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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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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2년 동안 세월호 취재에 매달렸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 함께 38일간 도보순례, 관련 기록·자료 집대성 등 앞장선 정은주 기자가 말하는 <한겨레21>과 세월호의 ‘특별한 동행’ 뒷이야기
등록 2016-04-14 18:22 수정 2020-05-07 10:51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1주기인 2015년 4월부터 1년 동안 세월호 탐사보도를 시작했다. 2주기를 맞으며 탐사보도 4부를 마무리짓는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싣는다. 2년간 온몸으로 싸워온 정은주 기자의 에필로그와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의 10개월간의 여정을 담았다. 앞으로 밝혀내야 할 4가지 문제점도 제기한다. <한겨레21>의 세월호 탐사보도는 앞으로도 계속 된다. 다른 기자가 다른 방식으로 더 깊은 진실을 길어낼 계획이다. _편집자

2014년 7월9일 밤 10시30분, 남편은 나와 인턴기자를 데리러 경기도 화성시에 왔다. 세월호 참사 때 아들을 잃고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전남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으로 800km 도보순례에 나선 두 아빠, 그리고 20대 누나와의 1박2일 동행취재를 마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누나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꼭 껴안았다. 두 아빠도 아쉬워했다. 도보순례는 예상보다 훨씬 힘겹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남편을 보내고 유가족과 남았다

전문 길잡이도, 의료 지원자도 없는 세월호 유가족 순례단의 앞길은 캄캄해 보였다.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두 아빠와 누나만을 내버려두고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온 남편에게 하루만 더 머물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턴기자만 그의 차에 태워 보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한겨레21>과 세월호의 특별한 동행은 그날 시작됐다.

1.

<한겨레21> 기사 마감을 끝내고 2014년 4월19일 진도행 첫 아침 버스를 탈 때만 해도 나는 피해자 가족들을 당연히 취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닷새 만에 기자는 이미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낙인찍혀 있었다. 기자 명함을 내미는 순간 부모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진도 실내체육관 2층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밤은 눈부시게 환했다. 앞쪽 무대에 놓인 대형 모니터는 컴컴한 바다를 비추지만 체육관은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형광등이 밝았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 아빠가 어떻게 불을 끌 수 있겠는가. 그 환한 불빛 아래에서 울다 쓰러지다 소리치기를 반복하며 부모들은 아침을 맞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단 한 명도 인터뷰하지 못하고 나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월19일 세월호 유가족 31명을 태운 버스가 안산에서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해경 해체)에 대한 가족들의 공식 입장을 물으려 했다. 유경근 대변인의 동의를 받아 그 버스에 동승했다. 버스에 오른 가족들은 오랜 친구처럼 다정했다. 빈자리가 많은데도 엄마는 엄마끼리, 아빠는 아빠끼리 같이 앉았다. 손을 꼭 잡고 귀엣말을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또 혼자였다. 버스가 충남 홍성군 홍성휴게소에 들르자 가족들이 우르르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무력함을 곱씹는데 한 아빠가 호두과자 한 봉지를 건넸다. 외로운 나를 외면할 수 없는 그 아빠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다음날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랬다. 오전에 비가 내린 팽목항은 쌀쌀했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겉옷을 챙기지 못한 나는 일회용 우비만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우비 속으로 파고들면서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기요.”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니 초췌한 얼굴에 쓰러질 듯이 가냘픈 40대 여자였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배에 갇혀 있는 아이를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 같았다. 나 때문에 앞쪽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한발 옆으로 비켰다. 엄마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색 겉옷을 벗어 내게 건넸다. 자원봉사자들이 피해자 가족을 위해 준비한 바람막이 옷이었다.

“입으세요.” 나는 당황했다. “아까부터 많이 추워 보이더라고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엄마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추우면 안 돼요. 춥지 마요.” 그 말에 나는 두말없이 옷을 받아 입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차가운 바다에 잠겨서 추위에 떨고 있을 아이를 고통스럽게 떠올렸을 것이다.

2.

2014년 7월5일 강기갑 전 의원을 인터뷰하고 경남 사천 버스터미널에 있을 때 당시 <한겨레21> 최우성 편집장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월호 유가족이 도보순례에 나선다고 한다.” 유가족의 연락처를 받아 다음날 안산으로 찾아갔다.

