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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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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야근·폭언… 삼성에 노조가 필요했던 이유

자살·야근·폭언에 신음하던 삼성 노동자들
등록 2020-03-14 05:15 수정 2020-06-26 07:10
2019년 11월16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회관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16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회관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관리의 삼성’이란 말이 있다. <한겨레21>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1심 재판기록에 포함된 삼성 문건(주로 삼성전자, 인사 업무 중심)을 보면, 왜 ‘관리의 삼성’이라 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여러 개인정보를 조합해 등급을 만들어 이에 따른 조처 사항을 제시하는 인력관리는 치밀하고 정교했다. 이러한 관리 능력은 자살 예방을 위해 마음건강 고위험군을 관리하는 ‘선의’를 위해 쓰이기도 했지만, 회사에 불만을 표하거나 노동조합 결성을 꿈꾸는 이들을 문제 인력으로 분류해 ‘탄압’하는 용도로도 썼다.

‘관리’의 두 얼굴

삼성은 임직원 ‘마음관리’(정신건강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인사팀이 2013년 11월 작성한 문건을 보면, 삼성전자는 ‘THC(Total Health Care) 마음건강 시스템’으로 임직원들의 마음건강 상태를 지표화해 관리하고 있었다. 강북삼성병원 등에서 이뤄진 임직원 종합건강검진 결과와 마음건강 관련 설문조사 결과, 여기에 회사생활 관련 지표를 수치화했다. 회사생활의 경우 노동시간, 징계, 전배, 병가, 장기 출장, 가족 사망뿐만 아니라 관리자가 해당 직원을 면담한 뒤 부여하는 점수도 있다. 이 점수를 종합해 고위험군과 관리주의 대상을 선별했는데, 2012년 기준 고위험군·관리주의 인원은 3320명으로 전체 직원의 3.7%(2013년은 2.2%)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런 직원들에게는 사내에 설치한 상담센터(라이프코칭센터)에 상담받도록 권유하고, 관리자가 면담하도록 절차가 설계돼 있다.

재판기록에는 자살·우울증 관련 문건이 많이 나온다. 2012년 노사전략 문건을 보면, 임직원 건강검진 결과 직원의 31%가 스트레스, 12%가 우울증 판정을 받았고, 자율출근 대상 직원 중 밤 11시 이후 퇴근하는 인원이 12%에 이르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건에는 “과다 잔업(연장근로), 언어폭력, 자살, 우울·스트레스 같은 조직관리 ‘4대 취약 요인’을 ‘제로(0)화’ 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마치 군대에서처럼, 폭언 근절 캠페인을 하고, 언어폭력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관리자 대상 자살징후 예방교육도 하기로 한다.

삼성이 마음건강 관리를 노사전략 목표 선순위에 둔 것은 2009~2013년 5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자살한 사람이 26명에 이르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6.6명이고, 당시 삼성전자 직원이 8만~10만 명인 점을 고려하면 삼성전자에서 자살한 임직원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26명 가운데 절반인 13명이 20대였고, 2011년에만 7명이 자살하는 등 내부적으로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정리한 자살 이유는 가정불화(8명), 신병비관(7명), 정신질환(5명), 금전문제(3명), 이성문제(3명) 순이었다. 다만 이 자살 이유들이 명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 염호석씨가 숨진 직후 삼성은 염씨의 “노조가 승리하면 장례를 치러달라”는 유서 내용을 노조에 들키지 않으려 했고, 자살의 다른 이유를 찾기 위해 경찰의 여자친구 면담 내용까지 확인하려 했던 것도 회사가 정리한 자살의 이유를 그대로 믿기 어렵게 한다.

52일 연속 출근, 38일 연속 야근

자살 원인은 다양하고 하나의 이유만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삼성전자가 문건에서 스스로 밝힌 것처럼, 연장근로·언어폭력·스트레스 등 역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삼성전자의 연장근로나 스트레스 문제는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3년 6월4일 삼성전자 IT·모바일부문 대표이사는 “무선사업부 임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한다는데, 정말 그런지,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 상태에서 액셀을 더 밟아도 되는 건지, 아니면 풀어줘야 할 시점인지 논의해보자”고 인사팀장에게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다.

닷새 뒤 그룹 임원회의에서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의 ㄱ상무가 52일 연속 출근, 38일 연속 밤 12시 이후 퇴근과 같은 피로 누적 상태에서 출근하다 차량이 전복돼 전소되는 사고가 일어났다”며 “갤럭시 기어 출시 때문이라지만 이런 가혹한 일정은 말이 안 된다. 인사(팀)가 나서서 악착같이 개선 조치하고, 현업에서 ‘ㄱ상무 때문에 일 못 시키겠다’는 말이 나와야 한다”는 언급도 나온다. 갤럭시 기어는 2013년 9월 출시된 삼성전자의 첫 스마트워치였는데, 그룹 내부에서조차 ‘가혹한 일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해(1~11월) 삼성전자 전체 임직원의 월평균 평일 연장근로시간이 당시 법적 기준인 월 52시간을 초과하는 이들의 비중은 5.4%였으며, 휴일근로 월 40시간을 초과한 이들의 비중은 2.7%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보면, 적어도 2013년에는 삼성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내부 노동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직원들 스스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해결할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익명게시판을 운영했는데 시시각각 이 익명게시판의 여론을 분석하고 관리해왔다. 그리고 성과급 지급 같은 회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사람들을 찾아내 ‘퇴직 유도’ 등을 계획했다. 익명게시판 작성자들의 성향도 분석해 평가했다. 익명게시판에 글을 자주 올리는 사람들이 “인사고과 수준이 다소 낮고, 부서 평균 대비 연장근로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고, 잡포스팅(다른 업무 지원)이 많은 등 조직 부적응·불만 인력이 다수”라는 식이다.

2020년 2월 결성된 한국노총 전국삼성디스플레이노조는 <한겨레21>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사내 게시판에 불만사항을 올리면 팀장·그룹장에게 불려가 게시글 삭제를 강요당하기 일쑤였다. 작은 이슈라도 확산 차단을 위해 실시간 감시를 당했고, 이것이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느꼈지만 개인이 대응하기에는 한계를 느껴 포기하고 절망했다”고 밝혔다.

노동조건에 불만은 있지만 회사와 소통할 방법이 없을 때, 직원들은 보통 ‘우리 회사에도 노조가 있었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조를 만들었던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비노조 전략’을 내걸었던 삼성의 부당노동행위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뒤늦게나마 검찰 수사로 노조 와해 사실이 드러나면서 삼성그룹에도 노조가 생기고 있다. 2019년 11월 전국삼성전자노조, 2020년 2월 삼성디스플레이·삼성화재에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하는 노조가 생겼다.

삼성에 잇달아 생기는 노조

진윤석 한국노총 전국삼성전자노조 위원장이 <한겨레21>에 말했다. “삼성전자에선 (인사)고과제도 때문에 사원들끼리 적이 되어 싸우고 고과권자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 퇴직을 거부하면 급여와 퇴직금이 깎이는 최하위 평가를 주겠다고 협박받는 상황, 임원의 성희롱을 신고해도 피해자만 고통받는 상황 등 불합리가 계속됐다. 사람들이 노조에 함께하는 이유를 종합해보면 ‘회사생활이 너무 불행한데 그만둘 수가 없다’였다. 회사의 잘못된 부분을 잘못됐다 말하고 고쳐나가고 싶다. 조합원들이 친구 등 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노조를 만들겠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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