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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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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선 매일 지기만 한다


서울 A대형마트에서 보낸 한 달…
먹고 먹히는 1천 명의 ‘평등’한 노동, 버티고 버텨도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마트
등록 2009-12-09 15:15 수정 2020-05-03 04:25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0%를 넘는다. 고학력 청년실업에 대한 걱정이 많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더 낮은 곳에 있다. 매년 80만 명 안팎의 인구가 18살이 된다. 그 가운데 13만 명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32만 명은 2년제 대학, 산업대, 방송통신대, 기술대, 사이버대 등에 진학한다. 일반 4년제 대학에 가는 것은 35만 명 정도다. 또래의 60%가 일반 대학의 간판조차 따지 못한다.
이들은 일찌감치 한국 사회 불안정 빈곤 노동의 밑바닥을 이룬다. 상위 대학에 입학한 2만~5만 명을 제외하면, 30만 명에 이르는 나머지 4년제 대학생들도 장차 그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는 악순환이 20대에 시작된다. 그들이 30대가 됐을 때, 불안정 노동은 그들의 삶이 된다.
지난 11월, 서울 강북의 한 대형마트에서 그들과 어울려 한 달을 보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모두 가명을 썼다. 그러나 그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에는 거짓이 없다. 이 땅에 사는 그들의 존재감이 비록 티끌만큼 가볍다 할지라도. 편집자
노동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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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작업 라인의 노예
4천원의 삶과 행복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언제나 젖은 앞치마
몰락 가장의 부인과 올드미스
사장님, 손님, 남편님

제3부 마석 가구공장
톱밥 더미에 갇힌 꿈
빠빠, 마마 그리고 겐드라노나
13살 노동자의 귀환, 그리고…

제4부 서울 A대형마트
① 히치하이커의 슬픔
② 빈곤 가족의 탄생
③ 친구들의 엇갈린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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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생각했다. 보건증이 뭐지? “꼭 갖고 와야 해요.” A마트 축산팀 직원이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그는 나에게 서울 강북 A마트 양념육 점포의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취직하려면 보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건강보험증 말인가요?” “아니요. 보험증·주민증 말고 보건증. 보건소에서 받을 수 있어요.”

새로 지어올린 보건소 건물은 한산했다.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채혈실로 갔다. 소매를 걷는데 간호사가 말했다. “피는 안 뽑아요.” 무표정한 얼굴로 길고 굵은 면봉을 건넨다. “이걸 항문에 1cm 집어넣었다 빼서 오세요.” “….”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았다. 1cm까지는 못 집어넣은 것 같다.

지난 11월9일 첫 출근한 A마트는 매장 면적만 5천여 평이다. 1년에 한 번씩 보건증을 갱신하는 1천여 명이 일한다. 그들 대다수는 용역·파견 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이다. “그거 다 집어넣을 필요 없고, 살짝 갖다대기만 하면 되는데.” 27살의 철수(가명)는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다 이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할 때는 꼭 갖고 있어야 해요. 가끔 보건증 검사를 하거든요.” 철수는 5년째 A마트에서 양념육을 팔고 있다. 그가 일한 점포는 5년 동안 세 차례 바뀌었다. 항상 양념육을 팔았고 항상 A마트에서 일했는데, 고용주는 계속 바뀌었다. 그 수수께끼를 내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내 보건증, 정식 명칭으로는 ‘건강진단결과서’에는 장티푸스와 세균성 이질이 ‘불검출’됐고, 전염성 피부질환과 결핵은 ‘정상’이라고 보건소장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A마트 양념육 매장에서 한우 양념불고기, 돼지 고추장불고기, 매운 닭갈비 등을 판매할 자격이 있다는 증거였다. 철수가 명찰을 건넸다. ‘새롭게 모시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티나지 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명찰의 핀을 붉은 유니폼 왼쪽 가슴에 꽂았다.

