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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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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초고압 송전탑 '유령합의' 의혹

반대주민·대책위, 2014년 한전과 내양·고정마을 간 합의에

위장전입 등 ‘가짜 주민’ 있었다고 주장
등록 2017-09-19 08:54 수정 2020-05-02 19:28



세  마을  잔혹사


1부  제주  강정마을
① 강정 10년, 마을은 어떻게 짓밟혔나
② 강정마을의 이주자들
③ 강정 10년, 전수조사
2부 경남 밀양
① 전기 따라 마을은 무너졌다
② 국책사업의 이면
③ 가짜 주민, 가짜 합의


밀양 주민 정임출씨가 2014년 8월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열린 ‘6·11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헌법소원 기자회견’에 참여해 행정대집행 당시 경찰의 인권유린 행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내양마을 조정이 이뤄진 지난 9월13일 만난 정씨는 2년 전에 견줘 크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밀양 주민 정임출씨가 2014년 8월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열린 ‘6·11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헌법소원 기자회견’에 참여해 행정대집행 당시 경찰의 인권유린 행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내양마을 조정이 이뤄진 지난 9월13일 만난 정씨는 2년 전에 견줘 크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판사가 내한테 최고 원하는 기 뭐고 카대.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 되는 기다고 했다. 내가 부정한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받는다, 정당한 돈이어야 받는다(고 말하니), 정당한 돈은 어떤 기고라고 묻더라. 내 노력해서 받는 돈이 정당한 돈이라꼬 생각한다고 했다.”

“부정한 돈은 안 받는다”

지난 9월13일 낮 12시께 경남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만난 부북면 내양마을 주민 윤여림(78)씨는 열변을 토해냈다. 그는 자신이 낸 소송과 관련한 조정위원회가 정회된 틈을 이용해 잠시 법원 건물 밖에 나왔다. 윤씨는 3월 그가 살고 있는 내양마을자치회를 상대로 ‘총회결의무효확인소송’을 냈고, 판사는 이 소송을 중재로 전환하자고 원고와 피고를 달랬다. 이날은 윤씨 소송의 2차 조정기일이었다. 마을자치회를 대상으로 윤씨와 똑같은 소송을 제기한 고정마을 안병수(69)씨가 옆에 앉아 묵묵히 말을 들었다. 이날 함께 열리기로 했던 고정마을 조정위원회는 전날 마을자치회의 요청에 의해 10월17일로 미뤄졌다.

2014년 12월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 수송을 목적으로 경남 양산~밀양~창녕을 지나는 765kV 초고압 송전선로 공사는 완료됐다. 그로부터 2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핵발전과 송전선로 건설에 저항하는 밀양 사람들의 저항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한국전력(한전)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는 이는 150여 가구에 이른다. 윤씨는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대책위)와 함께 낸 이번 소송이 ‘돈잔치’로 전락한 국책사업을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라 믿는다.

2014년 7월26일 한전은 “주민 쪽이 제기한 집단 민원은 완전히 종결된 것으로 하고, 본 공사와 관련해 추가로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은 물론 일체의 공사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양마을에 4억7천만원을 지급했다. 초고압 송전탑을 만들어 발생하는 피해는 건설 찬반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돈은 찬성한 가구에만 돌아갔다. 찬성 가구는 한전이 지급한 돈의 40%는 개별보상금(1억8800만원)으로 쓰고, 60%는 마을공동사업비(2억8200만원)로 돌렸다. 한전은 합의서에 “마을공동사업비는 개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으며, 개인별 현금 지급시 민형사상의 책임을 진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찬성 가구는 2016년 1월17일 마을총회를 열어 이 돈도 갈라 쓰기로 결정했다. 윤씨와 대책위가 ‘나눠 가질 수 없는 돈을 나눠 가지기로 결정한 마을총회의 결정은 무효’라는 소송을 낸 근거다. 내양마을 25가구 가운데 끝까지 반대한 가구인 윤씨와 윤씨의 처남 정진홍(69)씨네는 결국 아무 보상도 받지 않았다.

