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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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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별법 개정이 일차 목표”

세월호 특조위 불씨 살리고, 밀양방지법 만들고, 검찰청법 개정하고… ‘거리의 변호사’ 박주민 당선자의 빼곡한 법안 리스트
등록 2016-05-10 06:18 수정 2020-05-02 19:28



연속기획_ 20대를  부탁해


① 부산·경남 지역주의 - 김영춘 (더민주)
② 세월호 진실규명 - 박주민 (더민주)
*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


2014년 10월29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한 사람을 목놓아 불렀다.
“대통령님, 여기 좀 봐주세요!”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러 국회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엄마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로부터 9일 뒤 여야는 국회 본회의를 열어 수사권·기소권도 없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구성을 결의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엄마들은 본회의장에서 서럽게 흐느끼며 울었다. 기다렸다는 듯 국회사무처는 이튿날 119일간 가족들이 서로 의지해 살았던 농성장을 허락도 없이 철거했다.
가족들이 쫓겨나듯 떠나온 국회를, 가족 곁을 지켜온 박주민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돼 들어간다. 엄마들은 2년 만에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국회의원 한 명이 얼마나 바꾸겠느냐”며 기대를 접었다가도 “그래도 특조위나 특검 논의의 불씨는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은 박주민 당선자를 만나 여야가 2년 넘게 눈감아온 세월호 문제를 국회에서 어떻게 풀 것인지 물었다. 이 제20대 국회의원을 2~3주마다 심층 인터뷰하는 연속기획 ‘20대를 부탁해’에 초대된 두 번째 손님이다.
10년 넘게 거리에서 싸웠던 그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 외에 할 일이 많았다. 대규모 국책사업의 절차를 담은 밀양방지법(공공기관의 갈등관리에 관한 기본법), 행정부가 맺는 조약도 입법부의 통제를 받도록 하는 조약체결절차법, 모든 정부 유관기관의 회의록 작성·공개를 의무화하는 정보공개법 개정안, 검사장 이상 검찰 간부를 직선제로 뽑도록 하는 검찰청법·공직선거법 개정안 등이 ‘박주민 법안 리스트’에 올라 있다.
“이런 제도가 있으면 많은 분들이 고통을 덜 받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 하기도 힘들겠죠?”
그도 오랜만에 웃었다.
취재 서보미·황예랑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편집 신소윤 기자, 디자인 장광석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건물 로비로 들어선 그는 익숙하게 방문신청서부터 썼다. ‘토론회 참석’이라고 방문 목적을 적었다. 방문신청서와 신분증을 내밀고 방문증을 받았다. “아직 국회의원이 아닌 당선자라서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국회 방호원으로부터 간단한 검색을 받은 그의 곁으로, 또 다른 당선자가 자연스럽게 ‘국회의원 전용 입구’를 따라 지나쳐갔다.

손목에 걸린 노란 팔찌의 무게

그가 찾아간 토론회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3시간에 가까운 토론회의 마지막까지 그는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발언이 끝나면 토론장을 나오는 다른 의원들과는 달랐다. “세월호 문제이기도 하고, 전 아직 의원이 아니니까요.”

제20대 국회에 입성하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주민 당선자(43·서울 은평갑)는 말끝마다 “아직은 당선자”라는 꼬리를 스스로 붙였다. 몸에 밴 겸손과 처음 금배지를 단 쑥스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5월30일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 엄청나게 밀려들 일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잠시라도 미뤄뒀으면 하는 마음이 그의 말들에 묻어났다. 4월13일 당선되던 날 밤 세월호 희생자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가 손수 만든 노란색 당선증을 목에 걸어줄 때도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5월3일 세월호 특별법 개정 토론회를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그와의 만남을 자청한 독자 두 명이 함께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고대인 모임’의 대학생 박세훈(22)씨와 은평갑 주민인 대학생 봉국형(23)씨다.