마트에선 매일 지기만 한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마트에선 매일 지기만 한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1. 땀 안 나는 노가다

대형마트의 노동은 짧은 문장으로 간추릴 수 있다.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하시오.” 철수는 내게 많은 것을 보여줬다. 고기를 담을 비닐 봉지는 짧게 말아올려 쌓아둔다. 그래야 손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고기를 담아 팔 수 있다. 고기를 담을 때는 집게를 사용하지 말고, 비닐봉지에 손을 넣어 왈칵 담아야 한다. 그래야 양념이 여기저기 튀지 않는다. 전자저울에서 인쇄한 가격표는 비닐봉지의 바닥에 붙인다. 그래야 계산대 직원이 바코드를 쉽게 찾아 정산한다. 요긴한 기교였으나,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보고 따라 하시면 돼요.” 2년제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한 철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힘쓰지 마라, 버텨라

친절한 철수가 곁에 있어 나는 운이 좋았다. 25살의 영희(가명)에겐 그런 운이 없었다. 영희는 뒤편 돼지고기 점포의 판촉 점원이다. 그는 하얀 머리천을 질끈 매고 하루 8시간 동안 돼지고기를 굽는다.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중국산 파란 이쑤시개를 들고, 사람들은 영희가 구운 국내산 돼지고기를 찍어 먹었다. 그 고기 가운데 영희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석 달 전, 일당 6만원의 그 일을 영희가 처음 시작했을 때, 용역회사 사장은 딱 한마디를 했다. “마트에 가서 다른 아가씨들이 멘트 치는 걸 보고 배워.” 잔인하지만 절묘한 말이었다. ‘멘트를 친다’는 문장에는 판촉 점원이 감당해야 할 모든 기교가 담겨 있다. 멘트는 성대에서 술술 나오지 않는다. 가슴 아래 뜨거운 것을 쳐올려내야 한다.

영희는 용역회사 사장의 말을 잘 들었다. 보고 배워 멘트를 쳤다. 영희는 경기도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키가 165cm 이상이었다면 ‘내레이터’ 판촉요원이 됐을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추며 일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10만~13만원을 번다. 춤추는 대신 멘트만 치는 영희는 그 절반만 받는다.

163cm의 영희를 마트 본사 직원이 틈틈이 지켜봤다는 것을 영희는 몰랐다. 마트 본사 직원은 용역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영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트 본사 직원이 흡족해했다고 사장은 말했다. 영희는 마트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영희의 단골 ‘멘트’는 “차지고 쫄깃쫄깃한 꺼먹 돼지, 잡사보세요”다. 거기에는 “맛있는 흑돼지, 잡수어보세요”와는 격이 다른 유혹이 있다. “따라 배우다 조금씩 바꾸면 돼요.” 시식용 흑돼지를 굽느라 하루 종일 연기를 마신 영희가 쇳소리로 귀띔해줬다.

단 하나 허락된 행동

따라 배운 일 가운데 힘쓰는 일은 없었다. 다만 버텨야 했다. 그런데 버티는 일이 힘들었다. A마트는 아침 8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문을 닫는다. 마트 노동자들은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한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한다. 다른 날엔 오후 3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한다. 마트에서 일하는 9시간 가운데 1시간은 식사 시간이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한 8시간 동안 ‘절대로’ 앉을 수 없다. 5천 평이 넘는 마트 매장 안에 앉을 곳은 전혀 없다. 점원들은 매대에 기대는 것도 쭈그려 앉는 것도 금지된다. 점원들은 밥을 급히 먹는다. 그러고는 탈의실 긴 의자 위에 쪼그려 누워 잠깐 눈을 붙인다.

“거, 자세 좀 똑바로 하란 말이야.” 첫 출근 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옆 점포에서 일하는 50대 아줌마 점원이 매대에 손을 짚었다. 마트 본사 직원은 손님들이 들을까봐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점원들이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게 으르렁대며 말했다. 점원을 고용한 것은 용역·파견 업체다. 그래도 근무 태도는 본사 직원이 감독한다. 잘못 걸리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마트 정문 앞에서 6시간 동안 인사하는 교육도 받아요.” 철수가 말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징벌이겠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마트에서 일하려면 다음의 일도 어쩔 수 없다. 휴대전화 통화는 안 된다. 문자 확인도 안 된다. 앞치마를 두르고 화장실을 가면 안 된다. 청바지를 입고 와선 안 된다. 머리가 길어도 안 된다. 팔짱을 끼면 안 되고 다리를 꼬아도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되고, 서서 손님을 부르는 일만 된다.

내가 일한 매대는 가로 3m, 세로 2m의 ㄱ자형 유리 진열장이었다. 그 5m를 하루 종일 오갔다. 그런 방식으로 근육을 혹사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트 노동자들은 대부분 ‘짝퉁 마사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바닥이 반원형으로 생겨 피로감이 덜한 특허 신발이 있다. 점원들은 그 모조품을 신었다.

