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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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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마음을 준 게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국민의당 최경환 당선인… 20대 국회 입성 앞두고 내세운 중점 법안은 5·18 왜곡 행위 처벌법, 지역차별금지법
등록 2016-05-26 07:39 수정 2020-05-02 19:28



연속기획_ 20대를  부탁해


① 부산·경남 지역주의 - 김영춘 (더민주)
② 세월호 진실 규명- 박주민(더불어민주당)
③ DJ의 정치 의식 계승- 최경환(국민의당)
*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흥미로운 결과 가운데 하나가 호남 정치권력의 변화다. 호남은 선거 당시 창당한 지 2개월밖에 안 된 국민의당을 이 지역 제1당으로 올려놓았다. 국민의당은 호남 전체 28석 가운데 23석을 얻었고, 광주에선 8석 모두를 석권했다. 더불어민주당의 ‘호남 굴욕’이라 부를 만한 결과였다.
정치권에선 야권이 정권을 잡으려면 호남 지지만으론 어렵지만, 호남의 지지가 없으면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더민주가 지난 5·18민주화운동 전야제와 행사에 현역 의원과 20대 국회 당선자를 대거 집결시킨 것도 냉랭해진 호남의 마음에 다시 문을 두드리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호남은 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걸까. 호남은 국민의당을 믿을 만한 대안으로 선택한 걸까. 호남은 고립된 지역주의를 스스로 택한 것일까. 우리가 최경환 국민의당 당선인을 만난 것은 그런 궁금증에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20대 국회의원을 연쇄 인터뷰하는 ‘20대를 부탁해’의 세 번째 주인공이다. 은 독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사전에 받아 지난 5월19일 광주에서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국민의정부(김대중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한 최경환 당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비서관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편찬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비로소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광주 북구을에서 국민의당 현역 의원(임내현)이 참여한 당 경선을 뚫은 뒤 더민주와의 본선 대결에서 이겨 초선 의원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을 따른 ‘동교동계’를 지나, 이제 새로운 ‘뉴DJ(김대중) 세대’가 의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낙승을 거뒀지만 “(한번) 잘해보라고 기회를 줬을 뿐 호남이 마음을 내준 것이 아니다”라고 자평했다. “전국정당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과를 내야 지지층을 확대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신이 (다시) 튼튼히 협력해야 하며, 1기 김대중·2기 노무현 시대를 넘어 제3기 민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자신의 책무라고 말했다. 은 최 당선인의 인터뷰에 덧붙여, 호남 주민과 지역 인사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호남 민심을 추가 분석했다.
취재 송호진·서보미 기자, 편집 신소윤 기자, 디자인 장광석



최경환  당선인  프로필


1958년생(쌍둥이 형과 군대를 같이 가지 않도록 호적엔 1959년생으로 등록)
전남 장성 출생
광주상고-성균관대 사학과(13년6개월 만에 졸업)
학생운동, 재야 청년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방용석 의원 보좌관, 국민의정부 청와대 공보비서실 행정관·공보비서관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전직 대통령 비서관(2급)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겸 대변인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당선(광주 북구을)


국민의당 최경환 당선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린 광주 지역 사무실에서 호남의 민심,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을 얘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국민의당 최경환 당선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린 광주 지역 사무실에서 호남의 민심,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을 얘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최경환 국회의원 당선인은 ‘2016년 5월의 광주’와 가깝게 맞닿은 사람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두 차례 감옥(총 2년4개월)에 간 그는 제20대 국회의원선거(총선)에서 당선된 호남 의원 중 유일한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다.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곁을 지킨 마지막 비서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월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광주 북구을에서 당선돼 생애 처음으로 의회 입성을 앞뒀다. 호남에서 제1당으로 올라선 뒤 5월을 맞이한 국민의당에서 그는 원내기획부대표를 맡았다. 올해 5·18 행사에 참가한 현역 국회의원과 당선인의 수는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이 더 많았지만, 시민의 환대와 지역 언론의 카메라는 국민의당 지도부에 쏠렸다. 이 지역 정치권력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 당선인은 ‘5·18, 김대중, 국민의당’ 등 호남의 민심을 읽어내는 여러 키워드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약진시켜 견고한 양당제 구도가 흔들리는 데 일조한 호남의 민심을 그는 어떻게 읽고 있을까.

“살얼음판 민심 위에 서 있다”

5월19일 광주 사무실에서 만난 최경환 당선인은 5·18 공식 행사에서 제창이 이뤄지지 못한 것부터 짚고 넘어갔다. “(새누리당 과반 의석이 무너진) 이번 총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호남·역사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라고 보았던 제창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최근 청와대에서 여야 지도부를 만나 의회와 협조할 듯 보였던 박 대통령이 “불통과 마이웨이(나의 길을 가겠다)를 (다시) 선언한 것과 같다”고 그는 말했다.