윤씨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로 발생한 마을 공동의 피해를 치유하는 데 쓰여야 할 돈이 찢기는 걸 막기 위해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이 2차 조정위원회를 통해 내린 결론은 엉뚱했다. 재판부는 이날 “(반대 가구인) 윤씨 등 두 세대에게도 마을공동사업비를 배분하라”고 조정 결정을 내렸다. 이 조정으로 윤씨와 처남 정씨는 1200만원을 받게 됐다. “부정한 돈은 안 받는다”던 윤씨는 조정위원회가 끝난 뒤 기자에게 분한 듯 “내는 그 돈 안 쓴다”고 말했다. 아내 정임출(75)씨도 “더러운 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더러운 돈 받을라고 이태까지 고생한 거 아이잖아요.” 정씨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씨는 변호사에게 “어려운 데 기부해도 되냐”고 물었다.

2014년 한전과 마을주민 합의에 문제 제기

윤씨를 대리한 정상규 변호사(법률사무소 청송)는 “한전 합의서에는 개인별 현금 지급이 불가하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볼 때 공동사업비는 회의를 거쳐 다수결로 똑같이 나누자 결정하면 나눌 수 있다. 총회 결의를 무효로 해도 어차피 돈을 거둬 다시 나누자는 결정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재판부가 현실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다만 “지금까지 찬성 주민들이 한전이 지급한 돈을 찬성한 사람들만의 몫이라며 반대 가구를 배제했다. 이 조정을 통해 찬반과 무관하게 초고압 송전탑이 지나는 모든 마을 주민들의 권리가 (동등한 것으로) 인정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밀양 내양마을과 고정마을에선 초고압 송전탑 건설 합의 뒤, 찬성을 주도한 주민들이 돈을 빌미로 반대 주민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공동체 파괴 현상이 극심하게 진행됐다. 윤씨 부부가 한전의 돈을 ‘더러운 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두 마을은 2014년 6월11일 한전과 밀양시청이 행정대집행을 통해 마을 주민들의 농성장을 강제 철거했을 때도 끝까지 합의하지 않았던 마지막 5개 마을에 속해 있다. 대다수 마을이 2013년 9~12월 한전과 합의서를 작성했지만, 내양마을은 2014년 7월, 고정마을은 9월에야 마을 주민 과반수가 찬성하는 합의서가 나왔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내양마을·고정마을 반대 주민들과 대책위가 2014년 이뤄진 합의가 ‘유령 합의’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내양마을 7가구, 고정마을 21가구가 당시 보상금 지급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가짜 주민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2014년 합의가 이뤄질 때도 위장전입으로 마을에 주소지를 옮긴 ‘가짜 주민’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된 바 있으나, 한 마을의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적격 여부를 따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3년 8월5일 한전, 밀양시청, 산업통상자원부, 밀양시 국회의원실은 ‘밀양 송전탑 갈등 해소 특별지원협의회’(특별지원협의회)를 만들었다. 이들이 2013년 9월4일 5차 회의에서 확정한 ‘지역 특별지원사업비 세대별 지급 규정’을 보면, 보상금 지급 대상 주민의 거주 조건으로 ①협의회 구성일(2013년 8월5일)을 기준으로 지급일까지 주민등록이 등재돼 있고 독립적인 거주 공간을 확보할 것 ②주민등록이 등재돼 있지 않더라도 독립적인 거주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5인 대표에게 ‘실거주 세대’임을 서면 확인받도록 제시했다. 5인 대표가 보상금 수령 대상을 선정하는 데 전권을 행사하게 한 것이다.

②의 요건은 미진하던 초고압 송전탑 합의에 적잖이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정마을과 내양마을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 서면을 보면, 고정마을 초고압 송전탑 건설 찬성 64가구 가운데 10가구는 2013년 8월5일 당시 주민등록이 등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양마을 역시 찬성 21가구 가운데 3가구는 당시 주민등록이 없었다.

2013년 8월 당시 주민등록이 없던 ㄱ씨는 과의 통화에서 “ㅅ리에 살고 있다 고정마을로 이사 나왔다. 올해 3년차다. 2014년 4월에 왔다”고 말했다. 그가 2014년 7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찬성한다며 보상금을 지급받겠다는 의미로 한전에 제출한 ‘계좌이체거래 약정서’를 보면, ㅅ리 주소를 썼다가 지우고 고정마을의 주소를 적은 흔적이 있다.