퇴근 무렵이면 발바닥이 바늘로 찌르는 듯 쑤신다. 무릎과 허리가 결린다. 편두통까지 생긴다. 발바닥의 압박은 중력을 거스른다. 뇌를 짓누른다. 출근 사흘째, 왼발 엄지와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이게 ‘고급 노가다’죠, 흐흐.” 땀나는 일은 없으나 막일과 다름없다고 철수가 말했다. 5년간 일한 철수는 여전히 14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조만간 내 왼발에 굳은살이 생길 거라고 그는 전망했다.

땀 안 나는 노가다.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땀 안 나는 노가다.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2. 서민은 우리의 적

A마트는 서울시 ㄱ동에 있다. 여기엔 서민들만 산다. 부자가 아주 없을 리는 없다. 단지 그들은 A마트에 나타나지 않았다. A마트의 손님들은 흔해빠진 파카와 청바지, 꽃무늬가 아무렇게나 박힌 치마를 입고 장을 봤다. 그들은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말라 있었다. 가난의 표지다. 어느 날, 퇴근길에 마트 앞 식당에 들렀다. 선지가 들어간 해장국을 2천원에 팔았다. 지금도 서울에 그런 식당이 있다. 옆자리 아저씨는 해장국보다 비싼 3천원짜리 소주를 마셨다. “1968년 예비군 창설 직전이었는데, 가난이 싫어서 재 너머 중학교 다니던 걸 때려치고, 지게 작대기도 던져버리고, 형님 호주머니에서 1천원을 훔쳐 서울로 올라온” 아저씨였다. 1천원 들고 서울에 올라와 2천원짜리 해장국을 먹으며 술주정을 부리는 곳. A마트는 그런 동네에서 물건을 팔고 있다.

“시식맨이 떴다”

오전에는 중년 또는 노년의 사람들이 온다. 때로 혼자, 때로 부부가 쇼핑카트를 밀며 온다. 그들은 팽팽한 출근길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으로부터 밀려났는지도 모른다. 오후에는 주부들이 온다. 물건이 비싸다고 불평한다. 그들의 남편은 비싼 물건을 기꺼이 사도 좋을 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 저녁 시간에는 젊은 사람들이 온다. 때로 혼자, 때로 부부가 팔짱을 끼고 온다. 온종일 노동에 시달린 그들은 늦은 저녁을 급히 차려 먹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특별히 ‘시식맨’을 솎아내 구분해야 한다고 철수가 말했다. 전기불판에 시식용 돼지불고기를 굽고 있었다.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손님, 고기가 덜 익었습니다. 조금 있다 오시죠” 말하며 고개를 드는데, 사내의 행색이 초라하다. 그의 입술 가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다. 사내는 이쑤시개로 고기를 찍어 올렸다. “덜 익었는데요.” 그는 덜 익었지만 맹렬히 뜨거운 고기를 내 얼굴에 던졌다. “너나 먹어!”

나보다 열 살 어린 철수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저런 사람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엄청 화내거든요.” ‘시식맨’은 자존심만 강하고, 물건을 사려는 욕심은 없다. 그들은 시식용 음식을 그 자리에서 두 번, 세 번씩 이쑤시개로 찍어 뻐득뻐득 먹는다. 어느 사내는 마트에서 방금 산 막걸리 마개를 열어 시식용 컵에 부었다. 한 잔 마시고는 시식용 돼지고기를 찍어 먹었다. 그는 4잔의 막걸리와 8점의 돼지고기를 먹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기를 구웠다.

시식맨이 돌아가면 마트 점원들은 험담을 시작한다. 변화 없는 풍경에 둘러싸인 마트 노동자들에게 시식맨은 뉴스다. 연재소설이자 연속극이며 스포츠다. “저 사람, 또 왔어.”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거 봤냐?” “매상은 안 오르고 이쑤시개만 동나는구나.” 시식맨은 수다한 사연을 지니고 근방에 사는 서민들이다. 제 처지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마트 노동자는 시식맨을 미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마트 노동자의 편이 됐다. 건너편 매대에서 돼지고기를 굽는데, 시식하려던 아주머니의 옷에 기름이 튀었다. 이곳은 자동차 주유소가 아니다. 튀어봤자 이쑤시개로 찍어낼 만큼의 한 점 기름이었다. 손님은 세탁비를 요구했다. 점원은 자기 돈 1만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의 월급은 120만원이었다. 일당으로 치면 4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5천원이 못 된다. 2시간의 품삯이 세탁비로 날아갔다. “기름 안 없어지면 다시 올 거야.” 손님은 시식용 돼지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나는 ‘세탁비 아줌마’를 마음 깊이 증오했다. 편을 나누자면, 물건 사는 서민이 아니라 물건 파는 서민의 편에 섰다. 그러나 도대체 이 세상에 좋은 편이 있기는 한가.

