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물을 찢고 나온 사람들이 찍었다”

20대 총선 부산·경남에서 일어난 지역주의 균열… 여당 지지 성향 강한 부산진구갑 당선자 김영춘에게 부산 야성의 역동적 변화를 듣다
등록 2016-04-26 16:59 수정 2020-05-03 04:28



연속기획_ 20대를  부탁해


① 부산·경남 지역주의 - 김영춘 (더민주)
<font color="#C1C1C1">② 세월호 진실규명 - 박주민 (더민주) </font>
<font size="2"><font color="#991900">*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font></font>


<font color="#006699">부산이 ‘디비졌다’(뒤집혔다).
제20대 국회의원선거(총선)를 풀이하는 열쇳말 가운데 하나는 부산의 변신이다. 영남·보수 정당의 독무대로 여겨지던 부산은 18석 가운데 5석을 더불어민주당에 안겼다.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는 정당투표에선 국민의당·정의당을 포함한 야권에 절반 이상을 몰아줬다. 호남·진보 기반 정당이 지금까지 부산에서 거둔 최고의 성과다.
은 부산에서 일을 낸 ‘더민주 독수리 5형제’의 맏형 격인 김영춘 당선자(부산진구갑·3선)와 심층 인터뷰했다. 그는 선거 한 달여 전 인터뷰에서 “(지역주의 정치를 초래한) YS의 3당 합당은 잘하지 못한 것 중 하나다. YS 비서였던 내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제1101호 <font color="#C21A1A">‘4년, 동네 후배로 돌아오는 시간’</font> 참조).
다시 만난 그에게 결자해지의 길을 더 물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부산·경남 민심의 변화를 “독립적 투표층의 등장”으로 설명했다.
인터뷰에 뒤이은 기사에선 부산 보수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90년 3당 합당 이후 PK(부산·울산·경남)의 표심 변화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PK의 ‘야당 선호’ 현상이 일시적인 바람에 그칠지, 내년 대선 지형을 바꿀지도 살펴봤다.
앞으로 은 5월30일 탄생하는 제20대 국회를 이끌어갈 국회의원과의 연속 인터뷰를 통해 16년 만에 여소야대가 된 국회의 달라진 모습과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각 정당들의 움직임을 보도할 계획이다.
취재 송호진·서보미 기자, 편집 신소윤 기자, 디자인 장광석</font>
김진수 기자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진수 기자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를 그만하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전국정당화를 꿈꾸며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열린우리당 실험의 실패 등을 책임지고 제18대 국회의원선거(총선·2008년)에 출마하지 않은 뒤였다. 그는 “소목수를 하며 소설을 쓰는 귀농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고교 시절 문학회 활동을 했고, 법대에 가라는 부친의 바람에 막혀 국문과에 가지 못하고 친형이 중재한 영문과에 진학한 문학도이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설 쓰는 목수가 되고 싶었는데…</font></font>

주변에선 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어지러운데 정치인이 정치를 안 하고 도망가는 건 세상을 버리는 것”이라고 만류했다. 결국 그는 그 논리에 “졌다”고 한다. 대신 귀농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완전히 허물지 않았다.

“정치를 다시 하되 가치 있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산으로 갔다. 농사짓는 마음으로, 귀농하는 마음으로.”

부산을 떠난 지 3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게 5년 전이었다. 그는 야권 후보에겐 척박한 땅에서 밭을 갈고, 새로운 씨도 뿌려나갔다. 한 번은 실패(2012년 총선 낙선)했고, 한 번은 스스로 물러났다(2014년 부산시장 선거 출마 뒤 무소속 오거돈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지지하며 사퇴).

그리고 2016년 4월13일 제20대 총선. 그는 부산에서도 새누리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는 부산진구갑에서 50%에 육박한 득표율(49.6%)로 당선됐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을 맡아 더민주 소속 후보 5명이 부산에서 당선되는 데 중심이 됐다.

이를 두고 그는 “어느 정당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표한 독립적 투표층이 일으킨 선거 혁명”이라고 했다. 이들을 가리켜 “(새누리당이 쳐놓은 거대한) 그물을 찢고 나온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향후 한국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지각변동이 부산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김영춘 당선자가 있다.

그는 2000년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서울 광진갑)이 된 뒤 언론에서 칭한 ‘독수리 5형제’(이부영·김부겸·이우재·안영근·김영춘)의 일원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그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서울 광진갑에서 재선을 했다. 2008년 불출마 이후 8년 야인 생활을 거쳐 이제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당선된 국내 최초 3선 의원이 됐다.

