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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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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뫼비우스 띠처럼


‘가난한 집안·낮은 학력·고된 아르바이트 경험’ 공통점 가진 마트의 젊은이들…
그들의 소박한 꿈에도 햇빛이 들까
등록 2009-12-18 14:26 수정 2020-05-03 04:25
*지난호 이야기
세상은 고학력 청년실업을 걱정한다. 그러나 또래의 60%는 4년제 일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2년제 대학을 나왔거나, 고등학교만 졸업했거나, 고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이들은 불안정 빈곤 노동의 밑바닥을 이룬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한다.
지난 11월, 서울 강북의 한 대형마트에서 젊은 마트 노동자들과 일했다. 27살의 철수는 2년제 대학을 나와 양념육을 판다. 25살의 영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돼지고기를 판다. 색색의 옷을 입고 목청 높여 소리 지르는 우리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마트 노동자는 투명인간이다. 우리의 존재감은 티끌만큼 가볍다.
마트는 여러 점포에 세를 준다. 점포 매출 가운데 20%는 마트 차지다. 비슷한 품목의 여러 점포가 같은 마트 안에서 경쟁한다. 점포가 망하면 노동자도 일자리를 잃는다. 마트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마트 노동자들에겐 승진의 기회도, 안정적 일자리도 없다. 오직 이 점포에서 저 점포로 옮겨다니는 ‘히치하이킹’만 허락된다. 마트 손님이 급감하면서 망하는 점포가 늘어났다.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마트 밖으로 밀려나는 히치하이커들도 늘어나고 있다.

노동OTL

노동OTL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작업 라인의 노예
4천원의 삶과 행복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언제나 젖은 앞치마
몰락 가장의 부인과 올드미스
사장님, 손님, 남편님

제3부 마석 가구공장
톱밥 더미에 갇힌 꿈
빠빠, 마마 그리고 겐드라노나
13살 노동자의 귀환, 그리고…

제4부 서울 A대형마트
① 히치하이커의 슬픔
② 빈곤 가족의 탄생
③ 친구들의 엇갈린 행로


홑이불을 덮고 누웠다. “이건 악몽이야.” 혼자 중얼거렸다. 웃풍이 강한 방에 11월 삭풍이 밀려드는데, 모기 두 마리가 이 겨울에도 살아남았다. 나는 미처 전기장판을 준비하지 못했다. 모기약도 챙겨두지 않았다. 파카를 껴입고 누워 모기한테 물어뜯기는 일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서울 강북의 A마트에 취업하면서 1.5평짜리 고시원 방을 구했다. 퇴근하면 밤 10시가 됐다. 마트 근처 고시원 방에 들어서면 몸에서 연기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구운 양념 불고기 냄새였다. 몸은 힘든데 잠은 오지 않았다. 때 묻은 침대에는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다. 작은 거울이 있고, 플라스틱 휴지통이 있고, 빨간 소화기가 있다. 14인치 텔레비전도 있는데, 리모컨은 말을 듣지 않는다. 20만원짜리 내 방에는 없는 것들도 있다. 창문이 없고, 책상이 없고, 냉장고가 없다. 햇볕 값은 3만원이다. 양팔 길이의 창이 있는 방은 23만원, 창문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모든 것을 갖춘 고시원의 ‘특실’은 25만원이다.

낮에는 고기 냄새, 밤에는 웃풍이 고역

고시원 위층은 교회다. 아래층엔 사교댄스 교습소가 있고, 그 아래 지하층에는 ‘비즈니스 클럽’이 있다. 고시원 건물의 왼쪽엔 모텔이 있고, 오른쪽엔 경찰서가 있다. 누군가 의도한 것이라면, 좌청룡 우백호에 버금가는 배치였다. 세속의 욕망, 종교의 복음, 그리고 법의 처벌이 미로처럼 얽힌 47개의 가난한 고시원 방을 사방과 아래위에서 포위하고 있다.