빛나는 강남 사람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계란 등을 파는 축산팀 직원 40여 명 가운데 최고참은 30대 후반의 민호(가명)였다. 그는 좋은 편이 누군지 안다고 말했다. “강남 사람들은 품질이 좋으면 값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간단 말이야.” 그는 A마트의 강남 지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강북 것들은 무조건 깎아달라 덤으로 달라 그런다고. 강남 사람들은 쇼핑하는 태도부터 달라. 눈이 반짝반짝해. 사람들한테서 빛이 난다고, 빛.”

빛깔이 좋은 한우 양념불고기는 100g에 2800원이다. 같은 고기를 강남 매장에선 3200원에 팔고 있다. 똑같은 고기를 비싸게 팔아도 강남에선 장사가 더 잘된다는 데 강북 A마트 점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민호는 기왕이면 빛나는 강남 사람들 곁으로 가고 싶어했다.

3. ‘평등’한 여사님과 형님

“갈릭 피자, 5천원 깎아서 9900원에 드리는 특별 세일, 두 분께만 드립니다.” 건너편 피자 매대 점원은 1시간째 저러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두 분께만’ 드릴 피자가 두 개만 놓여 있다. 누군가 하나를 들고 가면, 또 하나를 새로 올려놓는다. 영리한 녀석. 그는 그 짓을 매일 저녁 6시만 되면 시작했다.

옆 매대의 아주머니도 가끔 세일을 한다. 한우 불고기를 담고 양념장을 듬뿍 넣고 채소를 곁들여 비닐포장을 했다. 하나에 1만원씩 받고 판다. 그램을 달아 표시해뒀다. 손님들은 속으로만 곱셈을 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다 절반 값이라며 들고 간다. 정상 가격보다 저렴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거기엔 양념 국물과 채소의 무게가 포함돼 있다. 저녁 6시 이후, 남은 물건을 팔아치워야 할 때, 아주머니들도 영리해진다.

그들은 ‘여사님’으로 불린다. 그들의 남편은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많을 리도 없다. 그래도 그 많은 아주머니들은 모두 ‘여사님’이다. “여사님, 안녕하세요.” 옆 매대의 아주머니에게 철수가 그렇게 인사했을 때, 나는 도대체 여사님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을 여사님으로 부르는 40대 이하 젊은 점원들은 꼬박꼬박 나이를 따진다. “형님이셔. 인사드려.” 철수가 옆 매대 점원에게 말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조폭 보스 같은 대접을 받았다. 10년을 일했건 하루를 일했건, 나이가 많으면 형님이다. “그 나이에 왜 이런 데서 일하세요?” 그런 질문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한들, 몸으로 치러야 하는 노역은 서로 같다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다행일까.

시식만 하고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을 ‘시식맨’이라 부른다. 마트 점원들에게 ‘시식맨’은 경계의 대상이다. 같은 처지의 서민인데도 미워한다( ※ 사진은 기사에 언급된 마트와 다른 곳이다)

시식만 하고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을 ‘시식맨’이라 부른다. 마트 점원들에게 ‘시식맨’은 경계의 대상이다. 같은 처지의 서민인데도 미워한다( ※ 사진은 기사에 언급된 마트와 다른 곳이다)

