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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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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스타일’ 꺾일까

등록 2008-07-03 15:00 수정 2020-05-02 19:25

투수 윤길현의 ‘욕설 사건’ 책임지고 한 경기 결장한 김성근 SK 감독, ‘기분 나쁜’ 경기 운영 멈춤?

▣ 김동환 기자 hwany@sportsworldi.com

노감독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감정이 북받친 듯 목이 메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야구감독 인생 40년 만에 처음으로 자진해서 한 경기 감독석을 비우기로 국민 앞에 약속하며 머리를 조아린 직후다.

현역 프로야구 지도자 중 최연장자이자, 통산 1900경기 출장에 빛나는 김성근(66) SK 감독. 그가 지난 6월1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를 스스로 등졌다. 최근 야구판을 한바탕 소란스럽게 했던 이른바 ‘윤길현 사태’에 대한 사과와 자책의 의미였다.

완성품인 ‘승리’만 생각하는 ‘야구 장인’

지난 6월15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 기아의 경기 도중 SK 투수 윤길현(25)은 기아 베테랑 타자 최경환(36)에게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위협구를 던진 뒤, 따지듯 노려보는 최경환을 향해 침을 뱉고 턱을 추켜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어 최경환을 삼진으로 아웃시키고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최경환 쪽으로 험한 욕설을 내뱉어 야구팬들을 경악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스승’으로서 책임을 진 것이다.

윤길현의 행위가 준 충격과 비교하며 ‘그깟 한 경기쯤 결장하는 게 뭐라고’라는 식으로 대수롭잖게 얘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살을 깎는 아픔”이라며 고통스러워했다. 사과 기자회견 뒤 선수들과 경기장으로 향하지 못하고 호텔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는 참았던 눈물을 남몰래 훔쳤다. 김성근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60여 년 인생을 오로지 야구만 알고 야구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느 야구감독에게 야구가 안 중요하겠냐마는 김 감독은 마치 야구를 위해 사는 사람 같다는 경외감을 준다. 야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정도를 떠나 그와 30분만 얘기하면 놀라운 식견과 애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하게 지나치는 야구의 모든 부분에 크고 작은 의미가 다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김 감독에게 야구 경기는 그저 투수가 잘 던지고 타자들이 잘 쳐서 상대를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9회에 이르기까지 매 상황에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어떤 선수를 어떻게 기용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종합적 ‘예술’의 과정이다. 물론 그 예술의 최종 완성품은 ‘승리’다.

혹자는 김 감독에게 ‘장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승리라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선수들을 단련시키고 경기를 풀어나가는 데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펼쳐나가려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명의 장인을 보는 듯하다.

김 감독의 좌우명은 ‘일구이무’(一球二無)다. 한 장군이 해질 무렵 호랑이를 발견하고 목숨에 위협을 느껴 마지막 남은 하나의 화살을 쏘아 호랑이를 명중시켰는데, 알고 봤더니 화살이 꿰뚫은 것이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다는 고사성어 ‘일시이무’(一矢二無)를 변형한 것이다. 두 번째가 없다는 절박함으로 공을 던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완벽히 이겨야 하는 사투다. 그냥 판을 벌여놓고 선수들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한 뒤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매 상황에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한 번은 터질 줄 알았다” 성토 행렬

6월24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를 보자. 김 감독은 SK가 1-0으로 앞서던 2회말 선발투수 송은범이 볼넷 하나와 안타 두 개로 동점을 허용하자 왼손 타자 이승화 타석에 주저 없이 왼손 투수 이승호로 바꿔버렸다. 송은범의 컨디션과 타구의 방향을 봤을 때 1∼2점은 더 줄 것 같았는데, 상대 선발 송승준의 구위가 역시 별로여서 얼른 송은범을 내리고 계투작전을 펼치면 경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 김 감독의 설명이다.

기대대로 이승호가 호투하고 5회 김재현의 3점 홈런 등으로 6-2로 다시 앞서나갔지만 김 감독은 이후에도 김원형, 이한진 등 4명의 투수를 더 투입해 롯데의 추격을 봉쇄하는 데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팀 마무리 투수 정대현을 7회 2아웃부터 투입해 9-5 승리를 완벽히 지켰는데, 이는 롯데 타자들의 스윙 궤적이 이한진과 같은 사이드암의 공은 퍼올릴 수 있지만 정대현과 같은 언더스로 투수의 공은 제대로 쳐낼 수 없다는 통계와 분석에 의한 용병술이었다.

이렇듯 ‘장인’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는 공수 짜임새에서 올 시즌 가장 완벽한 팀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에 이어 올 시즌도 절반을 넘어서도록 7할이 넘는 승률을 유지하며 2위와의 격차를 10경기 이상 벌리는 독주를 계속하고 있다. 팀 타율과 팀 방어율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로 투타에 빈틈이 없다. 팬들은 김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SK는 1위 팀으로서의 존경심보다는 마치 ‘공공의 적’처럼 나머지 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다. 이번 윤길현 사건 때도 피해 당사자인 기아 팬들뿐 아니라 두산, 롯데, 삼성, LG 등 대부분 구단 팬들도 “언제 한 번은 터질 줄 알았다”며 SK 성토 행렬에 동참해 결국 구단 사장 및 감독의 공식 사과 기자회견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는 단순히 1위 팀에 대한 시기나 질투라기보다는 김성근 감독의 장인정신과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부산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우리 사회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자신의 신념을 사수한 외곬 인생을 살아 늘 외로웠듯이 김 감독도 타협을 불허하는 소신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많은 적을 만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1989년 만년 꼴찌팀 태평양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도 선수 기용에 대한 구단의 개입에 맞서다 다음해 쫓겨났다. 2002년에는 LG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키고도 코치 선임 문제로 구단과 갈등하다 재계약하지 못했다. 게다가 김 감독은 재일동포 출신이다. 국내 야구계에 이렇다 할 학연이나 지연이 없어 실력을 인정받으면서도 늘 ‘아웃사이더’였다.

그런데 지난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SK를 만나 팀으로서나 본인으로서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면서 강자의 위치에 섰다. 그러자 그의 고집스런 완벽주의적 경기 운영 스타일은 다른 팀들에 대한 배려나 예우가 전혀 없는 ‘비신사적 플레이’ 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 하면 된다는 ‘승리지상주의’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많은 현장 지도자와 선수들이 “SK가 많은 점수 차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계속 투수를 바꾸고 번트나 도루를 시도하는 것은 패자를 고려하지 않는 부관참시”라며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또 여유 있게 1위를 달리고 있는 SK 선수들에게 “상대에게 절대 기싸움에서 밀리지 마라. 당하면 바로 되갚아줘라”고 독려하면서 상대 타자를 맞히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투수를 2군으로 보내버리는 등 지나치게 공격적인 대응을 주문한 것이 이번 사태를 낳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례 아닌 범위 내에서 최선 다할 것”

어쨌든, 이 일로 40여 년 지도자 생활 중 처음으로 자신의 전부인 야구장을 스스로 하루 떠나 불면의 긴 밤을 보내고 돌아온 김 감독은 “힘들기도 했고 나를 되돌아볼 시간도 가졌다”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그러면서도 “결례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경기에 임하는 소신은 꺾지 않았다.

어쨌든 김 감독의 ‘살을 깎는 자책’을 제물로 야구판은 표면적인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치열한 순위 싸움과 함께 신경전은 다시 과열될 수밖에 없다. 절대 강자 SK의 완벽하지만 ‘기분 나쁜’ 경기 스타일을 나머지 팀들이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을지가 남은 정규 시즌 및 포스트 시즌의 또 하나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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