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한가운데 무츠란 이름의 미군 사진병이 있었다. 그는 잡혀온 ‘폭도’들, 폭도의 손에 희생된 여성의 주검, 사태 수습을 위해 제주로 모여든 역사적 인물들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았다. 그러나 4·3의 진실은 그가 찍지 않은 사각(死角), 안 보이는 곳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수집한 사진들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친절한 설명을 달았다.
나는 제주도민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났고,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기 전까지 내 삶의 반경은 섬이었다. 섬 밖에 나가본 것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두 번의 수학여행이 전부였다.
나는 민오름을 좋아했다. 집 뒷산치고는 큰 오름이었다. 올라가면 제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풍광이 좋았다. 민오름을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코앞에 오라리 연미마을이 있다. 국민학교 소풍 때마다 지나쳤던 오라리 마을이 제주4·3 때 등장하는 ‘그 마을’임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2000년 즈음이었다. 당시 4·3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춰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며 내 생활과 기억의 일부이던 장소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던 오름에 으레 있는 버려진 무덤의 의미도 예전과 같을 순 없었다.
1948년 5월1일 일어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0년 넘게 ‘폭도’들이 오라리 마을을 공격해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경찰이 격퇴한 사건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9년 4·3취재반의 조사로 경찰의 사주를 받은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사태‘에 대한 군경의 무력 진압이 본격화됐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듯 4·3이라는 대량 학살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무성영상 한 편이 남아 현재에 전한다. 라는 이름의 영상은 제주경찰감찰청 입구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자수한 ‘폭도 살인범’과 노획한 ‘살인 무기’를 클로즈업한다.
기관총에 비하면 영상이 전하는 살인 무기라는 것은 죽창, 손도끼, 칼 등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느릿느릿 구부정한 채 건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역시 ‘폭도 살인범’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약해 보인다. 1948년 5월은 아니지만 6월에 종군기자로 취재했던 조덕송 특파원이 쓴 기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포로들이 후송되어 온다. … 부린 채 말없이 이끌려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
영상은 곧바로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맞아 죽은 여성의 주검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미군 장교가 파괴된 도로를 지켜보는 모습과 함께 이내 미군과 경찰이 주민들을 심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라리 마을의 일부 가옥들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은 L-5 정찰기를 타고 공중 촬영한 장면과 오라리 마을로 출동해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 모습을 지상 촬영한 장면이 교차편집돼 있다. 영상은 엉성하나마 의도를 갖고 편집된 것이다. 그렇다. 이는 단순 기록영상이 아니다. 사전 각본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기록물이다. ‘제주4·3’ 무장대가 잔악무도한 ‘폭도’고,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인한 것‘처럼’ 편집을 했다.
이 영상을 찍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딱 그 시간에 공중과 지상에서 ‘오라리 사건’을 촬영할 수 있었을까.
당시 제주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에 배속된 123통신사진파견대 스틸사진가와 영상카메라맨이 있었다. 이들은 1948년 4월30일, 5월1일, 5월5일, 5월15일 제주도의 모습을 찍었다. 이 가운데 스틸사진을 찍은 무츠와 영상카메라맨 샤이다크가 이목을 끈다. 샤이다크가 촬영한 영상 속 일부는 무츠의 사진에 정지화면으로 포착돼 있다.
군 사진병들은 사전 기획 목적에 따라 특정한 시각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을 임무로 한다. 샤이다크가 찍은 영상만큼 무츠의 사진 속 시선이 매우 흥미롭다.
무츠는 123통신사진파견대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다. 나는 그가 1948년 1~6월 한국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132장을 확인했다. 그는 서울, 인천, 수원 등 중앙은 물론 춘천과 제주 등 이른바 전선 지역을 두루 넘나들었다. 정치와 군사 관련 주요 피사체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을 사람들 일상 속에서 잘 포착했다.
4·3사건과 관련해선 18장(1장은 추정)의 사진이 남아 있다. 무츠의 사진 속 시선에서 ‘사각화’(死角化·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함)한 것은 무엇일까?
무츠의 사진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공산 폭도’들의 잔악한 만행이다. 연구자들은 이 사진들이 프로파간다(선전) 목적으로 촬영됐다고 평가한다. 1948년 4월28일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과 무장대 대장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상’이 맺어진다. 그 직후인 5월 초는 국방군 강경파에게 이 협상을 파기하고 강경 진압을 정당화해줄 프로파간다가 절실하던 시기였다.