나이는 존중하되, 연공서열을 무시하는 호칭이 ‘형님’이었다. 연공서열을 타파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마트 노동자에겐 타파할 연공서열이 없었다. 나는 ‘형님’이라 불릴 때마다 씁쓸했다. 일한 시간만큼 존중받아야 할 기술·지식 따위가 마트엔 없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철수, 영희, 민호가 앞으로 100만 년 동안 마트에서 일한다 해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있다. 승진이다. A마트에는 적어도 200여 개의 품목별 점포가 있다. 출입을 관리하는 보안요원, 차량을 안내하는 주차관리요원, 매대 앞에서 물건을 파는 판촉요원,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는 운반요원, 식품을 손질해 매대에 내놓는 작업요원, 매장 곳곳을 쓸고 닦는 청소요원, 물건을 계산하는 카운터요원 등 적어도 1천여 명의 노동자가 별처럼 흩어져 일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마트에 직접 고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마트는 각 점포를 세 놓을 뿐이다. 청소·주차관리·보안까지 외부 용역업체를 쓴다. 제조회사 입장에선 대형마트 안에 작은 대리점을 들여놓는 셈이다. 제조회사는 다시 중간업자들에게 점포 운영권을 입찰 부친다. 운영을 맡은 파견·용역 업체는 필요에 따라 시급 또는 연봉제의 방식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한다. 가끔 이들 업체가 다시 이벤트 업체와 계약을 맺어 ‘일당’을 주는 판촉요원을 고용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가 됐건 마트 노동자는 마트에 직접 고용되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치는 이는 어린아이들뿐

어지간해선 마트 본사 직원을 마트 매장에서 만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층, 다른 사무실에서 일한다. 마트에 들어온 업체들을 관리한다. 지점장, 부장, 과장, 대리 등으로 이어지는 직함이 그들에겐 있다. 당연히 연공서열도 있다. 승진도 있다. 오직 마트 매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겐 그런 일이 없다. 하루를 일하건 10년을 일하건 그들은 그냥 점원이다. 승진은 없고, 월급 호봉이 올라가는 일도 없고, 매출이 오른다고 보너스를 받는 일은 더구나 없다. 그들은 서로 여사님과 형님으로 치켜세운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색색깔 유니폼을 입고 있다. 여기에 있으니 금세 알아보라는 표시다. 지나가는 손님 귀에 대고 이리 오시라고 외친다. 그래봐야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마트 노동자는 투명인간이다. 또는 그림자와 같다. 손님들은 무표정하고 매정하게 지나간다. 삶의 피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어린아이들만 시선을 허락한다. 그들은 모자 쓰고 앞치마 두른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5m 매대 앞을 오가는 진자 운동을 하루 종일 하다가, 나는 문득 사람의 눈길이 그리워졌다.

4. 노동의 이유

영호(가명)가 앉아 있다. 냉동고로 가는 길목, 마천루처럼 높다란 박스 아래 앉아 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적힌 문을 열고 나서면, 한기가 훅 불어닥친다. 영하 20도 이하의 냉동고엔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이 부위별로 얼어 있다. 육중한 철문으로 닫아걸어도 차가운 바람은 창고 복도까지 밀려온다. 그 복도 한켠에 22살 영호의 아지트가 있다.

“제가 좀 끈기가 없어요”

쌓인 박스에는 계란이 담겨 있다. 종류만 20가지다. 무슨 수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닭에게 홍삼을 먹여 낳은 계란, 아무리 병 들어도 절대 약을 먹지 못한 닭이 신음하며 낳은 무항생제 계란, 들짐승이 잡아먹을까 걱정돼도 큰마음 먹고 풀어 키운 닭이 찬바람 맞으며 낳은 방사 계란, 민망하게 수컷과 암컷이 진짜로 그 짓을 하고 낳은 유정 계란….

“개수다 새었는데 로스납니다.” 벽보는 계란 박스 옆에 붙어 있다. 아무리 봐도 암호 같은 이 문장은 ‘개의 수다’ 또는 ‘개수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앞 문장에 암호를 푸는 열쇠가 있다. “계란 가져가지 마세요.” 1년째 일하고 있는 영호는 근처를 오가는 점원과 혹시 잠입할지 모르는 고객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계란 개수를 다 헤아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계란을 불쑥 들고 가버리면, 매장에 내놓을 계란 수에서 손실(로스·loss)이 납니다. 계란 가져가지 마세요.”

영호는 2년제 대학을 1년 다니고 휴학했다. 동물학을 배운 그는 학교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맞춤법을 무시한 그 벽보 아래, 영호는 박스를 쌓아 의자를 만들어뒀다. 앉을 수 있으므로 그는 A마트에서 소수의 특권층이다. 그러나 잠시 숨 돌릴 만큼만 허락된다. 매장의 계란은 계속 줄어든다. 빈자리가 생기면 안 된다. 그는 창고와 매장을 분주히 오간다. ‘자키’라고 부르는 이동식 운반장치에 계란 박스를 담아 옮겨 매장에 진열한다.

