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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름 없는 사람을 보라

인물로 보는 민주화운동사 펴낸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 “우리, 여기까지 거저 온 게 아니고 힘들게 왔다” 교도관, 인쇄소 사장 알리는 그가 말하는 박근혜 정부와 야당
등록 2016-02-24 13:38 수정 2020-05-03 04:28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사람은 어디 있는가.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 물이 아니라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 했거니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제 할 일 하지 않아 사람 수백을 물속에 수장시키고도 “일단 모두 물에 빠트려놓고 꼭 살려내야만 할 규제만 살려두도록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말을 태연자약 대통령이 하는 시절. 어디에 사람은 있는가.

“민주화운동의 막후 비밀병기”

그는 안타까워했다.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 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역사는 정(正)의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그런데 부(否·그릇됨)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또 하나, 박근혜는 존재 자체로 국민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이성의 힘으로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막지 못했다. 우리 사회 정치권은 어떤가. 막을 수 있는 정치력이 없는 게 아닌가.”

그는 주저하지도 않았다. “야당이 민주화 투쟁에는 골똘했는지 모르지만 이 나라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공동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성찰이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공부를 안 하니까 야당이 국민의 안전·생명을 지킬 능력이 없어 보이는 것 아닐까. 국민 앞에 서서, 우리 공동체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자기 언어로 자기 능력과 경륜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는 김정남(74)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인 1993~94년 일했다. 유일한 공직 이력이다. 인권변론으로 우뚝했던 홍성우 변호사가 생전에 “민주화운동의 막후 비밀병기”라고 했던 사람. 고은 시인은 ‘만인보 연작’에서 그를 일러 “모두 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는 뒤로 뒤로 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있어야 할 때/ 그가 있어야 할 곳/ 꼭 그가 있다”고 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살아생전 말했다. “민주화운동 30년은 그의 삶 자체였다.” 민주화 투쟁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이며, 그 많은 성명서·선언문의 작성자였던 그를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2월15일 서울 서초구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최근 (두레) 두 번째 책을 펴냈다. 2012년 냈던 1권도 손질하고 단장해 같이 출간했다. 부제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도 알 수 있는바, 이 책은 사람에 주목해 민주화운동사를 조감했다. 격월간지 (발행인 김형태 변호사)에 ‘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글을 묶었고, 연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힘이 닿는 한 계속 쓰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달 말 김정남은 또 하나의 ‘그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참이다( 3·4월호). 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이야기다. 사무실 벽에 걸린 휘호가 단아하다. ‘愼獨軒’(신독헌). 홀로 있으되 더욱 몸가짐을 바로 하는 곳. 신영복의 글씨다. 신영복의 첫 책 제목 을 지은 이가 바로 김정남이다. 출감 전 신영복의 편지를 연재한 곳이 이었고, 그때 편집국장이 김정남이었다. 그 자신도 1964년 6·3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의 배후로 몰려 6개월 옥살이를 했다. “신영복의 편지는 맑고 정제돼 있었다. 차라리 감옥이 부럽기까지 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이 펴낸 <이 사람을 보라> 1·2권.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이 펴낸 <이 사람을 보라> 1·2권.

50각형의 인물 열전

책을 꿰뚫는 주제의식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바로 20~30년 전 일인데 역사가 돼버렸다. 젊은 사람들은 민주화가 한꺼번에 와버린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그 편린이라도 살펴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앞서 김정남이 2005년 낸 (창비)은 사건 중심이다. 그는 와 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고 했다.

에는 모두 49명이 실렸다. 1권 29명, 2권 20명. 2권 마지막에 부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넣었으니, 더하면 ‘쉰 개의 거울’이 있는 셈이다. 김정남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회상하며 새긴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명패’이기도 하다. 사실의 복원은 물론 생생한 구체성을 살린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김정남이 저들과 두루 맺은 인연 덕이다.

그들을 호명해본다. 김수환 지학순 박형규 법정 장준하 리영희 김재규 이소선 전태일 박종철 김승훈 이병린 이돈명 황인철 조준희 홍성우 강신옥 조영래 황국자 이효재 콜레트-노정혜 정금성 김한림 공덕귀 박재일 송영순 박현채 박중기 이수병(1권 수록). 장일순 홍남순 김영삼 윤한봉 최종길 최종선 천관우 박윤배 신현봉 최기식 김남주 장기표 전병용 여익구 김도연 홍성엽 조태일 강용주 강은기 정수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2권 수록).