경수(가명)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1시께, 어느 아저씨가 냉장고에 있는 김치통을 엎었다. 고시원의 공용 주방에는 냉장고가 2개 있다. 하나는 고시원 총무가 쓴다. ‘촉수 금지’라고 쓰여 있다. 촉수가 허락된 다른 냉장고에는 김치통과 간장통이 있다. 47명이 나눠 먹는 반찬이다. “김치가 다 시었잖아.” 택시 운전을 한다는 40대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김장철인데 신 김치를 갖다놓았다고 총무에게 따졌다. 경수의 방에는 창문이 있다. 대신 주방에 면해 있어 햇볕 값을 조금 깎았다. 22만원씩 내고 8개월째 살고 있다. 햇볕이 들어오지만 주방 옆에 있는 방에서 경수는 두 사람이 드잡이하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잠을 설쳤다.

매일 새벽 4시30분, 경수는 A마트에 도착한다. 건물 앞에는 ‘김장 행사’라고 적힌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다. 29살의 경수는 그곳에서 제 인생의 네 번째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신문보급소, 닭가공 공장, 판지공장을 거쳤다. 그는 이제 수산팀에서 칼질을 한다. A마트를 통틀어 경수는 가장 일찍 출근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들어온 생선 박스를 뜯는다.

1. 막칼 인생
막칼 인생.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막칼 인생.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20초면 돼요.” 경수가 말했다. 손님이 주문하면 생선을 손질해 포장하여 내놓을 때까지 20초가 걸린다. 가장 많이 팔리는 고등어·삼치·갈치는 눈 감고도 머리를 칠 수 있다. 그는 좋은 눈과 손을 가졌다. 수산팀에서 칼질을 제일 잘한다. 그는 ‘막칼’을 쓴다. 길이는 20cm 정도. 부엌칼보다 뚱뚱하고, 회칼보다 짧다. 얼핏 보면 도끼를 닮았다. “막칼이 무식한 칼이라는 건데, 이걸로 못하는 게 없어요.” 경수는 막칼로 생선 머리를 치고 껍질을 벗기고 뼈를 골라낸다. 아기 이유식에 쓰는 생선은 고운 살만 발라내는데, 그것도 막칼로 한다.

그래도 도미·민어·홍어는 어렵다. 특히 홍어는 손질하는 데 5분씩 걸린다. “홍어한테도 칼이 있거든요.” 홍어의 양 날개 끝에 낚싯바늘처럼 생긴 가시가 있다. “그게 가시가 아니고, 칼이라고요, 칼. 거기 걸리면 손이 쭉 나가요.” 경수의 손에는 여기저기 베인 상처가 많다. 사람들은 목에 걸리는 생선 속 가시를 조심한다. 경수는 생선 겉가시를 조심한다. 지느러미에도 가시가 있고, 아가미에도 가시가 있다. 칼질 잘하는 경수도 가끔 그런 가시에 손을 다친다.

닭공장, 신문 배달, 판지공장 거쳐 마트로

고등학교 시절엔 패싸움 때문에 종종 다쳤다. 그는 경기도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출신 동네별로 무리지어 시비를 걸고 싸웠다. 경수는 4번 정학을 당했다. “아버지 속을 썩였죠. 이제 마음 잡았어요.” 마음을 잡은 경수는 학교를 졸업한 뒤, 닭공장에서 일했다. 그때 막칼을 처음 잡았다. 대가리를 치고 다듬어 닭을 포장해 대형마트에 납품했다. 한 달에 130만원을 받았다.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신문보급소에서 일했다. 한 달에 170만원을 벌었다. “돈이 비잖아.” 어느 날, 보급소장이 말했다. 수금한 돈 가운데 20만원이 모자랐다. “너, 손버릇이 나쁘구나.” 소장이 경수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판촉요원에게 지급한 돈을 경리가 장부에 적지 않았다. 보급소장은 경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3년에 걸친 신문 배달일을 접었다. 경기도의 판지공장에 들어갔다. 담배 포장 박스를 만들었다. 145만원을 받았으나 잔업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하고 경수가 말했다. “우리는 일이 힘든 건 좋은데, 스트레스 받는 건 싫거든요. 뺑이를 쳤는데 돈을 안 주니까, 너무 화가 났어요.”