승현 누나 아름씨가 골목을 헤매던 나를 발견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한 빌라의 반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아빠와 삼남매가 살기에는 비좁아 보이는 집이었다. 그 집에는 길이 130cm, 무게 5kg짜리 나무 십자가와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라는 깃발이 놓여 있었다.

승현 아빠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는 웅기 아빠 김학일씨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38일간 도보순례에 나서겠다고 했다. 304명의 죽음 앞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답답해 무작정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 위에 나설 계획이었다.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는 오히려 고행을 바랐다. “우리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다.”

‘길치’ 기자, 순례단의 ‘로드매니저’로

정은주 기자 등 <한겨레21> 기자들은 2014년 여름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염원하며 도보순례 하는 길에 38일간 동행했다. 박승화 기자

정은주 기자 등 <한겨레21> 기자들은 2014년 여름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염원하며 도보순례 하는 길에 38일간 동행했다. 박승화 기자

아이를 낳아보지도, 잃어보지도 않은 나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가늠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지 않았다. 그 마음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도보순례 출발지인 안산 단원고에서 많은 기자들이 두 아빠에게 질문을 던질 때도 침묵했다.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다른 기자들이 다 떠나고 유가족 3명과 <한겨레21> 기자 2명(나와 인턴기자), 페이스북을 보고 배웅 나온 이상길씨만 남았다.













 














<i><한겨레21>과 ‘진실의 힘’을 오가며 밤낮없이 일했다. 일주일에 2~3일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서 목놓아 몇 시간을 울었다. 내 무능함을 한탄하고 그런 내 손에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들려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i>

 

첫날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시 면목면사무소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며 찾아가야 했다. 유가족이 스마트폰 작동법에 익숙하지 않아 내가 길잡이로 나섰다.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는 타고난 ‘길치’인 탓에 길을 헤매며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한두 번 웃어넘기던 두 아빠가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첫 도착지에 다다랐다. 밤 10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는데 잘 곳을 구하지 못했다. 성당은 멀고 교회는 잠들어 있었다. 두 아빠는 짊어진 십자가를 모텔로 모시는 게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신의 노여움은 다 내가 받겠다고 우기며 무작정 모텔을 잡았다.

그 이후 이야기는 다 알려진 대로다. 7월9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하루 더 머물며 두 아빠와 누나 이야기를 <한겨레21>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순간부터 함께 걷겠다고, 함께 먹겠다고, 함께 자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연락했다. 나는 순례단의 ‘로드매니저’가 됐다. 동행취재는 38일간으로 연장됐다.

고비도 있었다. 7월28일 순례단이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한겨레21>은 동행취재를 중단하려 했다. 두 아빠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과,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나는 판단했다.

길 위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품었다

서울로 돌아왔는데 두 아빠와 누나가 ‘정 사장님’을 계속 찾았다. ‘정 사장님’은 내 별명이다. 내가 기사를 써야 한다며 순례단에서 빠지니까 동행자들이 “기자 말고 <한겨레> 사장 시켜줄 테니 함께 걷자”고 붙잡았다. 난감했다. <한겨레21> 박현정 기자와 이정연 기자가 로드매니저를 자청했다. 순례단을 대신 맡아 전남과 전북을 가로질렀다.

길 위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새벽 5시, 해 뜨기 직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새 동행자를 매일 만나는 일은 설렘 그 자체였다. 함께 걸으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동행자들은 묵상하듯 순례했다.

각 지역 시민들은 세끼 식사와 간식거리를 풍성하게 내놓았다. 그 먹을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골고루 나눠주는 게 내 몫이었다. “살 빼려고 도보순례 왔다가 살쪄서 돌아간다”고들 우스갯소리 했다. 영화 <명량>을 보며 나는 그들을 떠올렸다. 작은 나룻배를 탄 민초들이 판옥선에 갈고리를 걸어 죽을 힘으로 끌어당기는 모습, 그래서 결국 회오리에서 이순신 장군을 구출하는 장면 말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을 품었다.

3.

2014년 12월 단원고 창현 아빠 이남석씨, 엄마 최순화씨와 5박6일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다녀왔다. 세월호 유가족은 짧게는 3년, 길게는 29년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온 일본 참사 유가족들과 손을 맞잡았다.

