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강정 10년, 마을은 어떻게 짓밟혔나
② 강정마을의 이주자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여러 운동 현장에서 중요한 일부였던 평화활동가 오두희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 ‘오도독’으로 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여태 몸을 안 담갔어요. 내 강정 기지 반대 운동은 이제 시작이죠. 여태까지가 주민들과 함께하는 연대운동이었다면, 지금부터는 평화활동가들의 주체운동이 시작되는 거지요.”
뜻밖이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랬다. 활동가 오두희는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몇 해 전 그가 환갑을 맞았을 때, 여러 사회운동가들이 그의 환갑을 맞아 활동 기록 정리 작업을 기획했다. 몇몇 언론이 인터뷰 요청도 했다. 모두 거절했다. 오두희는 주인공이길, 전면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까칠한 사람”이다.
주인공 자리 피하는 ‘까칠한’ 사람그리고 밝았다. 인터뷰가 진행된 2시간 동안 패배의 기운이나 무력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2011년 ‘평화바람’이 처음 제주 강정마을로 내려올 때, 오두희는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대추리의 아픔이 너무 컸고, 국가가 한다고 하면 할 것이기에 신부님 혼자 갔다오시라”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싸움이 끝나간다고 하는 지금 오히려 “이제야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걸 역설하며 “진짜 평화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나가겠다”고 말했다. 7년 전이 아닌 이제 막 강정마을에 내려온 사람처럼.
오두희. 전북 전주 출신. 굳이 학번을 밝히자면 74학번이다. 한국 나이로 예순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역 활동가’다. 그런데 부를 직함이 마땅치 않다.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면 ‘강정 주민 오두희씨’로 최근 기사에 등장한다. 그녀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오두희를 그냥 주민이라고 해도 되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한참 스크롤을 내려야 ‘제4회 이우정 평화상’ 수상 관련 기사가 보인다. 그것도 벌써 2008년, 10년 전 일이다. 그 10년 동안 오두희는 한국 사회 가장 뜨거운 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72학번이고, 부인 김정숙 여사가 오두희와 같은 74학번이다. 오두희 또래 남자 운동가들은 지금 대부분 은퇴(?)했거나, 일찍이 운동을 떠났거나, 옛 운동 경험을 밑천 삼아 벌써 출세했다. 하지만 오두희는 30년 넘는 사회운동 경력에도 그 흔한 직함 하나 없이 여전히 지역 활동가로 남았다. 사실상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6월1일, 강정마을 미사 천막에서 만난 오두희에게 “뭐라고 부를까요?” 했더니 그가 멋쩍게 웃으며 “그냥 강정 사는 주민 오도독(별명)”이지 할 뿐이었다.
한평생 활동가였던 오두희에겐 위아래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흔히 작동시키는 위계 설정 자체가 없다. 누군가 위를 고집할 때, 반드시 아래가 생긴다. 겉으로 평등을 말하는 이가 무수히 많지만 익숙한 위계가 흔들리는 순간마저 인정하는 이는 많지 않다. 활동가들조차 마찬가지다. 아래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건 언제나 옳고, 늘 쉽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 실제 밑을 향하는 실천은 활동가들에게조차 배반적인 결행이다. 사회운동의 일부가 제도적 시스템 안에 포섭된 상황에서 “현장은 언제나 괴로운 곳”이다.
위계 없는 활동가오두희가 몸담고 있는 ‘평화바람’은 특별한 회의도 체계도 없다. 아침밥을 함께 먹으며 얘기하고 공감한다. 유사가족 형태로 오랫동안 한국 사회운동에 헌신해왔다.
문정현 신부를 단장으로 2003년 만들어진 평화운동단체 ‘평화바람’은 이런 풍토 속에 언제나 아래를 향하는 현장 활동만 했다. “누군가 괴롭다고 하면 아무튼 그곳으로 가는 게 일”이었다. 판단의 기준은 “현장의 곤란함” 하나뿐이었다. 괴로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어렵게 말할 순 없다. “어려운 말로 평등을 말할 수 없고, 더 우울한 사람들 앞에서 처져 있을 수도 없는 활동”을 평화바람은 흥으로 타고 넘었다. 평화바람이 노래해온 ‘평화’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고, 두꺼비·맹꽁이·도롱뇽이 서식처를 잃지 않는 것이고,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다.
