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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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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우아한 드레스 입고 쓰레기를 버리다

[코로나 뉴노멀]
2부 1장 11개 나라에서 온 편지 ⑧이탈리아
등록 2020-06-02 07:23 수정 2020-06-13 05:30
공연이 중단돼 계속 집에 갇혀 지내던 박사라씨가 4월 옷장에서 잠자던 연주복 드레스를 꺼내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섰다.

공연이 중단돼 계속 집에 갇혀 지내던 박사라씨가 4월 옷장에서 잠자던 연주복 드레스를 꺼내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섰다.


‘같은 바이러스, 다른 대응’. 인간이 거주하는 땅덩어리 대부분은 코로나19에 의해 점령됐다. 하지만 이 사태에 맞서는 각 나라의 대응은 같지 않다.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여기 코로나19를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을 소개한다. 11개 나라에 흩어져 사는 교민들에게 편지를 받았다. 같은 재난에 맞선 각 나라의 다른 대응을 들어본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신기자 3명이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외부자의 눈으로 분석한 글을 보내왔고, 국내 코로나 최고 전문가 5명이 내부자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좌담을 정리했다_편집자주

2월14일 점심을 먹으러 즐겨 찾던 일식당에 갔다. 입장과 동시에 모든 시선이 날아와 나를 훑어본 뒤 테이블의 화두는 코로나와 치나(중국)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트램(전차)에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알레르기로 참지 못한 나의 조신한 기침 한 방에 홍해 갈라지듯 길이 터졌다.

2월23일 극장에서 1시간을 앞두고 공연이 전면 취소됐다.

3월9일 이탈리아에 봉쇄령이 떨어졌다. 장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 슈퍼마켓에 파스타랑 커피가 동났다. 극장 동료 중 코로나19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접촉자들을 검사하라는 공문이 떴다.

3월18일 온라인으로 장 보기 위해 밤 12시에 미친 듯이 클릭을 했으나 오늘도 실패다. 근처 병원 응급실에 얼마 전 취직한 마르티노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연인 친치아도 맛과 향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검사는커녕 아주 여유롭다.

밤이 되면 발코니에서 이웃과 생사 확인

3월27일 오늘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에 919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내 주치의였던 루이지 아저씨도 코로나19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밤 9시마다 이웃집 녀석 눈치오가 음악을 튼다. 선곡 센스가 끝내준다. 이탈리아 국가로 시작해 죽은 이들을 위한 애도의 트럼펫 연주로 마무리한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집에 산 지 9년 만에 발코니에서 이웃들과 생사를 확인하며 인사를 나누게 됐다. 가끔 귀찮아서 안 나가면 길 건넛집 아주머니가 손전등으로 내 방 창문을 비추며 재촉하지만 썩 싫진 않다.

4월3일 한국 정부에서 보낸 전세기를 타고 많은 한국인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존버’(끝까지 버티기)하겠다 외치던 사람들도 도저히 안 되겠다며 짐을 쌌다. 나는 극장 문이 언제 다시 열릴지 몰라 고민 끝에 남기로 결정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원형탈모까지 왔다. 한 달간 집에만 있었더니 미칠 것 같다. 옷장에서 잠자던 화려한 연주복 드레스를 입고 먼지 쌓인 화장품으로 무대화장을 해보았다. 그런 모습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니 옆집 아주머니가 창밖으로 박수를 보냈다.

4월25일 오늘은 이탈리아의 독립기념일이다. 집집마다 초록, 하양, 빨강 세 가지 색의 국기가 걸렸다. 앞집 아주머니가 한 집도 빠짐없이 국기를 걸자고 연락했다. 이탈리아 국기가 없는 나는 초록 티셔츠, 하얀 티셔츠, 빨간 후드점퍼를 옷걸이에 걸어 창밖에 내걸었다.

5월4일 오늘부터 봉쇄령이 조금 완화돼 이제부터 애인은 방문할 수 있지만, 친구는 아직 방문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사랑의 나라답다. 여전히 하루 사망자 100∼200명에 확진자 1천∼2천 명 수준인데, 다들 청명한 봄 날씨에 정신을 잃었는지 거리에 사람이 꽤 많다.

5월18일 총리가 오늘부터 많은 게 허용된다고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동할 때 자술서를 쓸 필요도 없고 모든 상점과 박물관, 성당 등이 다시 문을 연다. 공연 극장과 영화관도 6월15일부터 정상 운영한단다. 패션의 도시답게 형형색색 마스크를 낀 사람들로 거리가 복작였다. 코로나19와 공생을 선택한 것일까. 예전부터 나에게 ‘이탈리아는 어떤 나라냐’라고 물으면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나라”라고 답했다. 지옥 같았던 이 두세 달에 아디오(Addio·작별)를 고하고 천국이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밀라노(이탈리아)=글·사진 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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