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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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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기댈 곳은 마을

찬반 주민 갈등, 국방부와의 싸움으로 점철된 세월…

대다수는 “국가의 사과와 주민 명예회복 우선”
등록 2017-06-27 11:56 수정 2020-05-02 19:28
2007년 8월20일 제주 해군기지 유치 찬반투표 개표 중인 강정마을 주민들. 연합뉴스

2007년 8월20일 제주 해군기지 유치 찬반투표 개표 중인 강정마을 주민들. 연합뉴스

제주 강정마을에선 지난 10년 동안 두 개의 싸움이 벌어졌다.

시작은 2007년 4월26일이었다. 강정마을회 임시총회에 주민 87명이 모여 ‘해군기지 유치’를 박수로 의결했다. 대다수 주민들은 ‘졸속 박수 의결’에 분개했다. 마을엔 ‘매향노(마을을 팔아먹은 자)는 꺼져라’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2007년 8월10일 당시 해군기지 유치를 이끈 윤태정 마을회장이 마을총회에서 해임됐다. 마을은 해군기지 찬성파와 반대파로 쪼개졌다. ‘가족은 제삿날에도 모이지 않았고, 친·인척들은 서로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고 마을 주민들은 증언했다. 길을 지나다 반대편 주민을 보면 먼저 본 이가 눈을 돌리는 마을이 됐다.

두 개의 싸움

새로 취임한 강동균 마을회장이 이끄는 마을회가 2007년 8월20일 마을총회를 열어, ‘해군기지 건설’ 찬반 재투표를 부쳤다. 참석자 725명 중 680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국방부(해군)는 주민 동의 없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마을에선 찬반 주민들의 싸움과, 반대 주민과 국방부의 싸움이 10년간 이어졌다.

강정마을회와 은 지난 5~6월 6주간 강정마을 주민 101명에게 설문조사를 하면서 ‘지난 10년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가장 상처받은 일’을 적어달라고 했다. 주민 101명 가운데 69명이 이 주관식 문항에 응답했다. 그중 30명은 ‘주민과의 갈등’ ‘공동체 파괴’ 등 마을 공동체가 깨지는 과정에서 겪은 상처를 언급했다. 8명은 ‘주민 동의 없는 해군기지 건설’을 가장 상처받은 일로 꼽았다.

일방적인 국가시책사업 과정에서 등 돌리는 이웃에 마음을 다친 강정마을 주민들은 이제 무엇을 믿고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

주민 101명의 설문조사 결과, 마을 주민들은 그 답을 다시 ‘마을’에서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강정마을회가 주최하는 주민투표에 참여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77명이 ‘있다’고 답했다. 10명 중 8명이 여전히 마을회를 통해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사안에 따라 다르다’(13명), ‘없다’(8명), 기타·무응답(3명)이 뒤를 이었다. 지난 10년간 국가에 치이고, 이웃에 상처받아 지칠 대로 지쳤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목말라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설문 결과로 해석된다.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강정마을회 부회장)은 6월22일 과의 통화에서 “해군기지 건설 과정은 주민들이 자율적인 결정권을 침해당하는 과정이었다. 스스로 마을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주민들에게 절실한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유치·건설 과정에서 침해당한 ‘마을 자치’는 기지 찬성·반대를 떠나 마을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에서 ‘향후 마을회는 해군과 상생·협력해야 한다’고 응답한 40대 여성도 ‘가장 상처 입은 일’을 적는 난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과정이 좀 나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썼다.

“미군 오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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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주민들은 나아가 마을회가 ‘국가의 사과와 주민의 명예 회복’을 우선 요구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서 ‘해군기지와 관련해 현재 마을에서 가장 강하게 요구해야 하는 사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복수응답)에 ‘국가의 사과와 주민 명예 회복’을 꼽은 주민이 73명으로 가장 많았다. ‘경제적 보상’(19명), ‘관심 없다’(8명), ‘기타’(7명), ‘성공적 건설’(5명) 등이 뒤를 이었다. 설문에서 한 60대 남성은 “국가는 진상 조사를 철저히 하여 마을 주민에게 사과하고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사과와 공동체 회복을 위해선 ‘진상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취지다. 고권일 대책위원장은 “진상 조사는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일방적인 추가 기지 확장이나 미군기지 유치, 제2의 강정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난 10년간 제주 해군기지 유치·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편법·불법 행위와 마을 주민들이 겪은 피해를 낱낱이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2016년 2월26일 준공됐지만, 주민들에게 기지 ‘건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주민들은 여전히 해군기지 확장 또는 미군기지 유치 등을 경계하고 있다. 미 해군이 제주 해군기지를 동북아시아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지난 6월20일 미 해군 이지스구축함 듀이가 미 해군 함정으론 두 번째로 제주 해군기지에 입항했다. 6월22일엔 캐나다 호위함 2척도 입항했다. 한·미·캐나다 해상 연합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강정마을회는 “미 구축함의 제주 해군기지 입항은 제주 해군기지를 미국의 거점 군사기지로 기정사실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갈등을 심화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런 주민들의 심리는 설문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주민들은 미군기지 추가 유치에 강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마을에 추가로 미군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주민 101명 가운데 83명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모르겠다’(10명), ‘기타·무응답’(6명), ‘찬성’(2명)이 뒤를 이었다. 설문에 응답한 한 70대 남성은 “만약 미군까지 들어오면, 토박이였는데 마을을 떠날 생각도 있다”고 밝혔다.

해군에 대한 불신

주민들은 이미 마을에 들어온 한국 해군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설문에서 ‘앞으로 마을회가 해군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해군이 주민에게 사과하면 상생·협력한다’는 주민이 38명으로 가장 많았고, ‘계속 반대한다’(30명), ‘상생·협력한다’(17명), 기타·무응답(9명), ‘각자의 길을 간다’(7명) 등이 뒤를 이었다. 해군기지가 완성된 지 1년4개월이 흘렀지만, 해군에 ‘계속 반대한다’(30명)는 주민과 ‘사과하면 상생·협력한다’(38명)는 주민이 101명 중 68명에 이른 것이다. 해군에 강한 불신과 원망을 가진 마을의 현실을 보여주는 설문 결과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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