토론회에 들어갈 때와 달리 그는 양쪽 손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팔찌가 없던 왼쪽 손목에는, 토론회에서 만난 세월호 희생자 영석이 엄마 권미화씨가 만들어온 노란 팔찌가 새로 채워져 있었다. 세월호 목걸이, 반지가 처음 나오면 제일 먼저 그를 찾아오던 영석이 엄마였다. 그는 “아마 아이(영석)에게 새 옷을 사주는 듯한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다”고 했다. 가끔은 부담스러운 기대와 차가운 시선에도 그가 국회의원이 되려는 건 이런 마음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어서였다.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네요.

선거 때는 아침마다 비비크림도 바르고 머리를 봐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까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 모습도 괜찮았는데요.

당선 인사를 다니고 있는데 제가 (모습이 변해서) 당선자인지 모르는 분도 계시긴 하더라고요. (웃음)

아직도 지역에서 당선 인사를 다니나요.

지역 주민들과 만난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은평갑 주민인 독자를 보며) 저 처음 보죠? 당선 인사를 꼼꼼히 다녀야 한다고 해서 지하철역, 큰 시장, 지역 행사를 갔어요. 그래도 부족한 듯해 더 할 겁니다.

‘의원님’이라 부르는 게 어색해요. 스스로는 국회의원이 된 걸 실감하나요.

아직은 당선인 신분이죠. 오늘같이 더민주가 전당대회를 언제 할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투표권이 있어 불려나가니까 ‘아, 내가 달라졌구나’ 느끼긴 해요. 그러나 아직 ‘국회의원이다’ 하는 느낌은 모르겠어요.

(봉국형)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24일 만에 선거를 치렀어요.

선거조직과 안면을 트고 투표한 날을 빼면 실제 선거운동은 15~17일 정도 했어요. 도와주시는 분들이 “인사해” 하면 인사하고 “차에 타” 하면 차에 타고 그랬어요. (웃음)

2년 만에 처음, 유가족의 웃음

그는 더민주에서 마지막으로 공천장을 받았다. 총선을 불과 24일 앞둔 3월20일에야 은평갑 전략공천이 확정됐다. 가장 늦게 출발한 캠프는 기적처럼 내내 순항했다. 공천 탈락한 이미경 의원이 선거조직과 사무실을 물려줬고 자원봉사자들도 줄을 이었다. 당 여론조사에선 선거 초반부터 ‘3자 구도’에서도 1위로 예측됐다. 막판까지 그는 서울 지역 최초로 김신호 국민의당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내며 최홍재 새누리당 후보에 14%포인트 넘는 차이로 압승했다.

선거운동 과정은 신기할 만큼 순조로웠네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좋은 분들을 만났고 좋은 일들만 일어났어요.


세월호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마침 열린 가족총회에서 그는 “제가 선거에서 지면 세월호 진상 규명 작업에 누가 될 수도 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우린 지는 데 익숙하다” “너 변호사로 더 할 수 있는 게 있냐”는 가족들의 말에 결심이 섰다.
하늘에서 아이들이 도와준 것처럼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항상 도와준다는 느낌이었고요. 제가 10년 넘게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쌓아온 복을 지금 쓰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박세훈) 누가 당선을 가장 기뻐했나요.

당선 다음날 (경기도) 안산에 내려갔어요. 많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기다리고 계셨어요. 마치 어렵게 돈 모아 서울로 유학 보낸 아들이 금의환향한 듯이 굉장히 대견해하시더라고요. 2년 만에 처음 웃어보신다고요. 저희 부모님도 좋아하셨어요. 제 짝꿍(아내)은 이랬죠. “이제 4년간 혼자 자게 됐다”고. (웃음)

‘세월호 변호사’로 불리기 한참 전부터 그는 ‘거리의 변호사’였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 사태,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광우병 사태 등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나온 이들의 한 발짝 뒤에는 늘 그가 서 있었다.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주류의 공식인 ‘대원외고-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가 ‘즐겁게 살기 위해’ 선택한 비주류의 삶이다.

(박세훈) 의외로 초엘리트 코스를 밟으셨네요.