그가 받는 월급 100만원은 20여 계란업체가 판매율에 따라 분담해 지급한다. 전체 계란 매출에서 ‘홍삼 달걀’이 20%를 차지했다면, 그 업체는 20만원을 영호에게 준다. 나머지 80만원을 같은 방식으로 다른 업체가 준다.

“제가 좀 끈기가 없어요.” 영호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4년제 대학을 못 들어간 이유, 2년제 대학을 다니다 그만둔 이유, 1년째 100만원짜리 아르바이트로 만족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답이다. 그것은 이상한 말이었다. 가수 지망생인 그는 하루 9시간을 마트에서 일하고, 퇴근 뒤 노래 강사에게 수업을 듣고, 장차를 위해 피트니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그의 하루는 촘촘하다. 끈기가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마트에서 만난 이들의 거개가 그러했다. 불평하지 않았다. “세상은 공평한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저는 공부를 안 했으니까.” 철수는 두 번 대학을 들어갔다. 충청권의 지방대학에 입학했으나 금세 그만뒀다. 군대를 다녀와 A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시 수도권의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네 번에 걸쳐 350만원씩, 모두 1400만원의 등록금을 모두 제가 번 돈으로 냈다. 수업은 저녁 6시 이후에 있었다. 2년 동안 그는 잠을 서너 시간만 잤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다는 철수의 말도 사실과 다르다. 대학을 다니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세상은 정말 공평한가.

단 하나 허락된 행동.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단 하나 허락된 행동.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모두들 괜찮다고 말한다

철수가 그 노력으로 무엇을 얻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하기 전과 똑같이 A마트에서 양념육을 팔고 있다. 철수는 늘 웃었지만 세상일에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곁에서 은근히 부추겨도 그저 웃었다. “에이, 저는 우리 사장님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우리 마트만 한 데가 없어요. 좀 적게 받아도 여기가 훨씬 편해요.”

영희는 말끝마다 “말이에요”를 붙이는 버릇이 있다. 그는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회한이 없다. “대학 나와봐야 커피 심부름 하면서 90만원씩 받는단 말이에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면, 대학을 나온 20대 여성은 어딜 가나 잔심부름을 한다. “나는 투잡, 스리잡 하면서 130만원씩 벌면 된단 말이에요. 괜찮아요.” 그들은 모두 괜찮다고 했다. 제 탓이라고만 했다.

5. 우리 은하, 안드로메다 은하

마트 매장에는 시계가 없다. 손님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라고 그렇게 만들었다. 마트 노동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까지 잊는다. 금·토·일요일에 가장 바쁘다. 손님이 가장 많다. 모든 마트 노동자가 일한다. 대신 월요일부터 목요일 사이에 하루씩 번갈아 쉰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매장에 굴러다니는 스포츠신문을 철수가 펼쳤다. 야구선수 김태균이 일본으로 이적한다. 연예인 하하가 애인과 결별했다. 그리고 한 달에 465만원을 버는 32살 맞벌이 부부는 150만원씩 절세형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런 기사들을 철수는 무심히 넘겼다. 어느 것도 철수와 상관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상일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철수는 하루 매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자저울의 버튼을 몇 개 누르면 그날 누적 매출이 뜬다. 철수는 한 번 고기를 팔면, 꼭 버튼을 눌러 누적 매출을 확인했다. “어차피 주는 월급만 받으면 될 텐데?” 나의 물음에 철수는 또 웃었다. 마트에 들어온 모든 점포는 판매액의 20%를 수수료로 낸다. 100원짜리 물건을 팔면 20원을 마트에 낸다. 여기에 분기마다 나라에 부가가치세를 내야 한다. 남은 돈에서 인건비와 재료비를 제하면 업주의 이익이 된다. 그런데 셈법에 문제가 생겼다.

양념육 매대에서 내가 일하는 동안 주말을 포함한 하루 평균 매출액은 20만~25만원이었다. 한달이면 700만원이다. 이 가운데 20%를 마트에 내야 하므로, 140만원을 수수료로 뗀다. 남은 560만원 가운데 철수와 아주머니의 인건비로 260만원이 빠진다. 이제 300만원으로 다음달에 팔 고기와 양념, 채소 등을 사야 한다. 고추장 돼지불고기는 100g에 700원을 주고 사들여 1500원에 판다. 이 점포의 사장은 간신히 수지를 맞추고 있었다. 모든 고용주가 배를 두드리는 것은 아니다. 마트에 둥지를 튼 점포 사장들은 중소 자영업자였다.