판지공장을 그만두고 A마트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도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일을 잘하면 연봉직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월 100만원의 시급직으로 들어갔다. 이 점포에서 저 점포로 옮겨다니는 마트 노동자들도 생선 매대를 꺼린다. 10명이 일하는데, 1년이면 30명이 들어왔다 나간다. 하룻만에 그만두는 이도 있다. “제일 더럽고 힘들거든요. 손님들도 생선 매대 앞을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냄새 나니까.” 힘들고 더러운 일을 빨리 배우려고 경수는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했다. 9개월이 지났을 때 “연봉직을 더 이상 뽑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연봉직이 되어 돈을 더 벌겠다는 꿈이 무너졌다. “남자가 100만원 받고 평생 살 수는 없잖아요.”

그만두고 다시 신문보급소에 갔다가, A마트에 돌아온 것이 2년 전이다. 100만원을 받고 평생 살 수 없었던 경수는 이제 150만원을 받는다. 1년에 한 번씩 재계약하는 연봉직이 됐다. 새벽 4시30분에 출근해 오후 2시에 퇴근한다. “집에는” 하고 경수가 말했다. “집에는 저녁 8시쯤 들어가요.” 경수는 고시원을 고시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근처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고, 거기서 저녁을 시켜먹고 집처럼 여기는 고시원에 들어가 눕는다.

그의 진짜 집은 서울 신림동에 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단칸방에 산다. 아버지는 전라도에서 농사를 지었다. 경수가 6살 때 대구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닭을 팔았다. 중학생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경수를 데리고 경기도의 소도시로 이사했다. 몇 해 전엔 다시 서울로 이사왔다. 그동안 경수 아버지는 닭 팔던 일을 그만뒀다. 대신 경수는 닭공장에서 막칼 쓰는 일을 처음 배웠다. 지금 경수 아버지는 동네 모텔에서 청소를 한다. “작업반장이에요.” 경수가 말했다.

빈곤은 뫼비우스 띠처럼.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빈곤은 뫼비우스 띠처럼.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2. 개천에서 태어나다

확실히 경수만 고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수 아버지는 경수가 인생의 장벽에 맞서 잘 싸워주기를 바랐다. 경수의 미래에 대해 노심초사했다. 경수는 싸움을 잘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싸움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싸움은 그의 마음 같지 않았다. “우리는.” 경수가 말했다. “로또를 사지 않아요. 사람들이 허황된 꿈을 많이 꾸는데, 우리는 그런 거 싫어하죠. 있는 대로 살자는 쪽이에요.” 그의 삶에서 가장 확실한 ‘발전’은 농촌에서 지방도시로,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 정도다. 그보다 더 바라는 일은 허황된 꿈이라고 경수는 생각한다.

허황된 수작을 걸어오면 영희(가명)는 총으로 쏴버린다. “아가씨, 술 잘 먹게 생겼는데. 언제 끝나? 한잔할까?” A마트에서 돼지고기 판촉을 하는 영희에겐 성가신 손님들이 있다. 시식용 돼지고기를 집어먹으며 흰소리를 하는 아저씨들이다. 그럴 때 영희는 엄지와 검지로 총 모양을 만들어 사내의 가슴팍을 겨눈다.

“잘생긴 아저씨, 술은 나중에. 우선 이 돼지고기부터 사세요.” 영희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정색하고 싸워봐야 영희만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25살의 영희는 마트에서 ‘멘트 치는’ 기술을 배웠다. 세상 사는 기술도 배웠다. 인내의 기술이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기술이다.