제가 너무 똑똑해서요. (웃음)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고요. 대원외고에 갔을 때 놀랐어요. 아이들이 2학년 과정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학적 모드로 공부했죠. 하루에 5분만 의자에서 일어났어요. 수학여행 때도 단어장을 들고 갔죠. “저,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할 정도로요.

(봉국형) 잘나가는 법조인으로 살 수도 있었는데 왜 공익변호사가 됐나요.

고등학교 시절을 공부만 하느라 암흑기처럼 보냈어요. 대학을 가니까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동떨어진 상태가 돼 있었죠. 저를 회복하고 싶었어요. 그런 교육과정이 운동권이었죠. (웃음) 철거촌, 공장, 농촌, 그런 곳에 가서 제 자신을 회복시키는 걸 넘어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게 됐죠.

지난 11년간 유능한 변호사였나요.

처음 6년은 로펌 변호사를 하면서 공익소송도 했어요. 로펌에선 매출과 업무시간 등으로 평가하는데 1위를 놓친 적이 없었어요. ‘거리의 변호사니까 (다른 분야는)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도 기업, 경제, 금융을 잘 압니다. (웃음)

공익소송에선 ‘접견왕’이었다고요.

2년인가, 3년 연속 접견왕이었어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으로 시위·집회에서 연행된 분들의 전화가 와요. 대부분 바쁘다고 하는데 저는 접견을 빼지 않았어요.

똑같이 바빴을 텐데요.

다른 분들에게 도움 드리는 일을 하면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스타일이에요. 물론 이게 ‘쾌락의 역리’라고 해서… 지나치면 고통이 와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6개월 이상 했잖아요. 평일에는 로펌 일하고 주말에는 새벽부터 시위에서 연행된 분들 접견을 다녔죠. 나중에는 걷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짝꿍하고 신나게 데이트해야 할 때였는데, 제가 (데이트) 나가기만 하면 쓰러질 듯이 굴었죠. 지금도 욕을 많이 먹어요. (웃음)

등이 굽은 ‘거리의 접견왕’
‘세월호 변호사’로 불리는 박주민 4·13 총선 당선자(서울 은평갑)는 변호사로 활동한 2006년부터 거리에서 싸우는 약자 편에 서왔다. 경찰이 쏜 직사살수에 맞아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의 딸 백도라지(왼쪽 두 번째)씨와 박 당선자(맨 오른쪽)가 2015년 12월1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세월호 변호사’로 불리는 박주민 4·13 총선 당선자(서울 은평갑)는 변호사로 활동한 2006년부터 거리에서 싸우는 약자 편에 서왔다. 경찰이 쏜 직사살수에 맞아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의 딸 백도라지(왼쪽 두 번째)씨와 박 당선자(맨 오른쪽)가 2015년 12월1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거리에서 얻은 허리와 등의 통증은 세월호로 더 악화됐다. 유독 길었던 2014년의 여름과 가을을 국회 본관 앞 시멘트 바닥에서 먹고 자며 일하다 “몸이 완전히 맛이 갔다”고 했다. 어수룩해 보이던 그의 구부정한 모습이 그제야 달라 보였다.

지난 2년은 세월호에 다 쏟아부었죠.

사실 다 쏟아붓진 않았어요. 국가정보원 RCS(Remote Control System·해킹 프로그램) 사건이 터졌을 때 국민고발장을 썼고, 백남기 어르신 사태가 났을 때는 2차 민중총궐기를 열기 위한 소송도 했어요. 필리버스터 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전문가로 테러방지법 간담회에 참여했고요. 세월호를 많이 하긴 했죠.

공익변호사로서의 책임감이었나요.

세월호는 확실히 다른 경험이에요. 그 아픔의 크기가 굉장히 커서 쉽게 “이 정도면 됐다”고 말하기 어렵더라고요. 1년 정도 지났을 때 저를 걱정한 가족들이 “너, 계속할 수 있겠냐 없겠냐”고 물었어요. 제가 그랬죠. “지금 해결된 게 없는데 더 해야죠.”

지치진 않았나요.

