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역사를 돌아볼 계기들로 가득 찬 2010년을 맞아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기획,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를 연재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 이면의 의미와 현재적 함의를 짚어보는 방식으로 ‘만약에’를 묻는 것도 의미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테면,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지 않았다며 통일 논의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도 이전 계획이 성공했다면 한국은 어떤 정치·사회적 변화를 맞이했을까?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면 민주주의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과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최성진 기자 등이 ‘역사적 가정’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나선다. 독자 여러분의 톡톡 튀는 ‘가정법 질문’도 기다린다. 편집자
개인의 죽음은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압도적인 사건이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간혹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그 사회와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역사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그랬고, 김주열·박종철·이한열의 죽음이 그랬다. 최근에도 두 소녀와 한 대통령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일상의 껍질을 깨고, 거리 한복판에서 격정적인 순간을 살게 했다. 1919년 1월21일,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68살의 나이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을 거뒀다.
중국 망명 막기 위한 일제의 암살이 유력고종의 죽음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의문은 그것이 조선총독부의 발표처럼 자연사(뇌일혈)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암살인가다. 결론을 말하면 암살의 개연성이 매우 높다. 매우 높을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고종은 1월20일 밤 독을 마시고 고통스러워한 끝에 1월21일 새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고종은 고령이기는 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했다(오히려 그의 아들 순종의 병치레가 잦았다). 뇌일혈은 전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20일 밤까지 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두루 목격되었다. 또한 당시 고종의 주검을 염습한 사람들이 남긴 증언으로는 주검이 사흘 만에 완전히 부패해 이가 입안에 모두 빠져 있었고, 수의를 갈아입히려는데 살점이 옷과 이불에 묻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비교적 흔하게 쓰이던 독약인 비상을 마신 전형적인 증상이다. 보통은 뇌나 심장이 기능을 멈춰도 체내 세포는 한동안 살아 있으므로, 부패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상의 비소 성분은 혈액의 산소 운반을 차단하므로 세포 수준에서 죽음이 바로 들이닥친다. 따라서 박테리아와 세균의 분해 작용이 통상의 주검보다 빠르게 진행돼, 당시 겨울이었음에도 사흘 만에 주검이 완전히 썩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거리(식혜라고도 하고 홍차라고도 한다)를 올렸다는 시녀들이 얼마 뒤 의문사한 점도 암살의 정황을 높인다.
암살이라면 누가, 왜 암살했는가? 아직 구체적인 암살의 각본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세가와 총독이나 데라우치 전임 총독 등 당시 일제 지배기구의 최고위선에서 모종의 비밀 계획이 꾸며졌다는 내용이 당시 총독부 고위직의 회고록이나 일본 정부 문서 등에 보인다. 그리고 1월21일 직후부터 널리 퍼진 독살설에 따르면, 총독부의 지령을 받아 이완용과 윤덕영 등이 어주도감 한상학, 어의 안상호 등에게 식혜(혹은 홍차)에 독을 넣어 고종을 살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암살의 배경에는 고종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에 만족한다”는 친서를 보내라는 일본의 강요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해서라는 설 등이 있으나 겨우 그 정도의 문제로 암살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을까 싶다.
그보다 고종이 을사늑약 이래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비밀 후원해왔을 뿐 아니라 해외 망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암살의 이유로 유력하다. ‘외유내강’형이던 고종은 겉으로는 무기력하게 국권 침탈을 수용하고 일제의 기념품 같은 존재로 하릴없이 연명하는 듯 보였으나, 이면에서는 투쟁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뒤 국내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중국에 망명해 있던 이회영·이시영 등과 은밀히 연락해 중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추진했음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일본이 모르는 체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민족해방의 복음으로 받아들인 세계의 피압박 민족들이 제각기 웅성거리며 제국주의 지배에 맞서려는 분위기였는데, 고종이 떡하니 망명해서 병합 무효 선언을 하고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일제로서는 크나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암살이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할 만도 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자. 고종이 그때 숨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고종이 해외 망명이나 지속적인 국권 회복 투쟁을 포기하고, 이태왕(李太王)의 신분으로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기로 결정했을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고종이 1월21일의 암살을 모면하고, 어찌어찌 국외 탈출에 성공해 해외에 망명정부를 세웠을 경우다.
먼저 고종이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이후 5~10년 정도를 더 살았다고 하면, 일본의 한국 지배는 상당히 수월해졌을 것이다.
