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977년 임시행정수도 계획 실현됐다면


3부 기관 옮겨간 새 수도에서 올림픽도 개최?…
정권의 일방적 육성으로 인프라 부족 등 한계 맞았을 수도
등록 2010-01-21 06:25 수정 2020-05-02 19:25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 1977년 임시행정수도 계획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7월20일, 대전 리베라호텔에서 국가 균형발전 관련 오찬간담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가장 먼저 화제에 올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그는 ‘묘한 기분’이라는 표현을 썼다.

노 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계승하는 사업”

“저는 박정희 정권을 계속 반대해왔던 사람입니다. 특히 유신헌법, 그리고 유신헌법 직전의 선거, 군대 있을 때인데 다 반대투표했다가 군대에서 기합도 받고, 공개투표인데 반대투표를 했으니 기합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특유의 솔직담백한 화법으로 박 전 대통령과의 악연을 고백한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저는 또 그분의 업적을 전혀 무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상당한 업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 정부가 하는 일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을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오늘 이 사업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계승’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치켜세운 박 전 대통령의 계획은 뭘까? 참고로 이날 노 전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기공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직전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이날 겨우 빛을 볼 수 있었다. 그사이 이름도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뀌었다. 임기 7개월여를 앞두고서야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노 전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날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일이다.

1977년 2월10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시 연두순시에 나섰다. 구자춘 시장과 하점생 교육감의 시정방향 보고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의 지시사항 전달이 이어졌다. 서울시 인구 억제와 도로 확충 등 현안을 언급한 그는 “다음은 임시행정수도에 관해서입니다”라며 말을 꺼냈다. 충격적인 발표였다. 행정수도를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수도의 인구 집중 억제는 여러 가지 다른 정책도 수립해서 강력히 밀어야 되겠지만 결국은 우리가 통일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어 어디 다른 데로 옮겨야 되겠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하나의 구상이다. (중략) 새로운 행정수도가 거기 앉음으로써 서울에 자꾸 오는 인구를 한쪽에서 잡아당기고 억제하는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또 상당한 수를 그쪽으로 끌고 갈 수도 있게 된다.”(·NCC포럼 엮음)

박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건설 발표는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거의 모든 일간지는 1면부터 ‘임시행정수도 건설 구상’ 등 박 전 대통령의 ‘천도’ 발표 관련 기사로 지면을 도배했다.

전혀 뜻밖의 발표에 시민들은 술렁거렸지만 박 전 대통령은 주저하지 않았다. 군인 출신답게 곧바로 밀어붙였다. 그해 3월7일 제1무임소장관실 박봉환 실장으로부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안)’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행정수도 건설은 국방력 증강 등 타 중요사업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장기 계획으로 무리 없이 추진한다 △행정수도 건설의 방법은 먼저 백지(白紙)계획부터 수립한다 △백지계획 작업 기간은 2년으로 하여 청와대에서 직접 한다 △이전은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하나씩 수행한다.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이 공식적으로 착수되는 순간이었다.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에 따르면 새 행정수도는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 좌우 대칭 구조로 설계됐다. 백지계획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사실상 소멸됐다(왼쪽).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행정수도 건설을 정치적 의도로 활용하려 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오른쪽).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에 따르면 새 행정수도는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 좌우 대칭 구조로 설계됐다. 백지계획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사실상 소멸됐다(왼쪽).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행정수도 건설을 정치적 의도로 활용하려 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오른쪽).

위치·예산 모든 게 미정이라 ‘백지계획’

이어 3월16일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은 자신이 단장을 겸하고 있던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내에 행정수도 백지계획 수립을 위한 실무기획단을 구성했다. 오 수석은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꿰뚫는 인물로 꼽혔다. 당시 기획단 실무작업팀에 참여했던 김병린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계획하고자 했던 임시행정수도를 어디에, 그리고 얼마의 자본을 투자해 언제까지 건설할 것인지 등 모든 것이 미정이었고, 어떤 현실적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백지계획’이라고 이름 붙였다”며 “초기 단계부터 입지를 선정하고 조사를 실시하면 투기 행위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획단은 이때부터 연구가 종료된 1980년 8월까지 4년에 걸쳐 500명 가까운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72개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그사이 8차례에 걸쳐 외국의 여러 수도에 대한 현지답사도 마쳤다. 연구성과는 1979년 5월 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두 권의 종합보고서에 요약돼 있다.

핵심 내용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국토의 중심부인 대전 부근에 입법·사법·행정 3부 기관을 모두 옮겨 인구 25만 명 규모의 행정도시를 건설한 뒤, 1996년까지 업무상업지구를 더해 명실상부한 자족도시 형태로 가꾼다는 계획이었다. 최종 후보지는 장기지구와 논산지구, 천안지구 세 곳으로 압축됐다. 이를 위해 정부와 국회는 1977년 7월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 이후 백지계획 연구는 한동안 이어졌지만 1980년 8월20일 컨트롤타워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사실상 폐기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많은 전문가가 아쉬워하는 대목도 박 전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행정수도 백지계획의 소멸이다.

