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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대신 노조와 교섭한 경찰관 ‘김 사장’

삼성의 조력자들 ② 현직 경찰이지만 ‘김 사장’이라 불린 남자, 회사 대신 노조와 ‘블라인드 교섭’
등록 2020-02-29 13:50 수정 2020-06-26 07:08

표지이야기


판도라 상자가 열리다

2019년 5월2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삼성과 유착한 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9년 5월2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삼성과 유착한 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규모 있는 산별노동조합(연맹)에서 ‘대외협력’ 업무를 하는 이들도, 규모 있는 기업에서 ‘노사’ 업무를 하는 이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현직 경찰이지만 ‘김 사장’이라 불렸던 그 사람.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의 주요 대목에서 등장하는 ‘주연급 조연’이 바로 김아무개 당시 경찰청 정보국 외근노정팀장(경정)이었다.

김 사장은 1986년 순경으로 임용돼 1997년부터 줄곧 20년 넘게 ‘노정’ 업무를 맡았다. 고용노동부·노사정위원회나 주요 노조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노사분규가 ‘치안 부담’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화물연대, 철도파업,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등 ‘전국 단위’ 노사분쟁에서 양쪽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2018년 6월30일 정년퇴직한 지 얼마 안 돼 검찰의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구속됐고, 2019년 12월 1심에서 징역 3년에 벌금 5천만원을 선고받았다. 삼성을 대신해 노조와 교섭한 대가로 6천여만원을 받은 게 뇌물 혐의였다.

노조와 공식적 만남 전 유족과 합의

<한겨레21>이 입수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1심 재판기록을 보면, 김 사장은 오래전부터 삼성그룹 인사 담당자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경찰대 출신 강경훈 당시 미래전략실 인사 담당 부사장은 김 사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노사 업무를 하면서 경찰청 정보국 노정팀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김 사장을 알게 됐다. 능력이 탁월하고 경험도 많아 제가 배우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 꾸준히 교류했다.” 강 부사장은 김 사장의 경찰 후배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만났다. 이 모임에는 삼성에 노조 와해 전략을 조언했던 송아무개 자문위원도 함께했다. 송 위원 역시 김 사장과 출신 지역이 비슷해 오랜 기간 교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사장과 삼성전자서비스가 ‘업무적’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은 2013년 12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종범 조합원이 숨졌을 때다. 당시 삼성은 협력사 대표들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하고 고의적으로 교섭을 지연시키는 ‘노조 와해’ 전략을 펼칠 때였다. 그런데 최 조합원이 목숨을 끊자, 노조는 열사투쟁위원회를 꾸려 서울 서초사옥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등 투쟁 수위를 높였다.

이때 김 사장은 삼성전자서비스 인사팀장 최아무개 전무에게 “지금은 내가 노원경찰서 정보과장으로 있어서 개입할 수는 없고, 서울지방경찰청 금속노조 담당 신○○ 정보관을 소개해주겠다”고 연락한다. 신 정보관의 중재로 삼성은 노조와 최 조합원의 유족과 합의한다. 당시 삼성은 협력업체 노조인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공식 만남조차 갖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 정보관이 삼성의 요구로 합의를 중재하고 돈심부름까지 했다. 이후 김 사장은 최 전무에게 연락해 삼성 텔레비전을 직원 할인가로 산다.

2014년 2월 경찰청 외근노정팀장으로 복귀한 김 사장은 그해 5월 염호석 노조 양산분회장이 숨진 이후 삼성이 염호석의 장례가 ‘노조장’으로 치러지게 하지 않기 위해 염씨의 부친과 합의하는 자리에 등장한다. 그는 최 전무가 요청해 현장에 나타났으며, 합의금 6억원도 직접 제시했다. 김 사장은 이후 아예 삼성을 대신해, 노조와 교섭한다. 공식 교섭은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를 대리한 경총과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하지만,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를 대신해 경찰인 김 사장이, 삼성전자서비스를 대신해 노조 관계자 1명이 나와 교섭한 것이다.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블라인드 교섭’이라 불렀다. 지회 조합원들도 이 교섭의 존재를 몰랐다.

최 전무는 블라인드 교섭 역시 김 사장이 제안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교섭이 너무 진전이 안 되고 있던 중, 김 사장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람 하나를 소개해줄 테니 직접 교섭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금속노조 경기지부 조아무개 부장이었다”고 했다. 이 블라인드 교섭을 바탕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교섭은 한 달여 만인 6월28일 ‘기준 단체협약’ 체결로 마무리된다. 김 사장의 블라인드 교섭 참여는 2017년까지 이어졌다. 노조에선 초기엔 조 부장이, 2대 지회장 선거 이후엔 라아무개 당시 지회장이 나왔다.

2019년 5월14일 유남영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이 ‘고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경찰의 사과와 경찰 정보활동 범위 축소를 권고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19년 5월14일 유남영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이 ‘고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경찰의 사과와 경찰 정보활동 범위 축소를 권고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조직력으로 나와 붙으면 죽는다” 협박도

김 사장이 노사분규 중재가 아니라, 삼성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는 사실은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삼성 쪽엔 “노조 내부는 정파 간 반목과 본조(금속노조) 간부 및 지회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현존하고 있으나, 대세는 우리가 희망하는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듯합니다”라고 말했고, 노조에는 “경솔하게 움직여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우를 범하지 말라” “(노조) 집행부 조직력으로 나와 붙으면 죽는다”고 압박했다.