이들은 저마다 암흑의 시대에 빛이 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50각형의 인물 열전’이라고 할 만하다. 모이면 하나이되 진실의 빛은 저마다 제 빛을 낸다.

새로 출간된 2권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전병용(‘누가 민주화 유공자인가’ 편)이다. 당시 그의 직업은 서울구치소 교도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몸속에 숨겨 나와 김정남에게 전달한 인물이다.

이후 전병용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이부영의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과 2~3일 뒤 전병용은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돼 곤욕을 치렀다. 범인은닉 혐의로 재판을 받던 ‘민주 교도관’ 전병용의 법정 최후진술 한 대목을 김정남은 소개했다.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우리 집의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수행하겠습니다.”

감동적인 최후진술이 전병용을 ‘교도관의 전설’로 길이 남게 했다고 김정남은 적었다. 리영희는 “반독재 운동가들에게는 지옥에서 보살을 만난 것과 같은 은인 (…) 얼굴 없는 위대한 투사”라고 회고했다.

민주화운동의 ‘보이지 않는 손’은 또 있었다. 세진문화사 사장 강은기. 1979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유인물,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 화보집,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투쟁 유인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기관지와 유인물, 서울대 김세진 자료집…. 이 모든 것들이 대금을 외상으로 처리해준 그의 인쇄소에서 제작됐다. 대가는 혹독하게 따랐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붙들려 가서 고문과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김재규 항소 이유서’를 인쇄한 뒤에는 3년 징역살이를 겪기도 했다. 2002년 숨진 강은기가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든 이유다.

그(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는 새로 나온 2권에 실린 전병용(가운데)·강은기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보이지 않는 손’을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두레 제공

그(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는 새로 나온 2권에 실린 전병용(가운데)·강은기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보이지 않는 손’을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두레 제공

고통스런 개성공단 폐쇄 소식

책 밖으로 나와 시국을 물었다. “민주주의는 내가 나 자신의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체제다. 그래서 노동·농민 운동도 민주주의 범주에 포함된다. 정치는 서로 상충하는 걸 공동선의 방향으로 통합·조정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어느 특수 이익을 앞장서서 관철하려는 사람들의 투쟁 현장이다. 공동선을 이끌어내려는 진지한 고뇌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각자도생, 백가쟁명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일정까지 나온 상태에서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를 초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되짚은 취임사의 한 대목이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봅시다.”

노태우 정부를 끝으로 군사정권을 끝장내고 들어선 문민정부. 이때 김정남은 민족 진운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지금 역사의 시곗바늘은 황망하게 거꾸로 돌고 있다. 1979년 몰락한 유신정권이 37년 만에 부활하고 있다는 말마저 나온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폐쇄한 사건을 그는 강하게 비판했다.

“중국에서 소식을 들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못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개성공단은 남북이 통하는 실핏줄 같은 것이다. 이것 하나만큼은 제재 대상의 예외로 할 수 없었나. 중국의 제재를 끌어내지도 못하면서, 개성공단마저도 자기 손으로 잘라내고…. 남북문제를 어떻게 끌고 가겠다는 그림 같은 게 박근혜 정부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림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끌고 갈 능력이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에 치명적인 건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누가 그걸 하는지 소통도 안 된다는 거다. 아주 고통스럽다.”

“보이지 않는 이를 기억해달라”

야당에 대한 실망과 정치권의 몰염치도 비판했다. “‘박근혜 우익’의 독주를 막을 수 있나. 야당은 막을 수도 없으려니와 막을 의사도 없는 것 같다. 안철수? 결국 야당의 분열로만 귀결되는 것 아닐까. YS의 초기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정치자금 한 푼도 안 받겠다, 재산 공개도 먼저 하겠다’는 것 때문이었다. 개혁은 ‘깨끗한 도덕성’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정치권이 자기들 먼저 정화작업 하겠다, 특권 내려놓겠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말도 안 하더라.”

그에게 독자·시민한테 전하는 말을 부탁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거저 온 게 아니고 힘들게 왔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쉽게 살지 말고, 고뇌하면서 좌우앞뒤를 성찰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책에 담긴 글과 삶을 조감해보면 어떻게 사는 게 인간적으로 사는 건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좀더 성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무 정색하고 보기보다는 누워서도 볼 수 있게 썼으니까 꼭 좀 읽어봐줬으면 한다. 책에 실린 ‘이름 없는 사람들’도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도 많지만, 보이지 않게 헌신한 사람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달라.”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기억에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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