“위장전입·부정수급 형사소송할 것”
2013년 8월 밀양 시내에서 한국전력과 송전탑 시공사 직원 등이 ‘밀양시민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고 쓴 손팻말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8월 밀양 시내에서 한국전력과 송전탑 시공사 직원 등이 ‘밀양시민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고 쓴 손팻말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5인 대표’는 특별지원협의회 기준에 맞지 않는 ㄱ씨가 마을에 실제 거주한다는 ‘실거주확인서’를 써줬고, 실거주확인서를 근거로 개별보상금을 수령했다. ㄱ씨가 당시 적은 고정마을 주소는 그의 소유 토지다. 포털 사이트 항공지도 서비스를 이용해 확인한 결과 비닐하우스가 설치된 것으로 나온다. 합의 이후 해당 주소에 컨테이너가 들어섰다. 그러나 특별지원협의회가 만든 ‘세대별 지급 규정 세부사항’은 “컨테이너는 주거 공간으로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지급 불가”라고 규정했다. 특별지원협의회가 구성될 때 주민등록이 없던 10가구 가운데 5인 대표로부터 실거주확인서를 받은 가구는 ㄱ씨를 포함해 6가구고, 나머지 4가구는 실거주확인서조차 없다.

주민등록이 있는 이들 가운데서도 실제 부산이나 밀양 시내에 살며 주소에 거주하지 않은 ‘위장전입’ 의혹이 있는 이도 대여섯 명이다. 밀양 시내에 거주한다는 의혹이 있는 고정마을 ㅅ씨는 과의 통화에서 “밀양 시내에 아파트도 있고 고정마을에도 집이 있다. 위장전입이라고 하는데 아니다. 2013년까지 충북 쪽에서 공장을 하다 내려와서 형님 살던 집에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2014년 한전에 낸 ‘계좌이체거래 약정서’에 없는 주소를 적어내기도 했다. ㅅ씨는 “주소가 헷갈렸다. 남이 쓴 게 아니라 내가 썼다”고 해명했다.

고정마을 합의를 주도한 5인 대표 가운데 1인은 마을주민의 주소에 위장전입한 의혹이 있다. 내양마을 5인 대표 가운데 1인 역시 아내가 주거가 불가능한 창고가 있는 주소에 주민등록한 것으로 파악됐다.

주민등록법상 한 주소에 여러 세대주가 등록할 수 있는 다세대주택이 아닌데도, 여러 세대가 주민등록을 등재해 보상금을 중복 수령한 의혹도 있다. 내양마을의 경우 한 주소로 4명이 보상금을 수령했다. 이 가운데 1명은 한전과 합의를 주도한 5인 대표였다. 그는 지금도 내양마을 자치회 간부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정마을에서 합의를 주도한 5인 대표 가운데 1명의 주소에서도 2명이 보상금을 수령했다.

이번에 새로 입수된 특별지원협의회의 ‘세대별 지급 기준 세부사항’을 보면 “동일 지번에 다세대가 등재된 경우에 전입 후순위 세대는 5인 대표로부터 실거주 세대임을 서면으로 확인받으면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다. 5인 대표가 실거주확인서를 통해 주민등록이 없거나 지급 기준에 해당하지 않은 이들을 주민으로 인정해 보상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탈법과 불법을 조장한 셈이다. 정상규 변호사는 “위장전입이나 부정수급 문제와 관련해선 형사소송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밀양 탈핵·탈송전탑 투쟁 2라운드는

9월13일 밀양지원으로 내양마을이 포함된 위양리 권영길(75) 이장이 찾아왔다. 권 이장은 부정수급 의혹이 제기된 가구와 관련해 ‘실제 거주한다는 확인서에 도장을 찍어달라’며 마을자치회 간부들이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마을 이장은 1년에 네 차례 주민등록일제정리 등의 업무를 하기 때문에 주민의 주민등록 전출입 상황을 알 수 있다. “못해준다 했다. ○○○는 밀양 삼문동 살지, 벼농사는 다른 사람이 짓는다. 나는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 불법과 탈법 의혹으로 얼룩진 합의를 뒤엎는 밀양 탈핵·탈송전탑 투쟁의 제2라운드는 시작될 수 있을까.

밀양(경남)=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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