마트의 모든 점포에서 모든 점원이 철수처럼 계산을 했다. 6개월 전부터 안 좋았고, 신종 플루 때문에 더 나빠졌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가 무엇인지, 최근 국내 경제 동향이 어떤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점포가 망하면 그들의 일자리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점만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일한 양념육 매대의 바로 옆에는 비슷한 품목을 파는 다른 양념육 매대가 있다. 50m 전방에는 또 하나의 양념육 매대가 있다. “경쟁시키는 거죠. 세상은 먹고 먹히는 거니까.” 철수가 말했다. 마트는 점포들을 먹고 먹히게 했다.

10m 길이의 돼지고기 매대는 더 치열했다. 적어도 6개의 서로 다른 브랜드가 대동소이한 돼지고기를 팔았다. 지키는 사람 없이 포장된 돼지고기만 깔아놓은 일종의 ‘무인 매대’였지만, 각 업체는 이벤트 회사와 계약해 수시로 판촉요원을 투입했다. 일당 6만원의 판촉요원 세 사람이 매일 동시다발로 일했다. “껍질이 살아 있는 오겹살, 세일합니다.” 바로 곁에서 받아친다. “세일은 여깁니다. 냄새 없는 돼지고기로 오세요.”

그것은 전투다. 그 싸움에서 어떤 노동자도 이기지 못한다. 매일 지기만 한다. 마트는 석 달에 한 번씩 여러 돼지고기 업체들의 매출액을 정산한다. 꼴찌가 되면 물건을 빼야 한다. 대신 다른 돼지고기 업체가 제 상품을 진열할 것이다. 승리는 항상 마트의 차지다.

그 은하에도 블랙홀이 있을까

기묘한 숫자들이 날아다니는 마트는 광활한 우주다. 축산팀은 하나의 태양계다. 저 너머에는 수산팀 태양계, 가공식품 태양계, 채소·과일 태양계 등이 있다. 마트 노동자들은 같은 팀 사람끼리만 어울린다. 축산팀 매출이 이 모양인데, 수산팀 태양계 일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다. 식품을 파는 여러 태양계들이 모인 1층이 ‘우리 은하’라면, 생활용품·의류·가전 등을 파는 2층은 ‘안드로메다 은하’다. 아, 거기에도 경쟁에서 밀려나면 소문 없이 빨려들어가는 블랙홀이 있는지, 우리 은하 사람들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6. 수평 이동의 노동

2년제 대학을 나온 철수는 그래서 사장이 두 차례 바뀌었다. 줄곧 A마트에서만 일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만 졸업한 영희는 주유소·노래방·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100만원 이상 받아본 적이 없다. 주유소에선 기름 냄새 때문에 토악질을 했다. 노래방 카운터는 ‘도우미’ 제안이 자꾸 들어와 그만뒀다. 손님들 술 시중을 들다 흠씬 얻어맞는 노래방 도우미들을 영희는 자주 봤다. “불법 영업이니까 두들겨맞아도 신고를 못한단 말이에요.”

이들을 위한 노동조합은 마트에 없다. 마트 본사 직원들이 결성한 노조가 있지만, 그것은 웜홀 너머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철수와 영희는 마트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다. 같은 처지의 마트 비정규직을 모두 아우르는 것은 어떨까. 철수와 영희가 ‘크로스’해서 무적의 로봇으로 거듭나는 일은 만화에서나 가능하다. A마트의 철수와 영희는 오늘의 매출과 일당 때문에 바쁘다.

매일 공중곡예를 하는 A마트 노동자들은 다른 그물을 바닥에 깔았다. 점포가 망하면 새 업체가 들어온다. 거기에도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전까지 여기서 일한 철수가 아주 성실해요.” 옆 점포의 노동자들이 입소문을 낸다. 새 사장은 옛 노동자를 채용한다.

갑작스런 히치하이킹의 끝

여의치 않으면 여행을 시작한다. 걸리는 대로 잡아탄다. 매장 내 다른 점포로 옮겨간다. 냉동고에서 쇠고기를 썰다가 돼지고기 판촉 직원으로 옮기고, 점포가 빠져 잠시 쉬다가 만두 업체에 취직하는 일이 생긴다.

