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27일. 하루도 빠짐없이 거리가 최루탄에 뒤덮이고 언제 군대가 투입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정국이 6·29 선언으로 안정을 되찾은 지 넉 달이 지났다. 그사이 어김없이 대선 국면이 찾아왔다. 정부·여당이 정해놓은 후보가 뽑히게 돼 있는 눈 가리고 아웅식 ‘체육관 선거’ 대신, 새로운 헌법에 따라 16년 만에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12월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6·29 선언을 들으며 환호했던 국민은 선거에서 군부세력이 물러나고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YS와 DJ 가운데 과연 누가?’
결정적 결별 계기 ‘10·27 고려대 토론회’하지만 그리 심각한 의문은 아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존경받는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불세출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인 두 사람 중 누구든지 야권 후보로 출마하면 여당 후보인 노태우를 제칠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언론에 환한 웃음을 보여주던 그들이었건만, 점점 서로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고 메말라지더니 급기야 공식 석상에서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통일민주당 안에서도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27일 고려대 시국토론회는 그래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국민은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토론회에 나타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자못 싸늘했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굳은 얼굴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연사의 연설이 끝난 뒤 마침내 김영삼·김대중의 연설이 차례로 진행될 순서였다.
먼저 단상에 오른 김영삼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국 상황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나갔다.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김영삼 본인에게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특정 정파의 보스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지만,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두 김씨의 존재는 거의 신성한 것이었다. 둘 중 한쪽을 지지하는 사람도 다른 쪽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이 연설 한마디를 끝낼 때마다 청중은 야유와 조롱을 보냈다.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도 터졌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청중이 항의하려 했지만 기세에 압도됐다. 마침내 연설을 마친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 정문을 나가버렸다.
이어 검은색 두루마기 차림의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토론회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으로 여유 있게 연설을 마쳤다. 뒤이어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져 땅거미가 내리는 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했다. 마치 대통령 당선 축하 행진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김대중은 외쳤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987년 11월12일, 김대중을 총재이자 대선 후보로 하는 평화민주당이 창당됐다. 김영삼 쪽에서는 즉각 김대중 진영을 맹비난하고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이렇게 보면 단일화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김대중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면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고려대 시국토론회 직전, 재야의 단일화추진위원회는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 전 민주당 대표는 이렇게 술회했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재정권이 덧씌운 멍에이지만 김대중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후보도 당권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선 결과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두 김씨는 그래도 자신이 이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특히 김대중은 “단일화보다 오히려 각자 출마가 더 승산이 있다”는 묘한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4자 필승론’에 따르면, 만일 김대중이 단일 후보로 나오면 수도권과 호남은 석권하겠지만 영남의 표가 노태우에게 집중되면서 승패를 알 수 없게 된다. 김영삼이 단일 후보라도 영남표를 노태우와 나눠먹고, 수도권과 호남에서는 ‘집권당 프리미엄’(당시만 해도 선거마다 무조건 여당을 찍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통했다) 때문에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런데 김종필을 포함해 모두 네 사람이 동시에 출마하면 영남표는 김영삼과 노태우가 나누고, 충청표는 김종필이 가져간다. 그러면 수도권과 호남에서 몰표를 얻을 게 분명한 김대중 자신이 최다 득표로 당선된다는 계산이었다.
선거전이 격화되며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렸다. 광주에서는 김영삼에게 달걀이 날아들었고, 김대중도 부산 유세 때 곤욕을 치렀다. “누구는 김일성에게 지령을 받는다더라” “누구는 숨겨놓은 딸이 있다더라” 이렇게 치졸한 흑색선전까지 나돌면서, 한때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던 두 김씨의 위상은 빠르게 추락해갔다.
지역주의·권위주의 병폐 청산할 기회였건만이윽고 12월17일, 조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났다. “노태우 후보 당선 확정”. 최종 득표는 노태우가 전체의 37%인 828만여 표, 김영삼이 633만여 표, 김대중이 611만여 표, 김종필이 182만여 표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를 합치면 55%를 넘었으나, 승리는 12·12와 5·17의 주역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성사 직전까지 갔던 후보 단일화가 정말 성사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두 사람 중 누가 단일 후보가 되었다 해도 거의 확실히 당선됐을 것이다. 설령 집권당이 대대적 부정선거를 꾸미거나 패배 이후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해도, 열화와 같은 국민적 저항 앞에 분쇄됐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연대가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 김영삼이 후보를 확보해놓고도 포기하려 하지 않아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문제의 ‘당권’은 공천권과 직결된다. 따라서 당권을 쥔 쪽에서 자기 계파에 유리하게 공천하려 했을 수 있고, 반대로 당선자는 차기 대선 후보를 자기 계파에서 내고 싶어했을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 김종필이, 2002년 선거 직전 노무현과 정몽준이 결별했듯 일단은 한 배를 타기로 한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이 결국은 어느 시점에서 갈라졌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군부세력의 잔재는 청산됐을 것이다. 야당의 팔을 묶은 상태에서 여당 프리미엄을 누리며 지내온 그들은 민주화된 정치무대에서는 자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참신한 소장파도 없이 과거 정권의 비리 색출과 처벌 국면을 맞았을 그들은 공중분해돼 정계를 떠나거나, 보잘것없는 소수당으로 연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과 다른 김씨가 이끄는 민주정당, 또는 두 김씨가 각각 이끄는 민주정당이 정국을 주도하며 1990년대의 한국정치사를 써나갔을 것이다.
만약 1987년 선거 당선자인 김씨가 다른 김씨에게 차기 후보를 넘겨주기 꺼렸더라도, 어차피 인물 싸움인 대선의 성격상 그 다음인 1992년 선거의 당선자는 다른 김씨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 김씨가 1987년에서 1997년까지 10년 동안 차례로 대통령을 지내며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해나가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실제 두 김씨가 집권한 역사상의 ‘1992년부터 2002년까지’의 10년과 어떤 차이를 가져왔을까?
1990년대는 범세계적으로도 민주화와 사회주의권 몰락의 시대였다. 1987년 아무 흠이 없는 민주정권이 수립돼 88올림픽을 개최했다면,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모범국가로서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소련이라는 버팀목을 잃은 북한이 민주적 정통성이 뚜렷한 남한 정부가 내민 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1990년대 중반부터 핵개발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암울하게 뒤덮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과거사 청산과 재벌 개혁,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등 개혁정책이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추진됐을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후보 단일화 실패를 계기로 본격화돼 오늘날까지 한국 정치를 후진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여러 병폐들, 즉 ‘지역주의’ ‘인물정치’ ‘권위주의 시절에의 향수’ 등이 발붙일 공간도 협소해졌을 것이다.
민주화 진영 자중지란이 ‘독재 향한 향수’로선거 때마다 탈당·분당·창당·합당이 어지럽게 이뤄지며, 이념과 정책은 팽개친 채 특정 인물의 이미지만 걸고 선거가 치러지는 나라. 그리고 그런 민주화운동 세력의 행태에 진절머리가 난 국민은 “차라리 박정희나 전두환이 낫지 않았나? 그들은 이렇게 좀스럽게 정치하지는 않았다. 이토록 시끄럽지도 않았고···”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되었다.
1987년을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구세력이 육체뿐 아니라 정신으로도 살아남아, 21세기에도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1987년의 가을에 두 사람이, 아니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양심에 따라 행동했더라면, 또는 진정으로 마음을 비웠더라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국민이 숙명처럼 지고 갈 이유가 없는 두억시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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