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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재벌만 된다

‘대한민국 상장사 100대 주식 부자’ 중 재벌 가문이 아닌 사람은 15명에 불과

개발독재 시대 끝났지만 재벌의 짬짜미 등으로 새로운 기업 자랄 토양 척박해져
등록 2014-04-25 06:11 수정 2020-05-02 19:27
서울 중구에 있는 STX 남산타워의 모습. 그룹 지주회사였던 (주)STX와 STX조선해양, STX팬오션, STX중공업 등 주요 계열사들이 입주해 한때 STX그룹을 움직이는 곳이었다. 지금도 아직 한 빌딩에 모여 있지만 주요 계열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채권단 자율협약을 진행하면서 STX그룹 체제는 해체됐다.탁기형 khtak@hani.co.kr

서울 중구에 있는 STX 남산타워의 모습. 그룹 지주회사였던 (주)STX와 STX조선해양, STX팬오션, STX중공업 등 주요 계열사들이 입주해 한때 STX그룹을 움직이는 곳이었다. 지금도 아직 한 빌딩에 모여 있지만 주요 계열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채권단 자율협약을 진행하면서 STX그룹 체제는 해체됐다.탁기형 khtak@hani.co.kr

“강덕수 STX그룹 회장 개인의 꿈은 ‘성공한 김우중’이 되는 거였을 것 같다.”

STX그룹에서 임원으로 일했던 ㄱ씨의 말이다. 실제 강덕수 전 회장은 재계에서 ‘제2의 김우중’으로 불렸다.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기업 인수·합병(M&A)의 귀재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400개 가까운 해외법인을 거느렸던 것처럼, 강덕수 회장도 STX그룹 매출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글로벌 경영을 했다. 마지막으로 걸어간 길도 비슷했다. 무리한 차입 경영으로 계열사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그룹은 공중분해됐다. 회장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결정적으로 이들은 재벌 중심의 한국 기업 역사에서 ‘이방인’이었다. 같은 재벌 총수여도 출신 성분이 달랐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재벌 총수들의 ‘이너서클’ 같은 조직이다. 삼성·현대자동차·SK 등 회장단 대부분이 가업으로 기업을 물려받았다. 자수성가해 재벌의 반열에 오른 이는 손에 꼽는다. 김우중 회장은 1998~99년 전경련 회장을 맡았고, 강덕수 회장은 2009년 전경련 부회장이 됐다. 강 회장은 한국무역협회와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등 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함을 다는 데 적극적이었다.

“‘강덕수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너무 나대면서 말을 많이 하니까 좀 막아봐라.’ 다른 재벌 오너들이 임원진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재계에 파다했다. 재벌 오너들 사이에서 너무 튀는 거 아니냐는 거였다.” STX그룹에서 팀장급으로 일하다가 다른 재벌기업으로 이직한 ㄴ씨는 회사 안팎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듣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강덕수 회장은 재벌 순위 11위까지 올랐지만,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오너는 없었다고 한다. 다른 재벌 대기업에서도 오랫동안 임원 생활을 했던 ㄱ씨는 “강 회장이 전경련 부회장 활동은 정말 열심히 했다. 미리 자료도 꼼꼼하게 읽어가고, 전후좌우 안 따지고 회의 발언도 하고. 그런데 강 회장이 상고 출신에 대한민국 주류가 아니잖나. 그러니 재벌가에서 안 끼워준 거다”라고 말했다.

‘재벌들만의 리그’는 여러 통계 수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재벌닷컴이 집계한 ‘대한민국 상장사 100대 주식 부자’(2014년 4월15일 종가 기준)를 보면, 재벌 가문이 아닌 사람은 15명에 지나지 않았다.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하는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14위), 이준호 NHN엔터테인먼트 회장(18위),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37위)을 비롯해 오세영 코라오그룹 회장(25위), 김준일 락앤락 회장(33위)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1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2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3위) 등 10위 이내는 모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이 차지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부의 가치를 주식으로만 따진다는 한계가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100대 부자 안에 벤처기업이 많았다. 지금은 압도적으로 재계 1위인 삼성이 당시만 하더라도 3위권이었다. 하지만 벤처 거품이 꺼진 뒤로는 ‘부의 중심’이 다시 전통적 산업 쪽으로 옮겨갔다”고 분석했다.


