졌다는 점, 비록 ‘실패’했지만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버마인 4명 포함), 부상자가 46명(버마인 32명 포함)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6개국 순방에 나선 길이었으며, 버마는 그 첫 순방국이었다. 버마는 한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나라였다. 이 사건이 터지고서야 비로소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표면상 중립을 표방했지만 북한과 친근한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지자마자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우리 쪽 주장에 대해 버마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고, 남한의 반정부 세력이 벌인 테러가 아니냐며 반문했다. 남한 쪽 자작극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묘역에서 나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는데, 나팔수들을 조사해보니 “한국의 경호원들이 나팔을 불라고 하기에 불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 직후 검거된 용의자들을 수사하던 버마 경찰은 10월17일 중간보고에서 이들이 북한 공작원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후 11월4일 최종 수사 발표를 거쳐 11월6일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는 버마의 조처가 있었고, 범인들은 12월9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진용진은 1985년 처형되고 강민철은 2008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서둘러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은 10월10일 공항에 내려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며, 반드시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냈다. 그리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비상국무회의와 국정자문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한 응징’의 기세는 줄고, 외교적 수단으로 대응한다는 쪽으로 입장이 정리됐다. 당시 군부에서는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전면전을 벌이든지 최소한 우리도 암살단을 보내 김일성을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상부의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병사들을 완전무장시키고 북진할 준비를 마쳤으며, 최근 밝혀진 대로라면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하는 장교집단이 ‘벌초계획’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우고 모의훈련까지 마친 다음 대통령의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특수부대 30명을 평양에 투하해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반발에 그는 직접 전방 부대를 찾아다니며 지휘관들을 설득 내지 위협했다고 한다.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10월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font color="#C21A8D">남북 모두에 오히려 전화위복</font>

이처럼 사상 초유의 테러 피해를 입고도 당시 한국 정부가 예상보다 온건하게 대응한 배경에는 미국의 태도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전투 준비 태세를 의미하는 데프콘3을 발령하고, 7군 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포함한 공군 세력을 한반도에 급파하는 등 상당한 대응 조처를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워커 대사를 비롯한 여러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무력 대응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취한 조처 역시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미국 국가안보회의 소집),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데프콘3보다 한 단계 높은 데프콘2 발령) 때에 비하면 강도가 약했다. 미국이 직접 연루된 사건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우방국 국가원수가 암살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각료 다수가 살해됐어도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질적인 대응 조처를 취할 뜻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굳건히 다짐으로써 한국의 불안을 무마하고, 차제에 한·미·일 삼각 방위체제를 강화해 동북아시아에서 신냉전 구도를 확립하려 했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공산 진영과 맞서는 자유 진영 국가로 한 배를 탄 셈이었으나, 영토와 역사 문제 등으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10월28일 한국 정부가 한·미·일 군사 안보 체제를 새롭게 추진한다고 발표했고, 일본도 공직자들의 북한 방문을 불허하고 제3국에서의 외교 접촉을 중지하는 등 어느 때보다 강경한 대북 조처로 화답했다. 또한 미국은 해외 전략상 한반도를 2급에서 1급 중요 지역으로 격상시켰다. 2급은 재래식 전력에 의해 방어해야 하는 지역이며, 1급은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방어할 지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11월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함으로써 박정희-카터 사이에서 한껏 냉랭해졌던 한-미 관계가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음을 과시했다.

국내적으로도 아웅산 사건은 정권에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1983년은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억눌렸던 정치의식이 정권 전복 직전까지 달아오른 시기였다. 1982년 ‘장영자 사건’으로 초대형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으며, 1983년 초에는 김영삼의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이 20일 동안 진행되는 등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의 공격으로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다시 얼마 뒤 아웅산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 괴뢰집단의 국가 전복 음모’가 현실적으로 와닿는 분위기에서 독재의 불편함이 잠시나마 잊히고, 다시 한번 ‘반공으로 총화단결’하는 분위기가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 테러의 ‘실패’로 북한은 버마를 비롯해 제3세계 여러 국가에서 국교 단절 및 외교적 비난 조처를 당했다. 따라서 1970년대 말부터 군사·경제·외교력에서 남한에 추월당한 초조함 때문에 전세를 만회하고자 벌인 테러의 결과 북한이 오히려 전보다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됐다고 흔히 이야기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냉전이 다시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차피 북한에는 모호한 제3세계의 지지보다 소련·중국의 확고한 지지가 더 아쉬웠다. 아웅산 사건으로 한·미·일 안보체제가 강화된 것은 다른 한편으로 북·중·소의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계기도 됐다. 또한 당시 북한은 1980년을 전후해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에 부심하고 있었지만, 1978~84년의 제2차 7개년 경제계획이 사실상 실패함에 따라 내부적으로 상당한 체제 불안 요인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웅산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북한의 내부 결속이 다져진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 테러가 ‘성공’했다면, 다시 말해서 전두환 대통령까지 아웅산 묘소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남한의 보복 조처에 뒤이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발발이다. 아웅산 사건 이후 대통령이 전방 부대 지휘관들을 무마하는 게 힘겨웠다고 했음을 볼 때, 대통령마저 사망했다면 ‘보복-응전-전면전’의 가능성이 꽤 높았으리라 추정된다.