부모 이혼 뒤 중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

영희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짜리 지하방에 산다. “완전히 지하방은 아니고 반지하방”이므로, 그의 단칸방에도 햇볕은 들어온다. 영희의 가계부는 간단하다. 월세 45만원, 전기세·수도세·가스비 등 각종 공과금 15만원, 휴대전화 요금 10만원, 부식비 10만원을 매달 내려면 한 달에 적어도 80만원을 벌어야 한다. 일당 6만원의 마트 판촉일을 한 달에 보름 정도 하면 그 돈을 벌 수 있다.

이 덧셈은 역사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영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빠는 아주 연락이 끊어졌다. 엄마하고는 아주 가끔 통화만 한다. 친척 어른 밑에서 자란 영희는 언제나 독립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기 때마다 내는 공납금 10만원까지 직접 벌어서” 냈다. “그 돈도 아까웠단 말이에요.” 그 말을 할 때, 영희는 정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영희는 장학금을 받았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전부 과외를 받잖아요. 나는 공납금도 아까우니까 학원에 안 갔어요.” 영희는 교과서를 전부 외웠다. “제가 외우는 걸 잘했단 말이에요.”

고3이 되자 영희는 또 덧셈을 했다. 대학에 들어갈 돈, 그렇게 졸업한 뒤에 벌게 될 돈,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돈을 셈했다. “저는 엠티(MT·멤버십 트레이닝), 오티(OT·오리엔테이션), 이런 말 모른단 말이에요. 대학 갔다고 거들먹거리는 친구가 있으면 확 때려주고 싶단 말이에요.” 영희의 팔목은 노래방과 PC방의 카운터, 그리고 대형마트에서 굵어갔다. 무슨 일이건 계속 하려고 애를 쓴다고 영희는 종종 말했다. “안 그러면 술집에 나가는 길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가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버는 돈이 없으면, 돈이 급해지면….”

미로 같은 복도 옆으로 벌집 같은 고시원 방이 있다. 고시원에 고시생은 없다. 택시 운전사, 막일꾼, 독거노인 등이 모여 산다. 마트 근처 고시원에는 마트 점원도 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미로 같은 복도 옆으로 벌집 같은 고시원 방이 있다. 고시원에 고시생은 없다. 택시 운전사, 막일꾼, 독거노인 등이 모여 산다. 마트 근처 고시원에는 마트 점원도 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기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A마트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나는 수많은 ‘경수들’과 ‘영희들’을 만났다. 경수들과 영희들은 이른바 ‘결손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가 이혼했거나, 일찍 사망했다. 비정규직이란 말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들의 부모는 비정규직이었다. 부모의 이혼과 사망은 가난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성인이 되어 그들은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일자리를 구했다.

3. 임금이 복지다

양념용 불고기는 알루미늄 용기에 담아 진열한다. 알루미늄은 하루 종일 영하로 얼어 있다. 밤이 되면 매대 뒤편 작은 싱크대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씻는다. 얼어 있던 알루미늄 용기가 갑자기 팽창하며 쩡 하고 운다. 가장 반가운 소리다. 설거지가 끝나면 이제 곧 퇴근할 것이다. “장갑 끼고 해. 손 상한다고. 손 상하면 무식해 보여.” 고참 민호(가명)가 나에게 말했다. 손 상하는 것은 상관없으니, 싱크대가 더 크고 깨끗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싱크대는 고기 찌꺼기로 자주 막혔다.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가다 곧잘 구정물이 됐다. 몸을 비틀 공간이 없으니, 설거지도 쉽지 않았다. 물이 사방에 튀었다. 붉은 유니폼도 금세 젖었다.

손님 불평 한마디에 전 직원이 ‘금연 서약서’

A마트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유일한 쉼터인 탈의실에는 좁고 긴 의자가 3개만 있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누워 쪽잠이라도 자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의자라도 한두 개 더 만들면 안 되나.”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탈의실 벽에는 보험광고가 붙어 있다. ‘한 번 가입으로 갱신 없는 암보험’을 선전하고 있었다. 복지는 제 돈으로 알아서 해결하는 거라고 보험회사는 속삭이고 있었다. 마트 노동자들은 당장 돈이 우선이었다. 노동조건은 배부른 소리였다.