“1970~80년대 기업 구조조정에는 정부가 사업권을 준데다 금융시장의 혼란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깊숙이 개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STX나 웅진 등의 구조조정에서는 그럴 이유가 아예 사라진 거다.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됐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


총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 경제에서 일부 재벌 대기업으로의 ‘쏠림 현상’은 나날이 심각해지는 추세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의 지난 1월 자료를 보면, 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이 거둔 영업이익 합계가 43조1천억원으로 국내 전체 법인 영업이익(192조1천억원)의 22.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보다 비중이 갑절 늘었다. 두 그룹 상장 계열사(27개)는 숫자상으로는 코스피·코스닥 시장 상장기업의 1.6%에 불과하지만, 시가총액 비중은 36.5%에 이른다. 특히 삼성전자라는 1개 회사가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15%가 넘는다. 재계에서 “재벌도 이제는 같은 재벌이 아니다”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상위 4개 그룹 정도를 제외하면, 매출과 영업이익은 물론 임직원 급여 수준이나 기업 운영 시스템 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도 이제는 같은 재벌이 아니다”

“기존 재벌 이외에 자수성가형 기업이 나타났던 건 한국 경제에서 딱 2번밖에 없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등장한 율산그룹과 명성그룹 등이 하나였고, 외환위기 직후의 벤처기업 열풍이 다른 하나였다. 둘 다 버블(거품)이었다. 부동산 거품을 타고 나타났던 신흥기업들은 사업다각화 과정에서 망했고, IT 벤처 거품은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그런 면에서 강덕수 회장은 전통 제조업에서 유일한 성공 사례로 꼽힐 만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자수성가형 기업들이 커나갈 수 있는 문은 굳게 닫혀버린 걸까? 일단 정부가 통신·석유 등 알짜 공기업을 재벌 품에 안겨주고 각종 특혜를 안겨줬던 개발독재 시대가 끝났다. 그러면서도 재벌을 중심으로 한 시장의 독과점은 심화됐고, 재벌들은 짬짜미(담합)와 일감 몰아주기, 하청기업 쥐어짜기 등을 통해서 새로운 기업이 자랄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어버렸다.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1970~80년대 기업 구조조정에는 정부가 사업권을 준데다 금융시장의 혼란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깊숙이 개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STX나 웅진 등의 구조조정에서는 그럴 이유가 아예 사라진 거다.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됐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경제학)의 해석이다. 이렇게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던 그룹들은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았다.

김진방 교수는 “기존 재벌처럼 선단식 경영을 하는 그룹 형태가 등장하지 않는 게 오히려 바람직한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창업을 통한 혁신기업의 등장이 불가능해진 걸로 보진 않는다. 미국의 IBM, GE, 애플, 스웨덴의 이케아 등도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성장한 기업들이다. 우리도 창조든 혁신이든 가능한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네이버의 시가총액이 SKT를 앞지르는 등 몇몇 IT 기업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다만 찻잔 속 태풍에 머문다는 게 한계다. IT 산업의 특성상 재벌 중심의 한국 경제구조 전반을 뒤흔들지 못하는 탓이다.

두 가지 모순된 과제

정부는 ‘창조경제’와 창업 활성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봤자, 재벌이라는 견고하고 높은 성벽에 가로막힐 뿐이다. 이래서는 이병철, 정주영처럼 맨손으로 창업에 선뜻 나설 이가 없는 게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 식으로 말하자면 경제민주화와 경제혁신이 문제다. 이 모순된 2가지 과제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조화시켜나갈지가 중요하다. 기존 재벌그룹의 진입장벽 구실을 하는 불공정거래 관행과 독점을 막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한편으론 아이디어만 갖고 사업할 수 있도록 혁신경제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러면 기존 재벌과는 다른, 새로운 기업 모델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본다.”(김상조 교수)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1008호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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