가족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요. 방금 전에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는데 그 아픔을 스스로 위로할 시간도 없이 행진, 단식, 삭발, 농성 이걸 다 하신 거죠. 그런데도 결과는 매번 안 좋았어요. 그분들 힘 빠질 때마다 도와드리는 저도 면목이 없었죠.

(봉국형) 정치가 혐오스러울 것 같은데 오히려 정치에 뛰어들었어요.

강정도, 밀양도, 쌍용차도 (법으로) 잘 안 됐어요. 한계를 많이 느꼈죠. 세월호는 정치적으로 풀어보려 했지만 실패했죠. 그때마다 (정치) 바깥에서 욕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남들 보고) “네가 좀 들어가서 해” 그러면 (그 사람이) “내가 저렇게 더러운 구정물에 들어가야 하겠냐” 이래요. 그러면 또 제가 “저기 몸담기는 그렇지?” 그랬고요. (웃음) 그래도 정치는 바뀌었으면 좋겠고, 누군가는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 입당 제의를 받은 거예요.

망설이진 않았나요.

새누리당이 200석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죠. 들어가면 죽을 판이었어요. 당시 방송 진행자와 대학강사 자리도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흔들리는 제 자신을 보면서 비겁하다고 느꼈죠.

세월호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마침 열린 가족총회에서 그는 “제가 선거에서 지면 세월호 진상 규명 작업에 누가 될 수도 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우린 지는 데 익숙하다” “너 변호사로 더 할 수 있는 게 있냐”는 가족들의 말에 결심이 섰다.

‘세월호 경력’ 당장 빼라던 주문 ‘정치하려고 세월호를 이용했다’는 말도 나왔어요.

(1월25일) 더민주 입당 기자회견 2시간 전까지도 국회를 막 걸어다녔어요. ‘너무 힘들어, 못 견디겠어!’라고 말하고 싶었죠. 회견 뒤 ‘저럴 줄 알았어’ ‘정치하려고 했던 거야’ 이런 말이 쏟아질 테니까요. 그러다 시간이 돼서 그냥 입당 회견을 했어요. (웃음)

세월호 가족총회에서 약속한 게 있나요.

두 가지 약속드렸어요. 제가 당선되더라도 세월호는 기억할 거다. 저희 보좌진 중 한 명을 세월호 전담하도록 하겠다. 이미 세월호 가족들도 잘 아는 변호사를 채용했어요. 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주 일요일 가족 회의는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수첩에 적어둔 메모를 열심히 뒤적였다. 모든 정부 유관기관이 회의록을 제대로 작성·공개하도록 하는 정보공개 관련 법안, 검사장 이상 간부의 직선제를 담은 법안도 ‘박주민 법안 리스트’에 있었다. 피곤에 절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박세훈) 왜 세월호에 무기력했던 더민주를 선택했나요.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더민주는 소극적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진보정당은 힘이 약하니까요. 또 국민의당과 분화되면서 더민주의 가능성을 크게 봤어요.

다른 당에서도 영입 제의를 받았죠.

솔직히 지금 와서 이야기하면 영입 제의가 없었을 거 같습니까? (웃음) 있었어요. 꽤 진지한 제의를 다른 당에서도 받았어요. 그때는 정치할 생각이 없었어요.

10년, 20년 준비한 사람도 안 되는 게 정치판인데, 쉽게 정치를 시작한 편이에요.

쉽게 됐죠. 그런데 제 자신이 느끼기엔 쉽지 않았어요.

공천 과정이 많이 힘들었나요.

어떤 약속을 받고 간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입당 이틀 만에 한 당직자분이 저만 부르더니 “비례대표는 안 된다”고 싹을 자르더라고요. 당내 분위기가 그랬어요. 아, 근데 다 말해도 되나? 그날 가슴 아픈 말을 많이 들었어요. ‘혼자 당내에서 고생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때 기억이 나는지, 달변인 그가 말을 잠시 쉬었다. 세월호 변호사, 운동권 출신, 강경파 등의 말들이 그에게 비수로 꽂혔다. ‘짜도 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완전히 심신이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한 달, 두 달을 지냈다. 더민주로 간 걸 후회했겠군요.