지난 가을, A마트 노동자들은 서약서를 썼다.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암에 걸릴까봐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주차장에 들어온 손님이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마트 점원을 목격하고 본사에 항의했다. ‘어떤 처벌’ 가운데는 해고도 포함된다. 지나친 서약이라고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서 유일한 저항을 봤다. ‘금연 금지.’ 화장실 벽에 까만 글씨의 낙서가 적혀 있었다.

직원 식당의 밥은 최악은 아니었지만 최상도 아니었다. “차라리 푸드코트에 가서 사먹어요.” 밀가루가 잔뜩 들어간 ‘함박까스’, 수제비가 들어간 김칫국, 시래기 무침과 말린 김, 그리고 배추김치가 점심 메뉴로 나온 직원 식당에서 22살의 영호(가명)가 말했다. 계란을 파는 영호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영호는 고기도 먹고 생선도 먹을 수 있었다. 돼지고기를 파는 영희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선을 파는 경수는 생선을 먹지 않는다. 마트에서 일한 뒤 지금까지, 나는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영철(가명)은 산채비빕밥, 칼국수, 된장찌개 같은 것만 먹는다. 식물성 음식만 먹고 노동조건에 대한 불평 없이 묵묵히 일한다. 32살의 그는 8년째 A마트 축산팀에서 일하고 있다. 돼지고기를 썰어 매대에 내놓는다. 그가 주로 일하는 작업장은 항상 영상 3도 이하다. 햇볕 없는 추운 곳에서 그의 얼굴은 질린 듯 하얗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기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형제들이 한동네에 모여 살았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아버지는 시골 읍내에서 리어카를 끌었다. 휴지를 싣고 다니며 팔았다. 겨울이 되면 군고구마도 팔았다. 소아마비를 앓은 어머니는 다리를 조금 절었다.

A마트 점원 영철(가명)씨, 가난의 대물림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A마트 점원 영철(가명)씨, 가난의 대물림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지방도시에 올라왔다. 아버지는 집과 땅을 팔아 120만원을 마련했다. 보증금 50만원, 월세 5만원짜리 단칸방을 구했다. “그때가 파 한 단에 100원, 연탄 100장에 3만원 하던 시절이었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 교과서보다 물가부터 외우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났다. 지국 사무실에 가서 광고전단지를 신문에 끼워넣었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침 7시30분. 학교에 갔다가 오후 3시에 다시 지국 사무실로 갔다. 이번에는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저녁 6시에 돌아왔다. 그는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돈을 벌었다. 한 달에 4만8천원을 받았다. 신문 대금 수금도 그의 몫이었다. “수금을 제때 못하면 지국장에게 엄청 맞았어요.”

아버지도 가끔 행패를 부렸다. 고향을 등진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그는 집을 뛰쳐나와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다. 동네 깡패들이 말을 걸었다. “너 신문 배달해볼래.” 쪽방에 또래의 아이들 10여 명을 몰아넣고 신문을 팔게 했다. 시내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에게 쪽지를 돌렸다. 신문 1부에 100원을 받았다. 많이 벌면 한 달에 5만원까지 벌었다. 중국집 배달도 했다. 그 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고 철가방을 들었다. 한 달에 15만원을 벌었다.

“너는 집안의 기둥이야. 판검사가 돼라.”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 돌아온 어린 영철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일했다. 한 달에 18만원을 벌었다. 그는 중학교를 그만뒀다.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한 달에 9만원을 벌었다. 약국에서도 일해봤다. “약국에서 약 배달을 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한 달에 15만원을 벌었다.