최 당선인은 5·18 행사장에 함께 있었던 다른 야당의 모습에도 눈길을 돌렸다. 그가 지난 1월 탈당하기 전까지 몸담은 더민주는 이번 총선에서 호남 28석 가운데 3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는 “5·18 행사에서 더민주 의원들을 보니 광주를 대하는 자신감이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안 된다. 겸손한 태도도 좋지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김대중과 호남, 그리고 친노(노무현)’가 감정적으로 균열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김대중·노무현 정신이 다시 협력해야 하며 1기 김대중, 2기 노무현을 넘어 새로운 3기 민주정부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당도 호남이 준 기회에 들떠선 안 되며, “국민의당과 안철수 공동대표가 살얼음판 같은 호남의 민심 위에 서 있다”고 말했다.

호남에서 국민의당이 28석 가운데 23석을 얻었다. 왜 이렇게까지 밀어줬을까.

우선 이명박·박근혜 정부 8년에 대한 지겨움이다. 국가 운영도 잘못됐고, 남북관계도 악화됐고, 예산·인사 등에서 호남 차별도 심화됐다고 인식한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고 본 것이다.

둘째, 이를 견제하고 호남을 대변해야 할 더민주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야당답지 않다는 것이다. 야당의 전통적 기반이자, 아픔을 가진 호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고 안 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정치판을 흔들어보자, 자존심을 세워보자, 본때를 보여주자는 마음이 모아졌고, 그것이 국민의당을 통해 표출됐다. 오랜만에 호남에 경쟁 구도가 된 것은 좋은 현상이다. 야당 사이에 경쟁 구도가 되니 선거가 끝나고도 공부를 열심히 한다.

마음 줄 때는 70~80% 이상 지지 보내는데…[%%IMAGE6%%]호남에선 현역 의원 교체 여론이 높았는데 국민의당 현역 의원이 많이 당선됐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하나.

시민의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 다시 기회를 준 거라고 본다. 그리고 지역 활동과 주민 소통을 얼마나 꾸준히 했느냐가 당내 경선 통과의 성패를 가늠한다. 그래서 경선에서 현역 의원을 이기기 어렵다. 국민의당 현역 의원 일부가 교체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새누리당 심판과 더민주 경고 여론이 더 컸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국민의당을 대안으로서 선택했다는 일부의 분석은 잘못됐다고 본다.

왜 그런가.

호남이 국민의당에 마음을 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호남이 마음을 줄 때는 70~80% 이상의 지지를 보낸다. 대선에서 김대중·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때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이번에 광주에서 당선된 국민의당 후보들의 평균 득표율은 56%였다. 국민의당의 광주 지역 정당 득표율은 53%다. 이건 호남이 마음까지 준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와 잘 싸우고, 야당을 잘 키워보라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당에 가서도 얘기하고 있다.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는 호남의 살얼음판 민심 위에 서 있다. 안 대표도 호남이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4대강 “기존 정당 심판의 도구로 국민의당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희망도 섞여 있다. 국민의당을 통해서 양당(새누리당· 더민주)의 적대적 공존을 허물고 다당 체제를 만들어준 것이다.”
더민주를 아프게 때리기 위해 국민의당을 활용한 측면이 있다는 건가.

기존 정당 심판의 도구로 국민의당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희망도 섞여 있다. 국민의당을 통해서 양당(새누리당·더민주)의 적대적 공존을 허물고 다당 체제를 만들어준 것이다. 정치가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호남의 이익과 권리를 철저히 대변하라는 마음에서 국민의당을 선택한 것이다. 호남 주민들 중에는 친노 패권 정치가 이뤄지면서 (더민주가) 호남 정치에 무관심하고 호남을 들러리로 세웠다고 생각한다.

왜 들러리라고 느꼈다고 보나.

호남을 동원세력,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공깃돌 취급한다고 느낀 것이다. 호남 출신 정치인들이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호남 주민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연원도 봐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 송금에 대한 특검, 열린우리당 창당 등이 이뤄졌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정치 팬덤도 일어났다. 새로운 추세를 나도 인정하지만, 한편으론 전통 지지층(호남·김대중 지지층)을 소외시키고 이들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모는 상황이 벌어졌다. 야당의 전통적 뿌리인 김대중 지지 세력을 한쪽으로 치우려 하고.