특히 “YS(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이 부른 과오를 YS의 비서였던 내가 ‘결자해지’하고 싶었다”던 그가 부산 변화의 중심에 선 것도 의미가 있다. 부산을 정치적 근거지로 삼았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하면서 야성의 혈기가 끓었던 부산은 이후 여권 성향으로 바뀌어갔는데, 그 흐름을 직접 되돌린 셈이다.

더민주의 당선자 환영 행사를 위해 상경한 4월20일,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막걸리잔을 놓고 3시간 넘게 부산에서 일어난 역동적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엔 안수찬 편집장이 함께했다. 그는 이야기가 이어지자 양복 상의를, 넥타이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시민의 주권 혁명”과 같은 뜨거운 표현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모두가 반대한, 승리가 불확실한 싸움</font></font>
김 당선자가 부산에서 처음 도전한 2012년 총선에서 지역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김 당선자가 부산에서 처음 도전한 2012년 총선에서 지역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당선 이후 지역민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새누리당을 찍은 분도 “김영춘 후보가 안 될 줄 알고 새누리당을 찍었는데 진짜 당선이 됐네. 미안하면서 고맙다”고 격의 없이 축하해주셨다. 부산에서 드디어 정상적인 정치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야당 지지자들은 야당 후보를 찍어도 지기만 했는데 승리를 경험하게 됐다. 부산 시민 모두에게 좋은 선거의 축제가 되었다.

처음 야당을 찍은 분도 있었을 텐데.

많았다. 어떻게 보면 부산에서 더민주가 18석 중 5석을 차지했으니 이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부산 시민들이 자신들이 만든 결과에 놀라고 감동한다. “(야당을 찍은) 나 같은 사람이 부산 다른 곳에서도 많았네” 하며 놀라는 거다. 심리적 족쇄와 고삐가 풀린 거다.

부산에 사는 노모의 걱정이 컸다고 들었다. (김 당선자의 아버지는 1988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82살이시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다. 2012년 총선 때 처음으로 부산에서 출마했을 때 어머니가 심장병이 더 도졌다고 할 만큼 힘들어하셨다. “서울에서 출마하지 왜 여기 와서 고생하느냐”면서. 나의 귀향 자체가 고통거리였다. 이번에 그 걱정이 씻겨졌다고 하셨다.

2011년 말 부산으로 가자고 할 때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고.

재선을 했던 서울 광진구도 연고가 없던 곳이었다. 처음엔 거기서 괄시도 많이 당했다. 마누라는 “각고의 노력 끝에 광진구에서 기반을 잘 닦았는데 왜 부산으로 가느냐”고 했다. “승리가 불확실한 싸움을 하기 위해 가자는데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느냐. 혼자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6개월간 부산에서 혼자 지냈다.

아들의 반대가 제일 심했다. 걔가 또 (서울을 연고로 둔 프로야구팀) LG 팬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야, LG가 롯데 자이언츠(Lotte Giants)의 준말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들이 이제 고3이 됐는데, 이번에 친구들에게 “너희들 엄마한테 (우리 아빠 찍을 수 있게) 작업하라”고 얘기하더라.

2012년 총선에서 주민들을 처음 만나러 다닐 때 호의적이었나.

이 동네에서 5살부터 살았다.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기억 속 고향이다. 우리 집이 이 지역 골목에서 쌀집을 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으면 내가 자전거에 쌀을 싣고 배달했다. 60kg 쌀을 2개 싣고 나가면 중학생 때는 무거워서 죽겠더라. 그때 배달하던 것을 기억하는 동네분들이 있다. 공부도 곧잘 했는데, 쌀 배달도 하던 착한 아들로 기억해주더라.

하지만 많은 분들은 내가 이 동네 출신이란 걸 몰랐다. 2012년 총선 때는 (부산에 출마한 같은 당의) 문성근 후보처럼 서울에 있던 사람을 꿔와서 투입했다고 생각하더라. 명함을 돌리며 “내가 여기서 초·중·고를 다 나왔다”고 하면, “진짜 그렇네”라고 하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영춘아, 니 몇 회고?”</font></font>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2년 총선 첫 도전(3598표 차 패배)에선 낙선했다.

내 지역구가 부산의 원도심이다. 노후된 단독주택이 많은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사신다. 노인 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이라도 오래 지역에 살면서 자영업하는 분들이 새누리당 지지자다. 그들의 표를 가져오지 못하면 낙선이라고 생각했다.

표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빡빡 기면서 이야기 들어주고, 같이 아파해주는 것인데 처음엔 그러지 못했다. 당시 당의 최고위원을 하면서 당의 통합 작업도 해야 해서 출마 선언을 해놓고도 일주일에 서너 번 서울에 올라갔다. 처음부터 ‘(선거) 재수를 한 번 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게 붙었으면 이겼을 것이란 후회도 들었다.