긴 세월 활동가로 살아온 오두희의 원칙은 하나였다. “그냥 시작하지 않고, 시작하면 그냥 물러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오두희의 운동은 “몸과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를 가지면 시작하고,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방식”뿐이었다.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젊은 날의 오두희는 이론을 중히 여겼다. “혁명의 꿈”을 꿨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통한 사회 변혁”은 지금까지도 오두희의 중요한 바탕이다. 그래서 오두희는 문정현 신부를 처음 만났을 때, “전혀 미덥지가 않았다”. “사제로서 신실한 소명감은 알겠는데, 계급의식이 투철해 보이진 않던 신부님”이었다.
오두희와 문정현의 만남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올해로 딱 30년이다. 학생운동 이후 오두희는 “전북 지역 최초 여성 위장 취업자”가 됐다. 수배 생활은 길었다. 꽤 오랫동안 공권력을 피해 성당에 숨어 살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이른바 ‘유화 국면’이 시작됐을 때 많은 수배자들처럼 오두희도 수배에서 풀려났다. 그러곤 가톨릭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던 ‘군산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이 됐다. “노동자대투쟁을 앞두고 열정적으로 전북 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하던 무렵” 문정현 신부가 군산에 노동사목으로 부임했다.
당시, 문정현 신부는 ‘인혁당 사건’으로 잘 알려진 전국구 인사였다. “‘빵동지’였던 DJ(김대중)가 호남을 방문하면 인사를 하러 올” 정도였다. 하지만 문 신부는 “노동자를 잘 몰랐다”. 문정현 신부는 “신성한 성당 마당에서 노동자들이 밤새도록 토론을 벌이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해도, 때때로 술까지 먹는다”며 탐탁지 않게 여겼다. 몇 번이고 오두희를 불러 나무랐다. 오두희는 그때마다 바락바락 맞섰다. “신부님은 왜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려 들지 않느냐”고 따져물었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다. 투쟁을 준비하던 노동자들이 성당 마당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문 신부는 사제적 양심에서 그것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비폭력 투쟁이 능사는 아니지만 신자들이 오가는 성당 마당에서 화염병을 만드는 걸 그냥 놔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두희는 크게 반발했다.
계산은 없다, 시작하면 끝낸다그런 문정현 신부를 달라지게 한 건 “하루에 라면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는” 노동자들의 피폐한 현실과 오두희의 헌신이었다. 화염병 얘기를 듣던 문정현 신부는 “나는 NL(민족해방)이고 오두희는 PD(민중민주)였지. 오두희가 내 계급 선생님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던 문정현 신부와 오두희는 1997년 운명을 바꾸는 투쟁을 함께 시작했다.
1997년 군산시민모임은 군산 미군기지 내 활주로의 사용 대가로 지급하는 금액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훗날 ‘SOFA개정 국민행동’과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운동’으로 이어진 투쟁의 시작점이었다.
이 활동의 시작에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애초 이 문제를 넌지시 알려준 이는 다름 아닌 ‘국방부 관료’였다. 문정현 신부와 오두희가 군산 미군기지 문제를 잘 몰랐을 때, 한 국방부 관료가 문 신부를 찾아와 “대한항공이 내는 활주로 임대료 문제”를 귀띔해줬다. “국방부가 직접 얘기하긴 뭣하니 좀 나서달라는 의미”였다. 미군기지 내 활주로를 둘러싼 상식 밖의 불평등을 인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군기지 앞에서 매주 한 번씩 집회를 하게 됐다. 관심을 갖고 보니 범죄행위가 엄청났다. 서해에 무단으로 오폐수를 갖다 버리는 환경문제를 비롯해 땅을 뺏어가는 공여지 문제, 기지 주변 살인사건을 포함한 범죄행위까지.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기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문제들을 파악해가며 오두희는 “군사주의가 민주사회에 던지는 폐해”를 인지했고, 제도적으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은 평화바람을 ‘문정현 패밀리’라 부른다. 얼핏 보면 “유사가족” 같기도 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문정현 신부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늘 싸웠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근엄하게 원로 대접만 받아도 될 때 “늘 판이 깔리면 맨 앞에 나섰다”. 그래서 보수언론은 그를 ‘깡패 신부’라 불렀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의 전문 시위꾼’이라고도 칭했다. 하지만 문 신부가 그렇게 오래 싸우고 늘 앞에 설 수 있었던 데는 오두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배후에서 활동하는 참모”로 오두희는 늘 문정현의 투쟁에 함께했다.