강경훈 부사장은 김 사장에게 “노조의 요구사항을 무마하라”고 하거나 “왜 라아무개 (요구사항이) 톤다운(낮아짐)이 안 되냐”고도 채근했다. 김 사장은 삼성에 항의하기도 한다. 2016년 8월 김 사장이 최 전무에게 ‘SS교섭 유감’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지네들이 다 줘놓고 날더러 빼라 한다. 빼는 게 어디 쉽나. 그래도 어쩌랴 아는 놈이 빼라는데 빼고 봐야지. 그래서 뺐다. 하나도 아니고 몇 개를. 빼서 시원하신가.” 삼성의 요구에 노조 요구사항을 빼줬다는 취지로 보인다.

김 사장은 삼성의 ‘교섭위원’으로 나선 대가로 삼성에서 6천여만원의 금품을 받았다. 2014년 8월부터 2017년 9월까지 현금·상품, 골프 접대, 휴대전화 3대 등 종류도 다양했다. ‘교섭비용’ 명목으로 송아무개 자문위원을 통해 현금도 받았다. ‘교섭비용’은 교섭 상대방이던 라아무개 지회장과 술을 먹거나 차비 명목으로 지급된 현금을 말했다. 김 사장은 국가정보원 예산으로 자신에게 지급되는 돈을 라 지회장에게 썼다는 말도 했다. 라 전 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술을 마신 것은 내가 사 쪽과 원활히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택시비를 몇 번 받은 적은 있는데 얼마인지 몰랐고, 써서는 안 될 돈이라 생각해서 택시기사에게 다 줬다”고 진술했다. 그는 “김 사장의 요구를 들어준 적은 없다. 김 사장도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금속노조는 ‘블라인드 교섭’과 라 전 지회장의 금품 수수 등에 대해 자체 진상 조사를 하고 있다.

노사관계가 극단일 때 나타나는 기이한 행태

재판기록에는 김 사장이 삼성전자서비스 말고도 SK브로드밴드(SKB) 교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김 사장이 회사 임원에게 아들의 채용을 청탁한 사실도 드러난다. 김 사장은 “2015년 2월 SKB 인사 담당 김아무개 상무에게 ‘우리 아들이 인턴 원서를 냈는데 잘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SKB에서는 내가 노조 문제에 개입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들이 인턴에 합격했고, 2016년 1월1일 정식 발령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희망연대노동조합 SKB비정규지부는 협력사 사장들에게 교섭권을 위임받은 경총과 교섭하다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김 사장이 노조에 “익명을 조건으로 노조와 원청의 집중 교섭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한다. 희망연대노조 관계자는 “우리 입장에선 중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또 삼성에서처럼 노조가 김 사장과 교섭했다거나, 김 사장이 (노조와 원청 간) 교섭에 영향을 미친 사실도 없었다”고 했다. SKB 쪽은 <한겨레21>에 “김 사장의 청탁과 관계없이 채용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면서도 SKB가 김 사장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교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는 답변을 거부했다.

경찰이 노사분규에서 회사 쪽을 대리하고 그 대가를 챙기는 기이한 행태는 원·하청 간 (간접고용) 노사관계가 양쪽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경찰의 상황이 겹쳐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한 산별노조 관계자는 “간접고용 노사관계에서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에 아무리 교섭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노조의 수위 높은 투쟁이 이어진다. 이때 경찰이 중재에 나선다고 하면 노조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원청에도 교섭 의무를 부여해 정상적인 교섭이 이뤄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기이하면서도 불법적인 원·하청 간 교섭 관행이 사라질 수 있다.

부하 직원이 뭘 했는지 모른 ‘정보경찰’

김 사장과 신 정보관이 삼성의 돈심부름을 한 것을 두 사람의 직속 상관은 “몰랐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당시 경찰청 정보국 정보3과장 이아무개 총경은 신 정보관이 합의금을 유족에게 직접 전달한 사실에 대해 “나중에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사정이 있겠지 하고 묻지 않고 넘어갔고, 앞으로는 돈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김 사장의 ‘블라인드 교섭’ 참여에 대해서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몰랐다”고 말했다. 정보력이 ‘생명’인 정보경찰이 정작 자신의 부하 직원이 뭘 했는지 몰랐던 셈이다. 그는 2016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시위, 유성기업 노조 반발, 삼성전자서비스 열사투쟁 등 문제성 노조의 불법시위를 엄정하게 관리, 사태 확산 차단에 주력했다”는 공적으로 녹조근정훈장까지 받았다.

검찰은 삼성 노조 와해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 사장이 근무했던 정보분실을 압수수색하고 정보관 여러 명을 조사했다. 그러나 <한겨레21>이 경찰청 감찰담당관에 확인한 결과, 경찰은 삼성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돈심부름을 한 정보경찰과 그 정보경찰의 상관에 대해선 징계를 비롯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한겨레21>은 제1302호 ‘누가 ‘김 사장’을 모르겠습니까’ 제목의 기사에서 경찰청 정보국 김아무개 전 경정이 참여한 삼성전자서비스 원청과 노조 사이의 ‘블라인드 교섭’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한겨레21>은 “이 교섭이 비밀에 부쳐졌”고 “지회 조합원도 교섭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보도했으나, 2014년 5월23일부터 6월28일 노사 간 단체협약 체결 때까지 이뤄진 교섭에 참여했던 당시 금속노조 경기지부 조아무개 부장은 “당시 교섭은 금속노조에 보고된 뒤 이뤄졌으며, 진행 경과도 조합원에게 보고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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