10대 후반부터 봉제공장서 12시간씩 일했지만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그는 서울의 봉제공장 기숙사에서 지냈다. 옷에 단추를 달았다. 잘못 겨냥하면 미싱 바늘이 단추를 찍어 깨트렸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일했다. 정해진 근무시간은 없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일이 밀리면 아침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했어요. 쉬지도 않고 일주일, 열흘씩 계속 일했지요.” 그는 30만원을 벌었다.

도시가스 배관일도 하고, 찻집 서빙도 하고, 주방 보조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8년 전 마트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105만원을 받았다. 지금은 135만원을 받는다. 세금을 떼고 나면 그의 손에 115만원이 남는다.

주방 보조 일을 주로 했던 어머니는 프레스 공장에도 다녔다. 어머니의 왼손 중지와 약지는 기계에 눌려 끝이 뭉그러져 있다. 2년 전부터는 그런 일을 그만뒀다. 대신 폐지를 줍는다. “소일 삼아 하신다는데, 그나마도 요즘엔 폐지가 없다네요.” 그의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산다. 상고를 나온 동생은 시내 백화점 구두 점포에서 월 150만원을 받는 계약직으로 일한다. 두 사람은 서울 강북 변두리에서 월 2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지내고 있다.

아내는 장애가 있어 몸이 불편하다. 부부는 월세 12만2500원을 주고 15평 임대아파트에 산다. 장인은 평생 뚜렷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장모는 보험회사에서 일해 돈을 조금 벌었는데, 10년 넘게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병원비를 많이 썼다. 장모가 돌아가시고, 장인은 아들과 함께 영구 임대아파트에 산다. 장인의 아들, 영철의 처남은 병원에 세들어 돈 버는 물리치료사다.

첫아이는 낳자마자 많이 아팠다. 오직 5년 동안만 엄마·아빠와 함께 지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다. 둘째아이는 다행히 잘 자랐다. 초등학생이다. 아내 앞으로 나오는 장애인 지원비와 기초생활수급권자 지원비를 더하면 20여만원이다. 여기에 105만원의 월급을 보태 세 식구가 산다. 영철은 고기는 먹지 않고 산채비빕밥을 먹는다.

고시원의 1.5평 방에는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다. 형광등을 끄면, 창문 없는 이 방은 한낮에도 캄캄하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고시원의 1.5평 방에는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다. 형광등을 끄면, 창문 없는 이 방은 한낮에도 캄캄하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4. 뫼비우스의 띠

불안정 빈곤 노동의 고리는 가족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로부터 영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러나 그 고리의 진정한 시작과 끝이 어디에 있는지 누군들 알겠는가. 그는 그것을 그리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짓고 싶어요.” 영철은 웃으며 말했다.

빈곤을 쳇바퀴 도는 ‘뫼비우스의 띠’는 영철의 가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직 한 달 동안 A마트에서 지냈을 뿐인데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끝없이 들었다. 끝없이 여기에 적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서면 오직 한 가지 법칙만 통한다. 미래는 과거에 의해 무력화된다.

계란을 파는 영호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한다. 택시회사에서 택시를 빌려 일한다. 월급 택시 기사보다 더 많은 돈을 회사에 납입하는 대신, 주로 손님이 몰리는 밤 시간에 일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영호의 형은 아무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지낸다. 영호의 여자친구는 경기도 소도시의 네일숍에서 일한다. 두 사람은 2년제 대학에서 만났다. 학교를 졸업한 여자친구는 학교를 중퇴한 영호처럼 아르바이트를 한다.

영희의 남자친구는 대학을 나왔다. 경기도에 있는 2년제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도 아르바이트를 한다. 처음 들어간 건설회사에서 잔심부름만 했다. “이름도 없는 대학을 나왔다고 무시당했단 말이에요.” 지금 영희의 남자친구는 도넛 매장에서 계약직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철수(가명)의 여자친구는 따로 일이 없다. 얼마 전까지 백화점 신사복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지만, 점포가 망하면서 일자리도 잃었다. 철수의 형은 지방 4년제 대학을 나왔다. 토목을 전공했는데, 취업이 되지 않아 1년간 마음고생을 했다. 어느 날 졸도해 병원에 실려갔다. “우울증은 아니고. 뭐라더라, ‘우울감’이 심하다고 진단을 받았어요.” 형은 얼마 전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다. “토목기사 일”이라고 철수는 말했다.