순종과 비교가 안 되는 충성의 대상고종은 당시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45년간 재위해 조선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왕위에 있었으며, 그 시기는 개항에서 개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에 이르는 여러 정치적 격변과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거친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등 한국 근대화의 거의 전 과정에 걸쳐 있었다. 그런 어려운 시기, 격동의 시대를 함께 보낸 최고 지도자는 설령 불세출의 업적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민중에게 각별한 정을 남기게 된다. 순종도 있었지만 고종이야말로 실질적인 조선 최후의 군주였고, 한국인에게 순종과 비교가 안 되는 충성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세창·이상설·한용운처럼 고종의 밀사 역할을 했거나 고종을 동정 또는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손병희·윤치호·안창호 등 고종이 과거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을 탄압한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인사들, 또는 국가 지도자로서 고종이 너무 무능·유약했다고 비판한 이들조차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그의 죽음과 독살설에 격앙된 민심을 연료로, 그의 영전에 조문하기 위해 서울에 전에 없이 사람이 밀려드는 상황을 도화선으로 삼아 대대적인 반일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기로 했다. 이것이 고종의 장례일을 이틀 앞두고 일어난 3·1운동이었다(3·3운동이 아니라 3·1운동이 된 이유는 노제가 치러지는 당일은 고종의 장례를 방해할 수 있고, 2일은 일요일이어서 거사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해외 각지에 퍼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망명정부 수립에 뜻을 두고 힘을 합치게 되었다.
고종이 1919년 1월21일에 죽지 않았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어도 상당히 규모가 작은 소수 독립운동가 중심의 운동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가 덕수궁에서 일본에 의존하는 삶을 계속 살았다면, 아직도 고종과 옛 황실에 충성하는 민중과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이견 때문에 독자적 망명정부 수립, 공화국 선포 등의 행보는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한편이던 미국·영국이 점점 일본과 거리를 두게 되고(가령 1922년의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폐기하고, 중국에 산둥반도를 반환하며, 대규모로 해군을 감축하는 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일본이 대외관계에서 위기를 느끼던 시기까지 고종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이후 왕년의 독립운동가나 문인, 예술가들이 강요당한 것 이상의 친일 선전활동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고종의 이름으로 일제 지배를 칭송하거나 일본의 ‘동양평화론’ ‘대동아 공영론’을 찬양하는 성명이 남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내외 독립운동이 크게 제약받았을 뿐 아니라, 광복 뒤에도 옛 황실 처리 문제를 두고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보자면 고종이 일제의 유혹에 빠져 안일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결과 1919년 1월에 죽음을 맞이한 일은 역사적으로는 다행한 일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아무튼 ‘다행’이라는 말을 쓰는 일이 용서된다면 말이다.
임시정부보다 명분·세력 월등했을 것하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 즉 고종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스스로 망명정부를 수립했을 경우에는 좀더 복잡해진다. 고종은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초기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도 하고 있었다.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이인영·민종식·신돌석·정환직·허위 등은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거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는 국권 상실 이후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져, 1920년대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국왕에의 충성과 국가에의 충성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옛 사상체계에서 ‘근왕’, 즉 임금을 도와 난리를 평정한다는 이념이 큰 대의명분이 되었던 까닭도 있고, 일본의 지배가 철저한 국내나 떠돌이 신세인 해외에서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이 투쟁의 자금원으로 절실하게 쓰인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밖으로 나와 망명정부를 선포했다면 상하이 임시정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세계 각국의 승인을 얻었고, 그 주권자였던 고종이 한일병합이 무효임을 밝히고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면 이에 호응하는 국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힘이 우선인 국제관계에서 당장 광복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이 확실히 일본의 적으로 돌아선 다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임시정부의 김구는 “우리가 기여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정부 자체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합법적 정부임을 주장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광복 당시 한국은 일본에 강제 점령당한 독립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에 불과했던 것으로 여겨져, 열강들에 의해 일본 대신 한반도를 분할한다는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고 임시정부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국가의 승인을 얻고 계속 일본과 싸워온 옛 황실의 망명정부가 있었다면, 당시 외국에 망명해 있다가 귀국해 정권을 되찾은 이란의 팔레비나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처럼 고종의 후계자(고종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은 작은 만큼)가 당당히 귀국해 통일 한국의 국가원수로서 한국을 통치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물론 과거와 같은 전제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의 자격이었겠지만).
후계자는 통일 한국의 국가원수?
고종이라는 한 개인이 당시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란 실로 컸다. 그가 친일을 선택했거나, 망명에 성공했거나, 혹은 삶을 이어갔을 경우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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