이 별에서 저 별로, 이 태양계에서 저 태양계로 옮겨가는 ‘히치하이킹’이 언제나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다. 마트에서 일한 지 2주일 만에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양념육 점포가 문을 닫았다. 그곳 사장은 주차장으로 봉고 트럭을 불렀다. 유리 진열장 2개를 포개 싣고 굵은 고무줄로 동여맸다. 트럭 옆에서 사장은 철수에게 말했다. “전자저울 남은 게 있어. 필요하면 가져다 써.”

23살의 동수(가명)도 짐을 다 싣고 철수에게 인사했다. 동수는 그 점포에서 1년 동안 일했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할 자리가 축산팀의 다른 점포에는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동수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먹고 먹히는 우주에서 동수는 먹히는 편의 일을 했을 뿐이다. 누가 먹는 편인지 누군들 알았겠는가.

그는 경기도에 있는 4년제 대학을 휴학하고 있다. A마트에서 내가 만난 유일한 4년제 대학생이었지만, 그 역시 복학할 생각이 없다.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사라졌으므로, 동수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좀 쉴 생각이에요. 연락할게요.” 동수가 철수한테 말했다. 언제나 웃던 철수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호에는 이들의 성장 과정과 가족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또 다른 ‘히치하이커’들도 등장합니다.


상용직 취업, 고졸자 17%·대졸자 51.1%
대졸자 실업이 문제라고?


한국의 학력별 노동 통계는 연령별·성별 노동 통계에 비해 덜 체계적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은 기존 노동 통계를 활용한 ‘신규 졸업자의 노동 현황’을 지난해 발표했다. 최신 자료가 2004년 수치라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상황까지 반영하진 못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뒤에 펼쳐진 전반적인 변화를 일별할 수 있다.
학교 졸업 직후 취업 직종(2~4월 평균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학교 졸업 직후 취업 직종(2~4월 평균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04년 신규 졸업자의 학력별 실업률을 비교하면, 대학 졸업자가 30.9%로 가장 높다. 2년제 대학 졸업자의 실업률은 23.7%, 고등학교 졸업자의 실업률은 22.7%다. 이 수치만 보면 대졸자의 실업이 가장 큰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실업이 문제가 아니라 취업이 문제다. 학력마다 일하는 직종이 크게 다르다.
2004년 고등학교 졸업자의 44.3%가 임시직, 38.7%가 일용직에 취업했다. 상용직 취업은 17.0%에 불과했다. 2년제 대학 졸업자 가운데 임시직을 얻은 경우도 50.1%나 됐다. 12.4%가 일용직이다. 상용직은 37.5%로 고졸자에 비해서는 높다. 그러나 대학 졸업자의 51.1%가 상용직을 구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졸자는 정규직을 기다리며 취업을 회피한다. 그러나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한 이들은 일용직과 임시직의 길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들의 취업률이 대졸자보다 다소 높은 이유다. 관련 보고서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은 “이들의 일용직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청년실업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은 취업을 촉진하는 게 아니라,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히치하이커’의 끝없는 방랑에 대한 처방이다.


‘무업자’ 가운데 고졸 59.6%
취업을 삼킨 학력의 벽


한국노동연구원은 2008년 보고서에서 “청년실업보다는 청년 취약계층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일본 등은 이미 청년실업 문제의 초점을 바꾸고 있다. 이들 나라는 ‘무업자’(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관련 통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업자는 취업의 의지와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학력이 문제일 수도 있고, 끝없는 불안정 노동에서 스스로 이탈한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주요 선진국에선 청년 무업자를 중심으로 실업 대책을 세운다.
청년 무업자의 학력 분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청년 무업자의 학력 분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은 2004년 노동 통계를 바탕 삼아 국내 청년 무업자의 연령별·학력별 분포를 제시했다. 연령별로는 20~24살이 44.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연령대는 고등학교 및 2년제 대학 졸업자가 취업에 나서는 시기다. 4년제 대학 진학에 실패한 사람들이 단기간의 불안정 노동에 이어 청년 무업자로 전락하고 있음을 웅변하는 수치다. 4년제 대학 졸업자가 주를 이루는 25~29살이 청년 무업자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1%에 머물렀다.
학력별로 보면 그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2004년 전체 청년 무업자 가운데 중졸 이하 학력자는 7만6천 명(9.4%), 고등학교 졸업자는 48만1천 명(59.6%), 2년제 대학 졸업자는 10만2천 명(12.6%)에 이르렀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한국 청년 무업자의 92%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80%가 넘는 대학 진학률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찬하는 이면에는 ‘학력의 벽’을 넘지 못한 청년 비정규직, 청년 무업자들이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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