최경환 당선인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들어 깊은 회고에 젖기도 했다. 박승화 기자

최경환 당선인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들어 깊은 회고에 젖기도 했다. 박승화 기자

“빨리 그 옷 벗으라”는 지역 여론 압박

‘친노 패권’은 일부 호남 정치인 등 야권 정치인들이 야권의 분열적 용어로 직접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표현이다. 하지만 최 당선인이 쓴 ‘친노 패권’에선 좀 다른 뉘앙스가 읽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인사들의 배타성을 지적하는 의미로 ‘친노 패권’을 인용한 뒤, 그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거리가 벌어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 당선인이 말하는 ‘친노 패권’은 무엇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며 배운 것은 포용·대화·타협·실사구시·중용 등이었다. 그런데 그쪽(친노)은 뭐랄까, 끼리끼리가 좀 강한 게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런 정서가 굳어진 것 같다. ‘저쪽은 구시대다. 우리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혼자 착하다고 생각하면 독선이 된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참여정부의) 호남 홀대론의 경우, 사실 (그게 맞는 말인지) 따져봐야 한다. 영남 보수정권 때보다 예산·인사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노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호남 주민이 그렇게 인식(참여정부 호남 홀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이 노무현 정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따랐던 영남 출신들의 끼리끼리 문화에 (일부) 있다고 본다.

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비서관들에 대해서도 대화 상대로 보기보다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난 ‘김대중 정부의 사람들도 민주화 투쟁을 하며 고통받았던 사람들인데, 저렇게 하는 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친노가) 의도적으로 호남을 홀대했다기보다 그런 끼리끼리 문화가 호남 홀대론 인식의 뿌리가 된 것 같다.

그는 지난 1월 자신이 모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당을 나와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당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빨리 그 옷(더민주)을 벗으라”는 지역 여론의 압박이 매우 컸다고 토로했다. 더민주 소속 명함을 주면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더민주의 분당 위기에서 문재인 전 대표가 ‘호남 없인 안 된다. 같이 해보자’고 더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고 말했다. “호남을 붙들지 않았다”는 인식을 호남에 남겼다는 것이다.탈당하며 “(향후) 김대중-노무현 세력을 통합하고, 호남을 일치단결시켜 새로운 정치질서 재편과 통합과 연대의 새 길을 찾겠다”고 밝혔다. 호남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의 통합이 가능할까.

200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했던 말이 있다. 중요한 말이었다. ‘김대중 시대가 따로 있고, 노무현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김대중-노무현 시대’로 가야 합니다. ‘김-노 시대’입니다. 그렇게 해야 성공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내 절반을 잃은 거 같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85살) 돌아가셨는데,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슬픔이 결정적이었다. 지금 김대중·노무현이 분리되고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말처럼 다시 튼튼히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김-노 시대’란 말 자체에는 또 함정이 있다. ‘김-노 프레임’으로는 국민의 뜻을 담을 수 없다. 안철수 현상이 나왔듯, 제3·제4의 세력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런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흡수해야 한다. 1기 김대중, 2기 노무현을 넘어 3기 민주정부로 가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훈과 정신, 교훈을 받아안아야 하지만, (김대중) 세력으로 이어가려는 것은 안 된다. 이건 노무현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싶다. 재야와 정부에서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 국민의당보다 더민주에 훨씬 많다. 그분들과 대화를 많이 해봐야겠다.

DJ에게 배운 정치인의 소명의식
최경환 당선인(맨 오른쪽)이 5월18일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장병완 의원과 함께 광주학생독립기념관을 나서고 있다(위쪽). 최 당선인이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유품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연합뉴스

최경환 당선인(맨 오른쪽)이 5월18일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장병완 의원과 함께 광주학생독립기념관을 나서고 있다(위쪽). 최 당선인이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유품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연합뉴스

내년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야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은 자기 밭을 잘 갈아 각자의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 국민의당은 호남·중도주의 성향의 지지 기반에 충실하면서 중간지대로 확장하고, 더민주는 수도권과 영남에서 지지 기반을 넓혀가는 것이다. 연합의 묘미를 어떻게 살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국민의당과 더민주가 통합(합당)해 여당과 다시 일대일 구도가 되면 보수 쪽으로 (다소) 기울어진 운동장이 재연될 것 같다. 지금 같은 다당제 구도를 유지하면서 영남과 호남이 함께 정권 교체에 나서는 연합의 접점이 있을 것 같다.