2012년과 다른 분위기를 느꼈나.

선거 전에 부산의 한 언론이 ‘집전화·자동응답 방식’으로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내가 25%, 새누리당 후보인 나성린 의원이 50%가 넘는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캠프가 난리가 났다. 캠프 간부들을 모아놓고 “엉터리 조사다. 내가 보는 여론은 반대다. 이긴다. 믿어라”라고 말했다.

4년 전 총선 개표 때 내가 계속 이기다가 막판에 역전패당한 곳이 ‘초읍동’이다. 새누리당 몰표가 나와 거기에서만 1851표 차로 졌다. 부산 행정동 단위로는 노인인구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 동네에 가니 노인분들이 “영춘아, 니 (초등학교) 몇 회고?”라고 묻더라. “당은 후진데 그래도 사람을 보고 찍어야지. 니 한번 밀어줘야겠다”는 분이 많았다. 선거 전부터 새누리당 지지자의 10%는 가져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그 초읍동에서 600표밖에 지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보도한 그 언론이 큰 오보를 냈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부산 원도심(부산진구·연제구·남구)에서 당선자가 나온 것도 혁명적 변화다. 부산 어떤 지역에서도 야당을 찍을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부산에서 18석 중 5석을 이끌었다. 이건 예상했나.

민심이 부글부글 끓다가 말면 부산에서 전패하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임계점을 돌파해 민심이 폭발하면 5~6석은 얻을 것이라고 봤다. 다행히 폭발했다.

왜 임계점을 넘었을까.

지역경제 몰락,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오만불손, 그리고 국민을 무시하는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이 마지막 순간에 불을 붙였다. 부산에서 새누리당이 20년간 독점하며 이곳 인구가 40만 명 줄었다. 경제 활력이 완전히 죽었다. 청년이 일자리가 없어 매년 1만4천 명씩 부산을 떠난다. 이대로 안 된다는 것을 부산 시민들도 다 아는 거다. 이런 절망적 현실에 분노했다. 우리 후보들은 경력에서 여당 후보에게 밀리지 않는 등 그 분노를 받아안을 준비가 돼 있었다.

부산에선 총선·대선을 치를 때마다 현 새누리당 불만 세력이 10%씩 늘었다. 1997년 대선 때는 DJ(김대중)가 부산에서 득표율을 20% 가깝게,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가 30% 가깝게,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가 낙선했지만 약 40%를 얻었다.

늘어나긴 했지만 이게 야당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번에 부산에서 야당 당선자(김해영·전재수) 득표율이 50%를 돌파하는 선거를 시민들이 만들었다. 부산 원도심(부산진구·연제구·남구)에서 당선자가 나온 것도 혁명적 변화다. 부산 어떤 지역에서도 야당을 찍을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부산 시민이 주권 혁명을 일으켰다”</font></font>
더불어민주당의 김영춘 당선자(맨 왼쪽)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 시절이던 2003년, 한나라당 쇄신 운동을 하다 한계를 느끼고 김부겸 의원 등과 함께 탈당을 선언하고 있다. 한겨레

더불어민주당의 김영춘 당선자(맨 왼쪽)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 시절이던 2003년, 한나라당 쇄신 운동을 하다 한계를 느끼고 김부겸 의원 등과 함께 탈당을 선언하고 있다. 한겨레

부산시당위원장으로서, 후보 개인의 경쟁력에 힘을 보태기 위해 어떻게 했나.

시당 차원에서 매달 한 번 이상 이슈토론회를 열었다. (부산 관련 정책을 연구하는) 오륙도연구소를 중심으로 부산의 진보·개혁적 교수들을 끌어들였고, 부산 사람이 관심 있는 이슈도 계속 던졌다. 원전 폐쇄 운동과 같은 의제도 예전에는 (우리 당이) 립서비스만 하고 동참을 잘 안 했는데 1인시위를 하는 등 열심히 참여했다.

부산 문제를 이슈화하고 부산 언론에 계속 보도되니까 ‘빨갱이 아니면 전라도당’이라고 생각했던 부산 사람들도 ‘야당이 변했다, 노력한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게 이번 선거의 중요한 백그라운드(배경)가 됐다.

부산이 과거의 야성(야당 지지)을 회복한 걸까.