이 일본 방문은 내가 제안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나는 비슷한 사고를 겪은 일본과 프랑스, 스페인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때 태안 사고 피해자가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힘겹게 국회의 문턱을 통과했으니 세월호 유가족이 용기와 지혜를 얻어 진실 규명에 나서길 바랐다. 다행히 그랬다. 창현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싸우는 일본 유가족이 존경스럽고, 나의 앞날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3월 새 편집장이 왔다. 안수찬 편집장은 2015년에는 세월호의 진실에 한발 다가갔으면 한다고 했다.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언론의 책무라고 했다. 나도 동의하지만, 그 책무를 맡는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2014년 내내 세월호 선원과 청해진해운 임직원의 재판을 지켜봤다. 구조 실패 책임을 캐묻는 국회 국정조사 현장도 취재했다. 뻔뻔한 거짓말과 모르쇠 변명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들끓고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진실의 조각을 건져올리려면 그 거짓말과 변명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허점이 보일 것이다. 그 험난한 작업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참으로 무모한 도전, 세월호 탐사보도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2년간 세월호 이야기로 모두 9번의 표지를 만들었다. 최우성 전 <한겨레21> 편집장이 세월호 참사 100일째인 2014년 7월24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월호 특별호’를 나눠주고 있다. 박승화 기자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2년간 세월호 이야기로 모두 9번의 표지를 만들었다. 최우성 전 <한겨레21> 편집장이 세월호 참사 100일째인 2014년 7월24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월호 특별호’를 나눠주고 있다. 박승화 기자

그런데 왜 결국, 나는 뛰어들었을까. 무지했기 때문이다. 첫째, 힘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둘째, 내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형편없을지 몰랐다. 셋째, 6개월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는데 1년이나 걸렸다.

세월호 프로젝트는 애초 <한겨레21>이 단독으로 기획·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서 생산한 자료를 입수해보니 그 분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나 혼자 다 볼 수는 없고, <한겨레21> 인력이 부족해 다른 기자가 힘을 보탤 수도 없었다.

수만 쪽의 자료를 부둥켜안은 채 어쩔 줄 모를 때 ‘진실의 힘’이 손을 내밀었다(60~62쪽 참조). <한겨레21>에 세월호 탐사보도 기사를 쓰면서 진실의 힘과 함께 자료를 분석해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프로젝트도 병행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4.

<한겨레21>과 진실의 힘을 오가며 밤낮없이 일했다. 일주일에 2~3일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남편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르고 안수찬 편집장은 냄새가 난다고 놀렸다. 그러나 일은 계획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기사와 책을 쓰고 다른 저자들의 초고도 수정해야 하는데 능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처음 계획과 달리 다른 저자의 초고 수정은 진실의 힘 조용환·송소연 이사에게 넘겼다. 세월호 탐사보도 2부와 3부를 겨우 끝내고 책 쓰기에 집중하는데 이번에는 글쓰기가 어려웠다. 문장마다 출처를 밝히는 주석 작업은 글 쓰는 흐름을 방해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긴데 결과물은 보잘것없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나날이었다.

2016년 1월 나는 집에서 목놓아 몇 시간을 울었다. 내 무능함을 한탄하고 그런 내 손에 세월호 기록이 들려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다섯 살 아이 권○○는 세월호 4층 키즈룸에서 오빠와 놀고 있었다. 갑자기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 부모와 떨어져 울고 있는 ‘애기’를 본 단원고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안아서 달랬다. 점점 기울어지는 컴컴한 배 안에서 자기들도 무서워 울면서 아이를 보듬었다. “울지 마, 괜찮아.” 아이를 잃고 애타 있을 부모를 찾기 위해 소리도 질렀다. “애기, 여기 있어요.”

10시19분, 뒤집어지는 세월호 우현 난간에서 승객 10여 명이 솟구쳐나왔다. 한 남학생이 큰소리로 외쳤다. “애기요, 애기!” 배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학생들과 승객들이 손을 모아 난간 밖으로 아이를 밀어올려 보낸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희미한 손전등 모여 모여 세월호 환하게 비추리

10년 뒤 별이 된 아이들만큼 자란 권○○ 어린이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만 쪽의 자료를 갖고 있으면서도 왜 그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느냐고 원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월호의 진실은 오리무중이지만 나는 다시 짙은 안개 속을 헤매보기로 했다. 그렇게 헤매는 것이 이 안개를 헤쳐나갈 유일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미완성의 발자취이자 작은 손전등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 책만으로는 새로운 손전등을 하나 더 보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희미한 불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십 개, 수백 개의 손전등으로 배 전체를 환하게, 또렷하게 비출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본 것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손전등을 켜려는 사람들을 나는 기다린다.

정은주 <한겨레>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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