많은 분들이 너무 마음 아픈 말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당에 약한 고리가 될 것이다.” “너는 얌전히 있어야 한다.” 제가 좀 뜨면 조·중·동에서 당에 공격을 가할 거라고요. 또 “운동권은 안 된다” “우리 당에는 변호사가 너무 많다” 이런 거죠.

세월호 가족들 기대도 컸을 텐데 괴로웠겠어요.

‘꿈을 접어야 하는구나.’ ‘그럼 나를 왜 영입했어.’ 괴로웠죠. 술도 많이 마셨고 담배를 하루에 두세 갑을 피웠어요. 또 밖에 나가서 피우긴 눈치가 보이니까 집 안에서 피웠죠. 짝꿍이 “너, 이번만 봐준다” 했어요. (웃음)

선거운동 중에도 세월호 변호사 이력이 문제가 됐죠.

지역 당 고문들이 전화하셔서 플래카드에 있던 ‘세월호 가족대책협의회 법률대리인’ 경력을 “당장 빼라”고 했어요. 선거에 이길 수 없다고요. 그래도 안 뺐어요.

당선되던 날 표정이 그래서 어두웠군요.

선거가 끝나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많아서요. 부담스럽다기보다는 책임감이랄까.

수첩에 빼곡한 법안 리스트

지나간 이야기를 끝내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이 빨라졌다.

당장 급한 게 세월호죠.

일차적으로 법을 개정해서 (6월 말 활동이 끝나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게 기한과 예산 문제를 풀어야 하고요. 특검도 진상 규명 수사를 할 수 있게 해줘야죠. 특조위도 두 번 요청할 수 있고, (별도로) 국회도 상설특검법에 의해서 특검을 또 요청할 수 있어요. 그리고 추모공원은 삽도 뜨지 못했어요. 지금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도 못해요. 이런 일들도 해야 해요.

‘이 정도면 됐다’라는 일의 목표가 있을까요.

제가 규정해놓은 참사의 원인이나 배후는 없어요.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 된다고 생각해요. 가족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봉국형) 야당들도 별 관심이 없는데 국회에서 잘 풀릴까요.

‘당내에서도 세월호에 관한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겠구나’ 라고 느끼고는 있어요. 그래도 당내에 세월호 특별위원회를 다시 만들어달라 하고 있어요. 우리 당 특위와 4·16연대, 가족대책협의회 간 네트워킹도 할 거예요. 표가 된다는 걸 느껴야 당이 움직이니까, 시민들과도 계속 교류하면서 이슈를 끌고 가아죠.

아주 작은 진전도 이뤘다. 더민주 초선 당선자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국회 개원을 하루 앞둔 5월29일 전남 진도 팽목항을 함께 가자’는 그의 제안에 초선 57명 중 26명이 동참의 뜻을 보내왔다.
세월호 말고도 그의 일 욕심엔 끝이 없다.
(박세훈) 발의를 준비 중인 법안이 있나요.

‘공공기관의 갈등관리에 관한 기본법’을 하고 싶어요. 참여정부 때 대규모 국책사업의 시행 절차를 담은 법안을 다 만들어놨다가 통과를 못 시켰어요. 밀양도 그렇지만 송전탑을 3천 개는 더 만들어야 한대요.

3천 개의 밀양이 더 생긴다면 재앙이네요.

그래서 (국책사업을) 설명하고, 의견 듣고, 계획도 수정하는 절차가 필요해요. 또 국회에서 조약체결절차법도 만들고 싶어요. 우리 헌법에 의해서 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져요. 그러면 의회의 통제를 받는 게 맞죠.

관심 분야가 다양하네요.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때문에 민의가 왜곡돼요. 뉴질랜드에선 국회의원 한 사람이 몇 년씩 특권을 포기해가면서 시민사회에 연계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로 간 사례가 있어요. 그렇게 해보고 싶어요.