야성은 아니더라도 ‘인디펜던트 보트’(Independent vote)까지는 됐다. 후보와 상황에 따라 지지 정당을 바꾸는 ‘독립적 투표층’이 생겨났다. 독립적 투표는 선진도시·선진사회의 공통점이다. 정당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투표자다. 부동층은 뭔가 소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인데 독립적 투표층은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독립적 투표층’이 생겨났다. 독립적 투표는 선진도시·선진사회의 공통점이다. 정당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투표자다. 부동층은 뭔가 소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인데 독립적 투표층은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그물과 미끼론’을 얘기하며 새누리당 중심에서 벗어나라 설득했다고 들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 방법은 (새누리당이 쳐놓은) 그물을 찢어야 한다”고 (부산 시민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소신 투표를 한 사람들은 그 그물을 찢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번 선거 혁명의 주인이 됐다.

‘혁명’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권리 혁명이란 의미다. 영국의 시민혁명(1688년)이 참정권을 확보해 시민들의 권리를 왕권으로부터 찾아냈다면, 부산 시민들은 일당 독점 체제의 새누리당 권력에 대해 ‘인마, 그 권력 우리 거야. 원래 우리 거였다고’라며 주권 혁명을 일으켰다고 본다.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이번에 지역 주민들에게 ‘지역주의 극복’ 같은 말을 한마디도 안 했다. 그분들 머릿속엔 지역주의란 말이 없는데 자꾸 지역주의를 얘기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새누리당은 우리 편’이라는 의식이 있긴 한데, 그건 다분히 상황이 만든 강요된 의식이다. 새누리당 당원이 몇만 명 있는 곳에서 새누리당이 싫다고 하면 지역 기득권층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니까. 그러다가 이번에 새누리당을 향해 ‘이놈들 봐라, 혼을 내자고’라며 확 일어난 것이다.

YS의 비서 출신으로서 YS의 3당 합당 이전 부산과 지금의 부산은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나.

(3당 합당 이전 1970~80년대) 부산은 수출입의 최일선 현장이었다. 당시 부산의 수출 비중이 전국의 25%였다.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젊은 노동자가 와서 일하니 야도(야당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 시민들이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제 부산의 수출 비중은 전국의 3% 정도다. 7개 대도시 중 노인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사회·경제적 환경 요인 자체가 변해서 부산이 여도(여권 성향 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은 부산이 야도에서 여도가 되는 데 정치적으로 촉발 요인이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YS의 3당 합당 과오 결자해지해야</font></font>
김 당선자(가운데 사진 맨 왼쪽)가 전국정당화를 꿈꾸며 창당한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대회(2005년)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김 당선자(가운데 사진 맨 왼쪽)가 전국정당화를 꿈꾸며 창당한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대회(2005년)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1987년 YS의 비서로 인연을 맺었다. 3당 합당 과정에선 어떤 위치에 있었나.

민정당 당사 점거농성 배후로 구속됐다가 석방(1985년 3월)된 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투쟁을 돕기 위해 YS의 비서로 합류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른 대선이 끝난 뒤 사표를 냈다. YS가 1988년 총선에 서울에서 출마하라고 했지만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 제적이 풀려 복교해 대학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소련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를 주제로 석사 공부를 했다.

YS의 셋째아들이란 말을 들을 만큼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대학원에 다니는데도 YS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상도동(YS가 살던 동네)으로 불러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그런데 3당 합당은 나랑 상의하지 않았다. 나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충격이 컸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YS를 찾아갔다.

YS가 왜 그렇게까지 했다고 생각했나.

1987년 대선에서 DJ가 ‘4자 필승론’(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모두 출마하면 김대중이 이긴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탈당해 출마했다. YS는 분노가 컸다. YS는 ‘저 사람(DJ)과 내가 같이 가는 순간 영원히 집권을 못한다.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고, DJ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우리끼리 자해적 분열을 하면 민정당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라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YS를 만났을 때 (3당 합당을 통해 대권을 노리는 것에 대해) ‘심정적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합당한 당에 따라갈 수 없다. 못 뵙더라도 이해하라’고 말하고 나왔다. 그리고 1년 이상 보지 않았다.

부산 출마 이유 중 하나가 YS의 3당 합당의 과오에 대한 결자해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결국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문민정부 청와대에서 자신이 일한 것 등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인가.

YS에게도 명암이 있다. 과오는 3당 합당으로 인한 영남의 보수화, 이곳에서 새누리당 일색이 되면서 지역주의 구도가 강화된 점이다. YS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과오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결자해지의 심정 때문이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YS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과오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결자해지의 심정 때문이었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이번 당선으로 결자해지를 좀 했다고 보나.

그런 마음이 좀 있다.