4·28 평화협상은 말이 평화협상이지 ‘귀순공작’에 가까웠고, 김익렬 연대장이 단독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의 지시와 제주 59군정중대장 제임스 맨스필드 중령이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협상 결과가 기대 이상이어서, 보고를 받은 맨스필드 중령이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딘 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 중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사태의 조기 진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현재 병력으로 무력 진압을 했을 때 얼마나 빨리 사태를 끝낼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에게 제주도민의 안위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하지 중장 주변의 미군 방첩대와 정보참모, 군정경찰을 대표하는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무력을 동원한 강경 진압 방침을 권고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5월1일 김익렬 연대장이 만난 미 제24군단 정보참모 중령과 방첩대 소령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 방첩대 소령은 김익렬이 자체 조사한 오라리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이 한 것이다”라며 일축했다. 게다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토벌 강화를 지시했다. 하지 중장의 정보 라인과 경찰 수뇌부가 긴밀히 연계하면서 제주 지역 경비대 책임자의 의견을 묵살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진실을 알린 4·3취재반의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양조훈의 평가가 주목된다. “평화협상의 구도를 미군과 경찰이 깨뜨렸다. 그뿐 아니라 제주도의 유혈을 불러일으킨 초토화의 근간도 미군의 발상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김익렬 연대장이 보고한 오라리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5월1일 발생했던 일들만 정리하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서 좌익 혐의가 있는 집을 찾아 불을 질렀다. 12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 오후 1시께 우익 청년단은 무장대 20여 명의 추격을 받았다. 그즈음 마을 어귀에서 마을 출신 경찰 가족 1명이 피살됐다. 무장대 출현 소식을 듣고 경찰기동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무장대는 떠났고, 주민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경찰은 마을 입구부터 총을 쏘며 들어왔고, 주민들은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여성 1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 경찰은 경비대 9연대가 마을로 출동하자 황급히 철수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직접 현장 조사를 진행했고 다음날 방화 주동자로 대동청년단 단원을 체포, 구금했다.
40년 뒤 4·3취재반은 방화범 대동청년단원과 경찰의 총에 맞아 피살된 여성의 딸을 찾아냈다. 딸의 증언이 흥미롭다. 당시 “하늘에서 비행기가 오랫동안 머리 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공중에서 촬영하고 있던 비행기를 본 것이다.
이후 미군은 영상과 사진으로 5월4일 이후 제주의 모습을 담았다. 공중에서 제주도 제59군정중대 건물, 공중과 지상에서 제주항의 모습을 담았다. 장소는 매우 상징적이다.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의 존재와 역할이 미묘하게 시각화하는 장소다. ‘폭도’와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이 드러나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를 통치하는 제59군정중대에서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 주한 미군정 최고 지도부가 비밀회의 참석을 위해 제주에 도착하는 장면, 미군 구축함이 제주도를 봉쇄하기 위해 제주항에 정박한 장면 등이 포착됐다.
특히 5월5일 비밀회의를 위해 주요 인사들이 제주에 도착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은 참 흥미롭다. 딘 군정장관,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군정경찰의 책임자인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날 회의에서 맨스필드 중령은 회의 내용이 ‘극비’이고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음에도, 그다음날 딘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제주 사태’를 바라보는 회의 참석자들의 시각이 달랐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외부의 ‘공산분자’에 의한 것이고, 사태가 곧 회복될 것이라 했다.
이 극비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고, 무엇을 결정했을까? 김익렬의 회고록을 보면 ‘제주 사태‘의 원인을 둘러싸고 상반된 의견 두 개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경찰은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므로 군경이 합동으로 무력 진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사태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됐고, 경찰의 실책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며 무력 진압이 능사가 아니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해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맞섰다. 4·3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처지에 서면 ‘폭도’와 ‘양민’을 구별한 김익렬 연대장의 시각에도 한계가 있지만, 당시 제주 지역 군 책임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그런 정도의 입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격분한 김익렬 연대장은 몸싸움을 벌였고, 다음날 연대장 직위에서 해임됐다. 조병옥의 빨갱이 몰이야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안재홍 민정장관의 통곡은 인상적이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것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이후 상황은 송호성 사령관이 “제주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예상한 것처럼 전개됐다. 5·10 총선거가 제주도 2개의 지역구에서 무산되자 미군은 경찰과 경비대를 지휘하면서 강경 무력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 무렵 미 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돼, 현지의 모든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사건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면 평정될 것이다.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는 그였다. 여름 이후 미군 사진병의 시각에서 제주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유혈 진압을 시각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사진병들은 한국의 이곳저곳에서 활동했지만, 초토화가 전개되던 제주도는 여전히 그들의 사각에 있었다. 제주에서 꽃모가지째 떨어지던 붉은 동백꽃은 2년 후 전국에 걸쳐 벌어질 동족 학살의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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