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이 잊힌 게 아니라면,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4·3이 외롭지 않았다면, 야만의 세월을 기록한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 현기영부터 김석범, 강요배가 있어 4·3의 슬픔이 뭍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영화 가 있어 4·3의 비극이 젊은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본디 예술이 세상에 대한 위로라고 할 때, 그 모범이 여기에 있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 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 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 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중에서)
1978년 계간 가을호에 현기영(사진) 선생의 중단편 이 실렸을 때, 그것은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제주4·3’을 발음하지 못했던 유신 말기에,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평생을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의 비극적 생을 다룬 이 소설은, 제주도 방언의 질박함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남다른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작품의 성과만으로 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은 소설이기 전에 4·3의 진실을 폭로한 최초의 기록으로 평가돼야 한다. 문학과 활자 매체를 통틀어 4·3을 처음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뭍사람들에게 4·3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비극을 알게 된 우리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훗날 4·3 진상 규명 운동에 뛰어든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독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꿈속에서 순이삼촌이 나타나”3월6일 오후, 경기도 성남 자택에서 만난 현기영(77) 선생은 “내게 4·3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던 운명 같은 것”이었다며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때문에 두 번의 고초를 겪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4·3을 쓰지 않고 다른 걸 쓸 수 없는 건 제주 출신인 내 염치 때문”이라는 노작가의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젊어 보였다.
초기작 와 에서도 4·3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4·3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은 1978년 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경외감마저 든다.젊을 때라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처음부터 4·3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데뷔하고 보니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더라. 4·3을 말하지 않고 다른 걸 쓰면 엉뚱한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세상 물정 몰랐던 거다.
해야 할 말을 했다는 이유로 필화 사건도 겪었다.소설집이 나온 1979년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 동안 고문을 받고 한 달간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인 1980년에도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받은 끝에 책이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등단 이후 가장 왕성하게 집필해야 할 시기에 고초를 겪은 셈인데.그렇게 얻어맞고 나오니까 억울해서 못 견디겠더라. 더 이상 쓰지 말라는 건데, 아! 너무 억울해서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맞을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 한동안 술로 허송했다. 글을 못 쓰겠더라고. 그즈음 연세대 학생들이 찾아왔다. 내게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오늘이 4·3입니다” 하는 거야. 그렇게 지냈지. 그해엔 5·18도 터지고 더더욱 술만 마셨어요.
다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꿈속에 나타난 순이삼촌 때문이었다고 들었다.술로 분노를 삭이며 지낸 지가 1년이 채 못 되었을 때다. 어느 날 낮술 먹고 집에 고꾸라져 있는데 빛 속에서 소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나타나더라고. 순이삼촌이야. 내가 만든 소설 속 주인공이 정말 실제 인물처럼 나타났던 거지. 백일몽이었죠. 나보고 ‘일어나라’고 소리쳤어. 정신이 번쩍 들었지. 마치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람들을 손잡고 이끌어내는 장면과 비슷했어. 그 꿈 덕분에 위안을 얻고 절망을 버릴 수 있었지.
“‘공비’라는 말 때문에 국보법 면해”플래시백은 별거는 아니고 영문 소설에 있는 기법을 가져온 거지. (웃음) 지금 생각해도 고모부 캐릭터를 넣은 건 잘한 거 같다. 소설에도 썼지만 당시 도피자 가족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해보려는 방편으로 이런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연대가 교체돼 육지로 떠남에 따라 거의 파경에 이르고 아비 없는 자식들만 서럽게 자라는 경우도 많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 공동체의 비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4·3 연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문학이 당대의 삶을 재구성한 느낌이 들었다.제주 공동체의 본질이지. 그때는 계산하고 썼어. 고모부의 입을 빌려 동네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일부러 ‘공비’라고 썼어.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걸려고 하는데 공비라는 말 때문에 안 됐다고 하더라.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이후엔 ‘산사람’이나 ‘입산자’라고 썼지.
이번 설에 문재인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는데, 무슨 얘길 나눴나.감사하지. 묻지 않았는데, 4·3 70주년 추념식에 내려와서 참배한다고 하시더라. 4·3 전국화하느라 다들 애쓴다고 격려하시고. 특별법 통과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드렸는데 아마 아시겠지.
4·3 70주년을 맞아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도 일고 있다.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항쟁이었지. 이데올로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해방 후에도 강제 공출에 시달린 제주 민중의 생활고가 터져나온 거다. 항쟁과 대학살의 측면이 함께 있다. 변방과 속국의 제주 역사가 현대에서 재현된 것이지. 중앙이 가해 세력이고 섬은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70주년을 맞는 4·3이 대한민국 역사로 기록돼야 하는 이유다.
제주 민란을 다룬 와 일제 때 잠녀항일투쟁을 다룬 등 4·3문학의 전사(前史)가 되는 작품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왔지만, 여전히 선생을 4·3 작가로 일컫는다.숙명이다, 버릴 수 없는. 문학이 해방이고 자유인데 구속받지 않고 쓰고 싶은데 잘 안 돼. 벗어나려고 유년의 눈으로 제주의 자연을 그린 도 썼지만 그 자연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거야. 이제 편하게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인생이 한순간이더라고. 이거저거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더라.
“다 미친 세월이었던 거지” 개인적으로 노인의 혜안이 눈부신 에서 4·3 화해의 한 가능성이 엿보인다.오래전에 제주의 한 마을로 취재를 갔더니 두 할머니가 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한 사람 남편은 경찰인데 싸우다 죽고, 한 사람은 죽은 산사람의 부인이더라. 두 할머니가 사이좋게 지내더라고. 다 미친 세월이었던 것이지. 그런 것들이 화해와 상생의 단서가 되지 않을까.
성남=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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