일부 비박근혜 인사, 새누리당 출신의 합리적 성향 인사들과 국민의당이 연대하는 정계 개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새누리당과 연정·연대는 안 된다. 이번 총선의 민의는 새누리당 심판이었는데, 갑자기 우리가 새누리당과 연정한다고 하면 되겠나. 그러나 합리적이고 중도·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새누리당의 일부 정파·인사와는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DJP 연합을 이뤄 1997년 정권을 교체했을 때 복지·민주주의·남북평화에 대한 김대중 정신과 정체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5·18 정신, 햇볕정책, 김대중 정신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국민의당의 정체성이다. 이건 호남인들의 정서이며 건드려서는 안 되는 가치다. 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연합할 수 있다.

그는 초선 의원으로는 비교적 늦은 58살에 의회에 들어온다. 김 전 대통령의 말년을 함께 보내고,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에도 자서전 편찬 등을 하면서 독자 정치에 나설 기회를 빨리 갖지 못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뒤 “(김 전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기뻐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살아 계셨다면 아주 좋아하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김 전 대통령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가.

김 전 대통령을 모시는 게 보람되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배움의 시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 일기장에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는 말을 남겨놓았다. 납치·망명·사형선고 등 험난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한 글을 보고 정치인의 소명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 비전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비록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해도 원칙을 잡고 꾸준히 해나가면, 설령 당대에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비정규직·청년 문제 해결이 곧 정의”
최경환 당선인(가운데)이 5월18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박지원 원내대표(왼쪽),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참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최경환 당선인(가운데)이 5월18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박지원 원내대표(왼쪽),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참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늦어지게 돼 아쉬운 점은 없었나.

김 전 대통령은 3가지 꿈(교수, 대통령, 노벨상 수상)을 스스럼없이 얘기했던 분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정치를 돕는 스태프로서 역할을 생각했으니, 권력 의지가 부족했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 나에게 ‘정치를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생각이 없다. 대통령을 더 모시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정치를 결심했다.

학생·청년운동을 하며 두 차례 감옥에 갔다. 그런 희생과 참여로 민주사회를 이뤄내는 데 힘을 보탰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과거 시대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나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을 모신 마지막 비서관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DJ의 마지막 비서관인 최 당선인의 정치적 소명감은 무엇인가.

김 전 대통령의 특징은 시대 상황을 파악하고, 대중이 알아듣는 언어로 앞서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김 전 대통령이 3대 위기(서민경제·민주주의·남북관계 위기)를 말한 것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지금은 그 3대 위기가 더 악화됐다. 3대 위기 극복뿐 아니라, 두 가지를 더 하고 싶다.

역사 정의 회복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친일독재가 미화되고, 5·18이 훼손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유명무실하다.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은 민주정부(김대중-노무현)에서 이미 정리된 문제였는데 다시 등장했다. 바로잡아야 할 역사의 정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과거 시대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나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을 모신 마지막 비서관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사회·경제적 정의의 회복도 중요하다. 과거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가 지금 양극화란 말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청년 문제 해결이 곧 정의다. 국민의당 당선인 모임에 갔는데 시대 흐름을 전반적으로 통찰하기보다는 미시적 정책이나 과제에 머문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가적 함정에 빠져 있다. 정치는 큰 틀에서 방향을 보여주면서 구체적 정책을 함께 제안해야 한다.

20대 국회 초반에 중점을 둘 법안이 있나.

5·18 왜곡 행위 처벌법을 만들려고 한다. 5·18은 유네스코에 관련 기록물이 등재되는 등 국제사회에서 평가받은 민주화운동이다. 그런 숭고한 정신을 잇기보다 폄훼하고 왜곡하는 게 도를 넘었다. 독일 등 유럽은 나치를 찬양하거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행위를 부인하면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있다. 5·18을 비하하거나 왜곡하면 법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있다.

지역차별금지법도 검토하고 있다. 전남대(객원교수)에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남대이면 그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곳인데도 ‘나는 지방대야, 기회가 없을 거야. 나는 전라도 사람이야’라는 눈빛이 읽힌다. 이걸 풀어줘야 한다.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DJ의 정신을 잇는 ‘뉴DJ 정신’은 무엇인가.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남북평화 등 자기가 세운 원칙에 충실했고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하면서도 일관됐다. 중요한 건 그걸 국민의 요구와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과를 거뒀다. 우리 정치도 시민의 요구와 정치의 지향점을 일치시켜야 한다. 국민은 그런 비전을 보여주는 지도자를 갈망한다.

뉴DJ 정신은 도전과 용기다. 국가적 비전을 앞장서서 주장할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갖춘 차세대 그룹이 나와야 한다.