하지만 제주 강정에 내려올 때는 의견이 좀 달랐다. 문정현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2010년 겨울, 강정마을 주민 고권일이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너무 힘들다, 마을에 좀 내려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문 신부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는 가야 하겠다, 주민들이 이렇게 찾아오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오두희에게 함께 가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오두희는 달랐다. “신부님은 나서면 되지만, 어떤 투쟁에 어떻게 결합할지를 판단”하는 건 오두희의 몫이었다. 처음에 문 신부는 혼자 일주일을 강정에 다녀왔다. 이후 매일같이 아침밥을 먹을 때마다 강정 이야기를 했다. 큰 배낭 하나에 짐을 싣고 그렇게 둘이 강정마을로 내려온 게 2011년 7월이다.
‘문정현 패밀리’의 배후꽃마차로 대변되는 평화바람, 그리고 오두희의 활동은 언제나 아래로 더 곤란한 현장으로 향했다.
내려와서 보니 “견적이 빤한 싸움”이었다. “그렇게 하면 잡혀갈 것이고,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될지” 보였다. 오두희는 강정마을 투쟁에서 시급한 건 ‘재정 사업’과 ‘장기 투쟁 대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방 부대의 역할을 자임”했다. 평화바람 식구들은 ‘강정상단’을 꾸려 갈치를 팔았다. 한 달 동안 갈치 1200만원어치를 팔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오두희는 “우리가 하는 건 주민들 지원이다, 언젠가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정해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주민들의 뜻에 따라 빠져나오게 된” 경기도 평택 대추리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제주는 섬이었다. 섬은 육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계기를 잡았다. 2012년 12월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육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정현 신부는 문재인 당선을 위해 나섰다. “정권 교체 외엔 주민들의 뜻을 관철할 방법이 없었다.” 문 신부는 사재 5천만원을 털어 ‘함께 살자 전국투어’를 후원했다.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그 마지노선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선 패배는 가혹했다. 실낱같은 기대가 무너지자 주민들과 갈등이 심해졌다. 어떤 주민들은 대놓고 지킴이들에게 “너네들이 끝까지 여기서 살 것이냐”고 물었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나가달라’는 의미였다. 오두희는 그때 결심했다. “마을에 대한 책임을 이제 여기서 져야 한다. 여기서 떠나면 주민들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박근혜가 당선되고 나서 떠나려던 오두희는 주민등록을 강정으로 옮겼다.
살려고 보니 공간이 필요했다. 2년의 준비를 거쳐 2015년 ‘성프란치스코센터’가 완공됐다. 문정현 신부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해 받은 국가배상금을 종잣돈으로, 시민 모금을 더해 강정에 평화의 거점을 세웠다. 폭등한 제주 땅값을 감안하면 이명박 정부 때 더 넓은 부지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두희는 “박근혜에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 단단하게 깨우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주민들에게 34억5천만원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문재인 당선 이후 구상권 철회가 이슈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문제는 부차적이다. 지금 중요한 건 “지난 10년 동안 발생한 국가폭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진상 규명’이다. 진상 규명이 되면 잘잘못이 가려지고 구상권은 자연스레 정리될 것이다. 지난 10년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과와 인정이 있어야만 주민들도 해군기지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지금 강정 문제를 보는 오두희의 시선이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오두희는 더 멀리 보려 한다. “훗날 설령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군사기지와의 공생을 택하더라도, 이 군사기지가 반평화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군사주의가 공동체를 어떻게 억압했는지 끝까지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진다. 그건 “현안을 두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지루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게 뻔하다. 너무 힘들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우문이었다. 30년차 활동가, 아니 강정 주민 ‘오도독’은 현답을 내놓았다.
“나는 현장이 좋아요. 역동적이고 신나잖아. 이것도 살아 있으니까 하는 거죠. 운동은 각각의 삶 속 활동으로 있는 거예요. 그게 편해요.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항상 생각하고, 중심에 들어가서 주류로 사는 것보다 경계를 지향해요.”
글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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