그가 수첩에 적어둔 메모를 열심히 뒤적였다. 모든 정부 유관기관이 회의록을 제대로 작성·공개하도록 하는 정보공개법 개정안, 검사장 이상 간부의 직선제를 담은 검찰청법·공직선거법 개정안도 ‘박주민 법안 리스트’에 있었다. 피곤에 절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국회의원 한 명이 다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이건 제가 10년 넘게 공익변호사를 하면서 ‘아, 이런 제도가 있으면 많은 분들이 덜 고통받을 텐데’라고 생각해온 것들이에요. 남들이 “하나도 하기 어려울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맞죠. (웃음)

(봉국형) 은평 주민을 위해서 일할 시간이 남을까요.

지역 발전과 개발을 위한 숙원사업들도 조기에 마무리지을 거예요. 그런데 발전과 개발만으론 활기를 불어넣지 못해요. 전주 한옥마을처럼 콘텐츠로 승부를 거는 기획을 하고 있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으세요.

지금은 보좌관님들도 계시잖아요. 조금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민주의 어벤저스’ 될까

일 욕심 많은 그는 보좌진을 꾸리는 과정에서도 “피곤하고 힘든 의원실이 될 수 있다”는 사전 경고부터 하고 있다. 현행법상 문제만 없다면 자신의 세비를 들여서라도 많은 보좌진을 확보할 생각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때 거리 강연을 같이 했던 표창원, 진선미 당선자와도 일을 도모할 수 있을 듯한데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일로 ‘얼굴 좀 보자’ 했는데 다들 바빠요. 이번에 좋은 게 청와대 시스템에 대해 잘 아는 조응천 전 비서관님과 국정원에 대해 잘 아는 김병기 전 차장님도 당선됐어요.

더민주의 어벤저스인가요.

문제는 모일 시간이 없어요. (웃음) 뭔가 제19대 때와는 달리 잘해보자는 분위긴 확실히 있어요.

계파는 ‘친문’으로 분류되던데요.

문재인 전 대표가 나를 위해 뭘 얼마나 했죠? (웃음) 친문이라 보기 힘들고요. 국회에선 계파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고 하지만, 전 일을 하면서 여러 분들과 이렇게 저렇게 엮이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일파만파’ 어때요? 일 중심으로 모인 ‘파’고, 일파가 만파가 되고. 또 저 혼자 있는 ‘파’고. (웃음)

(박세훈)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럽지 않은가요.

그렇기도 하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해요. 그럴 때는 있어요. 지난주 금요일 밤에 맥주를 마시고 싶어 편의점에 갔는데 (눈치가 보여) 건강음료로 바꿨어요. 그래도 맥주가 마시고 싶어 어제 또 편의점에 들렀는데 사장님이 제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가끔 맥주를 사러 온다, 이해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웃음)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  있어온  사람”


대학생 봉국형(23) 독자
‘거리의 변호사’로, 운동가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라 공익법무 이외의 영역에는 문외한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박주민은 상상 속 외골수의 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기업·금융 소송 업계에서도 능력 있는 변호사이자, 공익을 위해 싸워온 따뜻한 활동가였다. 곧 지역구 시민을 포함한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역할도 잘 수행하리라 본다. 다양한 구상으로 가득 찬 그의 수첩은 그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를 가득 채워줬다. 초선 국회의원인 그가 이 모든 일을 4년 안에 이뤄낼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에 열정을 다하는 국회의원이 당선됐다는 것은 국민에게 제20대 국회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학생 박세훈(22) 독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박주민을 만나고 가장 먼저 떠오른 표현이었다. ‘세월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인생에서 스스로를 혹사시켜가며 무수한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 눈에 띄지 않는 박주민이 있었다. 사실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지역구 의원으로서도 꽤나 괜찮을 것 같다. 세월호 가족들을 챙겼듯이 지역 주민들도 잘 챙길 것이라는 확신이랄까. 변호사로서 박주민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한다. 이제 정치인 박주민이 얼마큼 할 수 있을지 기대한다. 앞으로 그의 등은 더 굽을지언정 그 뜻은 굽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녹취 김혜인 교육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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