오직 소비할 때만 뭇사람들과 평등해져

철수의 휴대전화는 모토롤라가 내놓은 최신형이다. 매달 휴대전화 요금과 함께 단말기 값을 분할해 치르지만, 단말기 값만 50만원이 넘는다. 영호는 한 달에 6만원을 내고 피트니스 클럽에 다닌다. 영희는 한 달 휴대전화 요금만 10만원을 낸다.

이들은 100여만원을 벌면서 수십만원을 쓴다. 나는 그들에게 낭비벽이 있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수십만원씩 10년 동안 저축한들 A마트 주변에서 전셋집도 구할 수 없다. 철수가 땀 흘린 돈으로 구입한 금빛 휴대전화는 부동산 시세차익을 거둔 회장님의 금빛 휴대전화와 같다. 오직 소비할 때, 마트 노동자는 세상의 뭇사람들과 평등해진다.

막칼을 잘 쓰는 경수에겐 꿈이 있다. 10년쯤 뒤 가게를 내는 꿈이다. 그와 함께 패싸움도 했던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시내 마트에서 과일을 판다. “너는 생선을 팔고, 나는 과일을 파는 가게를 차리자”고 친구가 말했다. 그 가게에서 경수는 20초 만에 고등어를 손질해 손님에게 내놓을 것이다. 경수의 친구는 20초 만에 빛깔 좋은 제철 과일을 닦아 손님에게 건넬 것이다. 다만 그 꿈에는 그늘이 있다. 그들이 일하는 대형마트가 동네 작은 가게를 모두 망하게 했다. 경수가 가게에서 돈을 벌려면 마트가 망해야 한다. 마트가 망하면 경수는 가게를 차릴 돈을 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걷는다.



계층 이동 통계 조사
웬만해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줄 각오로 사는 사람은 없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부모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다만 그 기대는 학력마다 벌이마다 다르다.
‘다음 세대 계층 이동’에 대한 2009년 통계청 조사 결과가 있다. ‘다음 세대에서 계층 (상승) 이동이 가능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초졸 이하 학력자의 24.7%가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답했다. 33.2%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두 답변을 더한 부정적 태도가 57.9%에 이른다. 가장 높다. 중졸 학력자의 55%, 고졸 학력자의 52.8%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계층 이동에 대한 기대가 가장 높은 것은 대졸 이상 학력자다. 54.1%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소득별 분포도 비슷했다. 월소득 50만원 미만은 35.9%, 100만~200만원은 43.8%, 300만~400만원은 52.7%가 ‘다음 세대 계층 상승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월소득 600만원 이상이 되면 그 기대치는 59.2%에 이른다.
내 자녀 세대는 지금보다 더 높은 계층이 될 수 있을까?

내 자녀 세대는 지금보다 더 높은 계층이 될 수 있을까?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 기대와 달리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빈부 격차는 더 확대됐다. 도시 근로자의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통계청이 2008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10분위 배율’은 1989년 7.37에서 2007년 8.75로 늘었다. 이 수치는 최상위 10%의 소득을 최하위 10%의 소득으로 나눈 것이다. 20년 전, 부자는 빈자보다 7.3배 더 많이 벌었다. 지금 그 격차는 8.7배로 늘었다. 빈부 격차에 대한 또 다른 잣대로 지니계수가 있다. 한국 도시 근로자의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는 1989년 0.300에서 2007년 0.309로 늘었다. 1에 가까워질수록 빈부 격차가 늘었다는 뜻이다. 더 높은 계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갈수록 높아지고 멀어지고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다음호에는 엇갈린 삶을 사는 ‘히치하이커’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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