더민주가 부산·경남에서 지속적 확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자신이 야당을 찍어 당선시키기 전까지 지지하는 자체에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 지지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을 잘 말하지 못한다. 야당 지지가 노출될까 겁내고, 찍어도 안 될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있고, 그래서 습관적으로 새누리당을 찍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야당을 찍으니까 되네, 야당이 되니까 좋네’라는 효능감을 주게 됐다.

부산 시민들도 거부감 없이 우리 당에 다가오는 것은 됐으니 부산에서 당 조직도 확장해야 한다. 2015년 1월 부산에서 더민주 당원이 2천 명뿐이었다. 5배 확대 운동을 해서 이제 겨우 당원 1만 명이 됐다. (우리 당 강세인) 호남 지역의 한 선거구 당원 수준이다. 또 지역의 각계 직능단체들과 적극 접촉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줘서 우군화해야 한다.

부산 시민들이 이번에 우리 당을 적극 지지한 건 아니다.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민생정치를 제대로 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 당을 자기 편이라고 느낄 때 그들의 일부가 (진정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민의 말을 대변하는 정치</font></font>
김영춘 당선자가 제20대 총선에서 승리가 확정된 뒤 아들(왼쪽), 아내와 함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춘 당선자가 제20대 총선에서 승리가 확정된 뒤 아들(왼쪽), 아내와 함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당의 비상대책위원이다. 이 당의 문제점은 뭔가.

꾸준하고 일관되게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으로 국민에게 비친다. ‘저 당은 뭔가 일관된 목표와 가치를 향해 쭉 나아가고 있구나, 깨지더라도 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걸 보여줘야 국민의 마음을 열 수 있다.

더민주가 호남에선 거의 전멸했다. 호남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나는 더민주가 국민 다수의 아픔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면 호남 사람들도 지지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우리 당과 어떤 후보가 국민적 지지를 넓히고,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호남도 지지할 것이다. 호남 특위를 만드는 식의 접근이 왜 필요한가. 호남 입장에선 ‘우리가 무슨 이익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집단인가’라고 생각할 거 아닌가.

학생운동을 했던 당사자로서 운동권 출신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운동권이든, 친노이든, 아니든 다 살아가는 모양과 그릇이 있다. 어떤 딱지를 붙이지 말고 그 사람을 보고 평가했으면 좋겠다.

나는 8년(야인 생활)의 공백이 감사하다. 재선 의원 마지막 1년간 운전기사 없이 지냈는데, 뒷좌석에 있을 때와 다른 세상이 보였다. 국회를 떠나고 버스·자전거·지하철을 타고 걸어다니니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지식인들, 먹물들이 얘기하는 추상적 민주주의, 이념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변하는 정치를 하면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다가올 것이다.

영남 선전의 당사자로서 전당대회에 출마해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이 있나.

별로 없다. 나에겐 부산에서 야권의 힘을 구조화하고 확장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 부산이 잘되면, 경남도 잘되고, 대구·경북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총선 이후 부산·경남 지역에서 더민주가 정당지지율 1등이란 조사 결과도 나왔다. 내년 대선까지 이걸 끌고 가면 얼마나 좋겠나.

8년 만에 돌아온 의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선거 기간 중에 ‘3대 양극화’(부자·빈자의 양극화, 대기업·중소기업의 양극화, 서울·지방의 양극화)를 막는 기본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양극화가 더 진행되면 이 나라가 지속 불가능하고 망하는 사회로 간다. 특히 지방은 쪼그라들고 있다. 철학적 전환이 필요하다. 큰 틀에선 국가전략 작업, 작은 틀에선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지방을 살리는 작업에 주력하며 당분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한나라당 시절 소장파 쇄신 모임이던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에 속한 사람들이 이번 선거를 거쳐 여야에 두루 포진했다(더민주 김부겸·김영춘, 국민의당 김성식, 새누리당 남경필(경기지사)·원희룡(제주지사) 등).
그들과 자꾸 만나려고 한다. 다른 당에 있지만 정치 수준을 한 단계 점프시키는 합의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3대 양극화 막는 기본법 만들고 싶어”</font></font>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당선된 최초의 3선이 됐다. 어떤 소명을 느끼나.

뭔가 되려고 산다는 것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으로서 이 순간에 사회를 위해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 뭔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지금 생각하는 정의는 이것인데, 그걸 포기하면서 힘을 키우고 계파와 계보를 만들며 줄을 서고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 되면 뭐하겠나. 이게 내 정치관이다. 대범하게 뚜벅뚜벅 가면 지지도도 따라올 것이다.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다. 나의 가치관을 바꾸면서까지 더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탈바꿈할 생각은 없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