“국가적 비전 호명하는 것이 호남 정치”국민의당은 호남 정치의 복원을 주장해왔다. 추상적이라 잘 이해되지 않는다. 최 당선인이 생각하는 호남 정치 복원이란 무엇인가.

이번 총선에서 (호남이 특정 정당에 표를 준 것에 대해) 호남 지역주의, 호남의 세속화란 얘기가 나오던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수도권과 지방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근본적으로) 지방이 너무 취약하다. 이건 대구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권력과 예산을 더 주는 방향으로 자치·분권이 확대돼야 한다. 그리고 호남은 이기적이면 안 되나? 자기 지역의 권익과 이익을 대변하려는 세력을 미는 것이 왜 세속화인가. 호남이 과거에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면, 이제 (지역 발전이란) 합당한 대우도 해줘야 한다.

그러나 호남인들은 지역을 대변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중요한 건 김대중·노무현처럼 큰 리더십을 형성해서 민주주의·남북관계 등 국가적 과제에 충실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지역 일만 잘해주는 것은 (호남 사람들이 원하는) 호남 정치의 복원이 아니다. 호남은 큰 꿈과 국가적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 (결국) 힘을 모아줄 것이다.

최경환은  누구?


DJ의  마지막  비서관


민의당 최경환 국회의원 당선인은 경제부총리를 지낸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과 이름이 같다. 새누리당 의원이나 기자들도 간혹 헷갈려 최 의원에게 보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그에게 잘못 전송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의 이력은 확연히 대조된다. 행정고시로 관료가 된 최 의원이 ‘친박근혜계 핵심’이라면,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된 최 당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년을 지킨 ‘DJ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다.
최 당선인은 195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7남매 중 다섯째인 그는 일란성쌍둥이다. 가정 형편을 고려해 5분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과 같이 광주상고에 들어갔다. 형은 부모의 기대대로 은행·금융감독기관 등으로 진출했고, 그는 성균관대 사학과(79학번)에 들어간 뒤 투옥·제적·복학 등 험난한 길 위에 섰다.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1981년 처음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이른바 ‘학림사건’에 연루돼 43일간 폭행을 당하며 불법구금된 뒤 1년6개월간 수감됐다. 교육부총리를 지낸 새누리당 황우여 의원이 당시 2심 판결 배석판사였다. 2010년 법원은 “장기간의 불법구금·고문·협박 등으로 조작된 사건”이라며 학림사건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뒤늦게 선고했다.
그는 고 김근태 전 의원이 의장으로 있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소속으로 1986년 서울 종로2가에서 ‘광주학살원흉처단국민대회’를 주동해 10개월간 다시 수감됐다. 이후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성남 민청련 활동, 재야운동을 했다. 그러다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총재 김대중) 소속으로 비례대표에 당선된 노동운동계 방용석 의원의 보좌관으로 3년6개월 동안 일했다.
그는 1999년 말부터 국민의정부(김대중 대통령)에서 공보비서실 행정관,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대 자신과 함께 민청련 막내 그룹이던 박선숙 당시 청와대 부대변인의 추천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언급할 때 그는 1982년을 떠올린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5·17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을 1982년 12월 석방해 미국 망명을 보내면서, 학림사건의 몇 사람도 함께 풀어줬다. 최경환 당선인은 이때 형기 만료 40여 일을 남기고 석방됐다. 나중에 김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덕분에 감옥에서 40여 일 먼저 나왔다”고 하니,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일이 있었나? 그땐 모두 힘들었지”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최 당선인은 퇴임 이후 서울 동교동 자택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킨 마지막 비서관이었다. 청와대 비서관들이 올린 국내외 상황과 여론에 관한 보고서 중 김 전 대통령의 눈에 자주 띈 보고서가 그의 것이었다. 그는 청와대 근무 당시 시중의 생생한 여론을 전했고, 김 전 대통령은 그런 보고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서거할 때까지 모든 일정·언론 인터뷰 등을 조율했고, 서거 당시에도 슬픔을 누르고 국장 상황 브리핑을 하며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모시며 편찬 등을 진행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떠난 3년 뒤에야 2012년 총선(당내 경선에서 패배)에 처음 도전한 뒤 2016년 총선 당선을 통해 정치적 홀로서기에 나섰다. “민주주의·역사의 후퇴와 역주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치를 결심했다.
이번 선거를 준비하면서 그가 제대로 나온 자료 사진이 거의 없어 애를 먹었다고 선거캠프 관계자들이 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삶의 끝을 지킨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최 당선인은 주요 행사의 사진에서 뒤로 빠져 있거나, 사진을 찍는 대열의 가장자리에 겨우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광주=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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