백지계획을 총지휘했던 오원철 전 수석의 아쉬움은 누구보다 크다. 오 전 수석은 자신의 책 에서 행정도시 백지계획이 무산된 사실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집중 분산이 수도권 정비 촉진했을 수도

“계획대로 1980년대 초에 시작하였다면 지금쯤은(집필 시점인 1992년을 가리킴) 그 윤곽이 완전히 드러났을 것이다. 오 전 수석의 회고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78년 당시 예산을 이미 확보해 건축 예정이었던 법원 청사도 새 행정수도에 건설하도록 보류시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한 막대한 투자도 서울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새 수도 건설에 활용됐어야 한다는 것이 오 전 수석의 지적이다. 그는 “박 대통령은 1996년까지 새 행정수도로 이전할 계획이었으며 이때 여기서 올림픽을 개최하자고 했다”며 “따라서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에는 당연히 올림픽촌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이름이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1978년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지역개발연구소 연구원 자격으로 백지계획에 참여했던 김진애 민주당 의원은 “행정수도 백지계획이 예정대로 추진됐다면 확실히 국가 균형발전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연구팀 관계자들로 구성된 NCC포럼의 백지계획 평가서 를 보면, 당시 연구팀은 행정수도 건설에 따른 경제·사회적 효과를 구체적 수치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인구분포에 미치는 효과다. 연구팀은 행정수도를 50만 명 규모로 단독 건설하는 경우 56만 명의 서울 인구 분산 효과가 있다고 내다봤다. 또한 행정수도를 대전, 전주, 광주, 마산·창원, 대구·구미 등 지방 5대 거점도시 개발과 병행할 경우 전체 분산효과는 276만 명에 이른다고 내다봤다.

연구팀은 백지계획이 서울(수도)권 정비를 촉진할 수 있다고도 했다. 수도 기능의 이전으로 도시 보유 기능의 일부 감소와 이전 적지 등의 활용으로 본격적인 도시 정비를 할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행정학)는 "행정수도가 충청권으로 이전한다 해도 당시 서울은 이미 인구 500만~600만 명에 이를 뿐만 아니라 자산이 집중된 제1의 도시였기 때문에 경제 중심지로서의 고유 기능은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본다"며 "충청권의 중심도시인 행정수도와 서울이 일종의 투톱 시스템을 이뤄 균형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추진 일지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추진 일지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국민경제에 미치는 효과, 특히 경제성장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연구팀은 총 공사비 약 5조5천억원이 투입되는 행정수도 건설투자는 연평균 0.41%의 국민총생산(GNP) 성장과 약 4조5천억원의 부가가치 유발효과를 준다고 말했다. 고용효과 측면에서도 15년간 연인원 102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병린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행정도시 건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3부 기관의 이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데, 백지계획의 성사 여부는 어쨌든 박 전 대통령의 결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런 시도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백지계획이 무조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김진애 의원의 지적처럼 한국은 197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도시계획에 눈을 떴다. 인구 50만 명 규모의 완전히 새로운 도시 하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도시가 수도의 기능까지 수행해야 한다면 평가는 좀더 엄격해져야 한다.

민주화 요구 등 회피 의도도 있어

행정수도 건설을 둘러싼 정치적 접근도 행정수도의 운명을 밝게만 볼 수 없게 하는 부분이다. 장기 집권 말기에 민주화 요구 등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행정도시 건설이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활용해 사회적 의제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지적이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과)는 “당시 백지계획이 정치적 의도로 추진된데다 1990년대 이후 도시의 성장 방식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행정수도가 애초 의도대로 기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1990년대 이후 산업발전이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진 만큼 초기 인프라가 부족한 행정도시는 정책적 육성의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 집권 시기에 구미에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해 유치한 기업 가운데 금성 등 일부는 신군부가 집권한 뒤 다시 수도권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도시 건설이 반드시 성공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백지계획 참여한 김진애 의원
“균형발전 효과 봤겠지만…제대로 만들 수 있었을까”


김진애 민주당 의원

김진애 민주당 의원

도시건축가 출신 김진애 민주당 의원(비례대표·사진)은 정치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 연구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1978년 6월 발족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 지역개발연구소(RDRI) 연구원으로 행정수도의 도시계획 수립 과정에 참여한 김 의원은 “박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도 흐지부지됐지만, 걸음마 단계였던 국내 도시계획 연구 분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백지계획에 대한 평가는.
=우리나라에 도시계획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이 1970년 그린벨트 제도 시행 이후였다. ‘신도시’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기껏 토지구획정리사업이나 신시가지 계획 정도만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도시계획에 관한 국내의 모든 역량을 가동해볼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계획이 진행되면서 기본적 지형 자료와 인구 자료, 측량 자료 등 필수 자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점검할 수 있었다. 허약했던 도시계획 연구 분야에 큰 자극을 준 계기였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여론은 어땠나.
=당연히 반대가 많았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명분은 지역 균형발전과 안보였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안보를 핑계로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 의도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진정성은?
=그 부분에 대한 논란은 크지 않았다. 진정성을 의심할 만한 구석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실현 가능성은 어떻게 봤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계속 집권했다면 그대로 진행됐으리라 생각한다. 신군부가 들어온 뒤 급격히 동력을 잃으며 흐지부지됐는데, 정통성 없이 집권한 신군부가 무리하게 임시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보다 수도권 민심을 다독이는 쪽으로 선회한 것 아닐까 싶다.
-만약 임시행정수도 이전이 실현됐다면 어떤 정책효과를 가져왔을까.
=나뿐만 아니라 당시 연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궁금증이다. 서울이 어떻게 변했을까, 지역 불균형이 이렇게 심해졌을까, 한국 정치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이야기를 자주한다. 모든 상황을 내다볼 수는 없지만 확실히 지역 균형발전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또 내 기억으로는 인구 20만 명 규모의 행정수도를 계획했는데, 실제로 도시가 완성됐다면 엄청나게 팽창했을 것이다. 백지계획의 기본 구상에는 3부 기관이 모두 이전하도록 돼 있었다. 아무래도 행정부처가 이렇게 대규모로 옮겨가면 주변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빨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당시 우리의 기술 수준으로 제대로 만들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