아웅산 테러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호한 응징을 천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온건한 대응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 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아웅산 테러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호한 응징을 천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온건한 대응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 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font color="#008ABD">제2의 12·12 일어나지 않았을까</font>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국의 대북 자세는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보인다. 미국의 직접 피해가 없는 상황에서 동북아에서 국지전에 말려들고 나아가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을 미국이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살해된 것과 각료들만 희생된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독재체제의 구심점이 갑자기 사라지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부대는 무력 행동에 나서고,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을 김상협 국무총리의 민간인 내각은 이를 저지하려 하고, 김영삼 등 재야 인사들은 이를 문민정권 회복의 기회로 삼으려 움직이는 상황. 이런 대혼란 속에서 제2의 6·25는 아니더라도 제2의 12·12가 일어나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기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10·26으로 갑작스레 군사정권의 상징이 사라진 상태에서 문민화 움직임을 꺼린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것과 유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났을 수 있다.

이때 미국은 5·16이나 12·12 때처럼 방관자로 남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을 수 있다. 남한 내부의 정변이 아니라 북한의 ‘공격’에 의한 남한의 혼란인 이상, 한반도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사실상의 군정을 실시하려 들었을지 모른다.

결국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남한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의 움직임이 숨가쁘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더해볼 수 있다. 과연 그것뿐일까? ‘만약의 만약’은 불가능할까?

알려진 대로라면 전두환 대통령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암살을 모면했다. 본래 버마 순방 일정은 일주일을 앞두고 미중앙정보국(CIA)의 통보를 받고 갑자기 수정됐다. 원래는 버마에 도착한 10월8일 밤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게 돼 있었는데, 그대로 진행했다면 각료들과 동시에 대통령이 현장에 도착함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튿날인 9일 당일에도 본래는 대통령이 조금 더 일찍 현장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우치 라잉 버마 외무장관이 17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각료들이 먼저 묘소로 향했던 것이다. 라잉 장관은 “집에서 TV를 보다가 늦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당시 버마에서는 전력 부족 때문에 아침 방송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범인들은 일찌감치 현장에 폭탄을 설치한 뒤 상황을 보고 원격조종으로 폭탄을 터트렸는데, 어째서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트렸는지가 의문이다. 이는 당시 먼저 도착한 각료들이 단상에 도열해 있는 상황에서 이계철 버마 대사가 차를 타고 도착했고, 그를 전 대통령으로 오인한 범인들이 격발장치를 작동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과연 이처럼 중대한 테러를 저지르면서, 목표물인 전 대통령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을까? 또 영빈관에서 전 대통령이 탄 차가 출발하는 상황을 지켜보지 않은 이유는 뭘까?

물론 지나친 의심은 금물이다. 비록 아직까지 북한이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범인은 북한 공작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대통령이 일부러 자신의 각료들을 폭사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font color="#A341B1">1983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font>

그러나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북한이 목표를 ‘남한 대통령 제거’에서 ‘남한 대통령 제거를 노린 듯한 대규모 테러’로 바꾸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시도해 ‘성공’했다면, 북한으로서도 그 결과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한에 더욱더 강경한 정권이 들어서거나 미국이 군정까지 실시하는 상황이라면 북한의 안보가 크게 흔들린다. 애초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이 북한의 목표였다면, 그렇게까지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실패’한 아웅산 테러만으로 충분히 목표가 달성된다. 당시 분석은 ‘북한이 전 대통령을 제거하고 전격 남침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한과 미국의 데프콘3에 대응해 경계태세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남침을 준비하는 듯한 무력 동원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상력은 그만 접더라도, ‘북한의 일방적 무력 도발’ 가능성과 그 앞에서 먼저 미국의 눈치부터 살펴야 하는 우리 처지는 1983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정치적·군사적 사건의 대응에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익에 따라서 대응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본 구도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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